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김홍도는 1745년에 태어나서 1806년 이후 어느 해엔가 죽었다. 최근의 학자들은 1806년 경에 죽은 것으로 추측한다.
김홍도는 지금 그의 그림으로 전하는 그림만 500점에 육박하고 그 중에도 다수의 진작과 걸작이 있다. 김홍도는 한국 회화사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양과 질 높은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김홍도의 부인이 누구이고 김홍도가 말년을 어떻게 보내다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다만 정조가 돌아간 이후, 불행하고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운명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게 전부이다. 우리는 김홍도의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무수히 많은 서양화가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사대부가 아닌이상 스스로의 초상을 남기는 일이 없었으므로 김홍도는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려내면서도 자신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다.
조선시대 화원에 대해서 알길은 막막하다. 요즘 사람들이 신윤복이 단 두줄 남긴 화가라서 여자일지도 모른다고들 말하지만, 조선시대 화원 화가 중 누가 2줄이상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김홍도만 해도, 비교적 자료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미비하기만 하다. 최소한 부인이 누구이고, 언제 죽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1745년 ~ 1806년?
이 물음표를 볼때마다 안타깝기만 하다.
당시의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화가의 죽음을 왜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화원을 존대하는 시대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인가.
표암 강세황 姜世晃 ( 1712 ~ 1791 )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했다.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다.
단원김홍도의 스승이었다.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는 헌정(憲靖).

강세황 자화상. 1782, 비단 채색, 88.7x51cm, 개인소장
강세황(1713-1791)은 18세기 서울의 예단의 총수로서, 소위 태서화법으로 불리는 서양화법을 중국에서 배워 소개한 개척자이다.
뛰어난 글씨와 그림을 남긴 서화가로서, 좋은 글을 남긴 문장가로서, 한성판윤을 지낸 관리로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70세 노옹이 그린 자화상입니다. 손도 떨리고 기력도 떨어졌을 터인데, 수염이나 관모의 섬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세필로 다 그려냈습니다.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그 재주도 재주려니와 그 성실함이 어디 가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 ·이수봉(李壽鳳)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초상 ▶
시·서·화의 삼절로 불렸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들
현재 김홍도에 관한 기록의 시작은 1765년 21살 때이다.
궁중의 의궤병풍인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를 이때 주관하여 그렸는데, 김홍도가 이미 21살 때에 도화서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이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이므로 이미 21세 이전부터 정조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현당수작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데, 현재 그림은 없고 글씨 두 폭만 남아있습니다.
김홍도는 이후 1773년 29살 때 영조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을 그린다. 주관화사는 변상벽,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신한평,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 등이었다. 변상벽, 신한평 등과의 나이 차이를 생각했을 때 김홍도가 얼마나 이른 시절부터 이름이 났고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이 때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같은 해에 그려진 신언인도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김홍도의 '신언인도(愼言人圖)'는 말을 삼가고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은 그림으로,
김홍도가 29세(1773년)에 그린 초기작이며 현재까지 알려진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로,
그림과 표구상태가 좋지 않은 게 단점이다.
'말이 많으면 허물이 많고 일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는 『논어』의 '공자가어' 구절을 화제(畫題)로 삼아
입을 꿰매고 있는 인물을 통해 신중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스승인 강세황이 그림 위에 예서로 글을 썼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은 정범조이다.

朝鮮時代 /金弘道 (1773年29歲作) / 紙本水墨 114.8×57.6cm /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고해상도 이미지 ㅣ이미지 공유마당, Google Arts & Culture
화제에 “강세황이 써서 좌청헌左靑軒에게 드린다”라고 되어있어 정범조(丁範祖, 1723~1801)에게 준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좌청헌이 원주 단구리에 있는 정범조의 재실 당호였기 때문입니다. 정범조는 영·정조 시대 문신으로 시율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정조에 의해 당대 문학의 제1인자로 평가되어 7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 오랫동안 문사의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 출처 : 후소가 읽어주는 옛 그림 - 3. 김홍도 <신언인도> )
김홍도(金弘道·1745~?)가 그린 ‘신언인도(愼言人圖)’는 ‘금인명배’에서 동상만 독립시킨 작품이다.
그림 속 인물이 ‘신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맨 위의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쓴 제발과, 신언인의 입에서 볼 수 있는 ‘삼함’ 그리고 발 아래 놓인 대좌다. 신언인의 등에 써 있어야 할 명문은 강세황의 제발로 대신했다.
(출처 : 입을 세 번 꿰맨 동상과 할 말 못하는 비겁자들(주간조선))

작자미상, ‘금인명배(金人銘背)’ 공자성적도, 조선 1742년, 종이에 색, 39.6×28.7㎝,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 김홍도 愼言人圖 에 쓴 표암의 畵題
상단의 강세황(姜世晃)이 예서(隸書)로 적은 화제(畵題)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옛적에 말을 삼가한 인물이다.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일을 많이 벌리지 말라, 일이 많으면 우환이 많다.
안락하면 반드시 경계하라.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 그 화가 창차 오래 갈 것이다.
무슨 해가 있으랴고 말하지 말라. 신령이 장차 사람을 엿보느니라.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멸하지 않고 큰 불처럼 분명하니 어쩌겠는가?
졸졸 흘러서 막힘이 없나니 끝내는 큰 강을 이루느니라.
혹은 면면히 끝어지지 않고 이어져서(그대를 얽매는) 그물이 되리라.
터럭끝만큼도 어그러짐이 없어야만 장차 도끼자루(권한)를 잡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능히 신중히 할 수 있어야만 복의 근원이 된다.
무슨 다칠 일이 있으랴고 말하지 말라. 재앙의 문이다.
강함으로 밀어부치는 자는 (온전한)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그 적수를 만난다.
도적은 주인을 미워하며, 백성은 그 윗사람을 원망하는 법이다.
군자는 천하가 (자신의) 위로 올라설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아래쪽에 처한다.
뭇 사람이 (자신보다) 앞설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 뒤쪽에 자리한다.
따뜻하고 공손하며 신중한 덕성으로 사람들이 경모하게 하며
암컷의 부드러운 (성품을)지니고 아래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람들이 모두 저쪽으로 달려갈 때 나는 홀로 이쪽을 지킨다.
사람들이 모두 혹하여 있을 때 나는 홀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존귀하고 높아도 사람들이 나를 해하지 못한다.
대저 큰 강이비록 아래에있지만 모든 개울보다 긴 것은 그것이 낮은 때문이다.
하늘의 도는 알지 못하나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경계할지어다!
1773년 8월 강세황이 써서 좌청헌(左靑軒)에게 드린다.
출처 : 단원 김홍도 필신언인도(愼言人圖)
신언인도 이후의 작품이 1776년 32살 때에 그려진 유명한 군선도이다.
군선도는 김홍도가 이른 시기에 그린 대표작이면서도, 한국 회화사에 손꼽힐 만한 대작 인물도이다.
이른 나이에 이만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29살에 어진을 그린 김홍도의 이름이 과연 허명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김홍도 필 군선도 [郡仙圖] 병풍(국보). 1776년, 지본수묵담채(비단에 색), 132.8 × 575.8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전통적인 신선도에 풍속도 기법을 접목한 한국적 도석인물화의 대표작이다.
지금 남아있는 김홍도의 <군선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139호 <군선도> 병풍이다.
길이가 무려 5m 75cm나 되는 대작이다. 원래는 8폭의 병풍 그림이었으나 현재는 3폭의 족자로 되어 있다.
이들은 지금 신선들의 여왕 서왕모 생일 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중이다. 이 그림은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다.
참고 :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 필 군선도 병풍(국보)

<바다위의 신선들(해상군선도 海上群仙圖)>는 도교에 나오는 신선 19명을 조선옷 입은 신선으로 그린 그림이다.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서왕모가 곤륜산 옆 큰 연못에서 연회를 베푸는 그림 <요지연도>를 김홍도는 바다를 건너는 신선들만 그렸다.
이 작품은 단원(檀園)의 나이 31세에 그린 역작으로서 소장기<小壯期>의 넘치는 작품 의욕<意慾>이 드러나 있다.
전체 팔련폭(八連幅)으로 된 대병(大屛)으로 꾸며졌던 대작이며 부인형(否仁形)으로 두드러진 눈과 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앞으로만 나부끼는 듯 싶은 의습(衣褶)의 표시 등 단원(檀園)의 신선도법이 지니는 특색과 주저없는 필세(筆勢)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일찍이 신선도를 잘 그리는 도석인물 화가(道釋人物畵家)로서 화명(畵名)을 날리기 시작하였는데,
단원이 40대 이전에 그린 그림 중에는 도석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도석인물화란 불교나 도교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인물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병신춘사(丙申春寫) 사능(士能)"이라는 관지가 있어 단원의 기년명 작품중 가장 이른 것으로, 서왕모(西王母)의 반도회(蟠桃會)에 초대를 받고 약수(弱水)를 건너는 군선(群仙)의 파상장면(波上場面)을, 배경을 생략한 채 그린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19명의 신선들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뉘어져 화면 왼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꽃바구니를 맨 하선고(何仙姑)와 마고(麻姑) 등의 여선(女仙)들이 맨 앞에 있고, 이어서 하얀 나귀를 탄 장과노(張果老), 딱따기를 든 조국구(曹國舅), 어고간자(魚鼓簡子)를 든 한상자(韓湘子)의 모습이 보이며, 맨 뒤에는 외뿔소를 탄 노자(老子)와 종이를 펼쳐 들고 붓을 든 문창(文昌) 등이 따르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대부분 중국의 신선전(神仙傳) 화본에 나오는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활달하고 거침없이 묘사한 필치와 생동감 있는 인물 표현에서 신선도에 대한 단원의 확실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호암미술관 소개>

맨앞의 무리에는 꽃바구니를 맨 남채화(藍采和-여장을 한 남자신선이라는 가설도 있음), 천도복숭아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는 하선고(何仙姑)가 복숭아를 들고있다.

그 뒤로 흰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을 보고 있는 장과로(張果老) (이 당나귀는 평소에는 종이처럼 접어서 들고 다닌단다),
딱따기 모양의 판을 치고 있는 조국구(曹國舅), 전생을 기억했다는 한상자(韓湘子)가 대나무통 악기를 들고 있다.
장과로의 어깨 위로 박쥐 한 마리가 날아간다. 장과로는 백발의 노인인데 그 나이를 알 수 없지만, 흰박쥐의 영혼이 환생해서 장과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과로의 그림에는 박쥐가 함께 그려져 있다.

맨뒤쪽의 무리에는 외뿔소를 타고 「도덕경(道德經)」을 들고 있는 노자(老子)가 있고,
서왕모의 복숭아를 무려 세 번이나 훔쳐 먹어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던 동방삭(東方朔)이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고,
종이를 들고 걸어다니면서도 글을 쓴 문창(文昌)이 두루마리와 붓을 들고 그 뒤를 따른다.
연금술사인 종리권(鍾離權)은 머리를 깎은 이이고, 머리에 두건을 두른 이가 종리권의 제자인 여동빈(呂洞賓)이다.
맨뒤에는 술을 좋아해서 신선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신선(神仙)이 된 이철괴(李鐵拐)가 빈 호리병을 들고 아쉬워하고 있다.
그런데, 노자의 발 아래 족제비 한 마리가 보인다. 그냥 가면 심심해서 족제비를 넣어 작은 소동을 일으켰던 화가의 장난끼가 아닐까? (참조 : 도교 8선, 도교의 신들 )
중국 고대신화에 의하면, 서왕모(西王母)는 아득한 서쪽 곤륜산의 아름다운 연못 요지(瑤池)에 살았다. 요지의 정원에는 2400그루의 복숭아 나무가 자랐다. 반도(蟠桃)라는 이름의 이 복숭아는 3000년에 한 번 열매를 맺었고 이를 먹으면 누구나 신선이 돼 3000년을 살 수 있다. 서왕모는 매년 자신의 생일에 성대한 생일연을 열였으며 사방의 모든 신선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거친 파도 헤치는 신선, 불로장생의 욕망을 담다 - 매일경제
단원 김홍도는 30대에 유난히 신선의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창덕궁에 물위를 걸어가고 있는 군선도를 남겼다고 한다. 물론 실체는 전하지 않는다.
리움미술관에 있는 군선도 말고, 중앙박물관에도 35세에 그렸다는 군선도 병풍이 있는데, 지금은 각각 떼어져서 족자로 전한다고 한다. 매폭마다 강세황이 감상평을 남긴 것이 보인다. 도판을 구하지 못해서 인터넷 상의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색이 엉망이긴 하지만 꽉 짜여진 구도 속에서 각각 개성있는 신선들의 모습이 유려한 필치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 신선 같았던 단원 김홍도의 신선들
군선도에 나오는 신선들 소개
최석조가 쓴 『단원의 그림책』내용을 인용 확대하여 소개합니다.
여기에는 19명의 신선이 등장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은 잘 알아도 우리의 신인 신선에 관해서는 잘 모를 겁니다.
여기 나오는 신(선)들이 바로 제우스, 헤라클레스처럼 동양에서 가장 유명한 신선들입니다.
이들은 지금 신선들의 여왕 서왕모(헤라쯤 될까요?) 생일 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중입니다.
옛날 그림은 서양화와는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보는 것이 관례이지요. 글씨도 그렇게 썼으니까요.
첫번째는 호리병을 들고 쳐다보는 신선은 이철괴입니다.
이철괴는 헤파이스토스처럼 절름발이입니다. 스승인 노자와 함께 자기 몸을 두고 혼만 여행을 했는데 돌아와 보니 누가 그 몸을 태워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죽은 거지의 몸으로 들어갔는데 그 거지가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래서 이철괴도 그렇게 되었지요. 우리 옛 그림에서 호리병을 든 사람들은 거의 신선으로 봐야합니다.
그 앞의 대머리는 여동빈입니다.
항상 칼을 차고 다니면서 요괴들을 물리쳤지요. 서양의 헤라클레스 같다고나 할까요.
붓을 들고 두루마리에 뭔가 쓰려는 신선은 ‘문창’입니다. 과거 시험을 관장하는 신선이지요.
그 옆에 두건을 쓴 건 종리권입니다. 그 유명한 팔선의 우두머리였지요.
신선이 되기 전에는 용맹한 장군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떤 노인을 만나 신선이 되었지요.
종리권은 키가 크고 얼굴도 잘 생겼습니다. 서양의 아킬레스와 같지요.
바로 앞에 복숭아를 든 신선은 삼천갑자 동방삭, 너무나도 유명하지요.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고 무려 3천 갑자 그러니까 6만년을 살았지요.
그 앞에 외뿔소를 탄 신선은 노자입니다. 신선들의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인간 세상을 벗어날 때 소를 타고 갔다고 이렇게 그렸습니다. 들고 있는 책은 그가 쓴 《도덕경》입니다.
가운데 딱따기 즉 박을 들고 있는 신선은 ‘조국구’입니다. 이 박을 치면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바로 뒤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신선은 ‘한상자’입니다.
한상자는 제 맘대로 꽃을 피우기도 했고 술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그 술을 마신 사람은 병이 다 나았다나요.
그 앞에 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을 읽는 신선은 장과로입니다.
장과로는 흰 나귀를 탔는데 돌아다니다가 쉴 때는 종이처럼 접어서 보관했다고 합니다. 등 뒤에는 박쥐가 보입니다.
장과로는 전생에 박쥐였기에 옛 그림에서 박쥐와 함께 있는 사람은 장과로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맨 앞에 복숭아를 든 여인은 ‘하선고’입니다.
하선고는 팔선 중에서 유일한 여자입니다. 여동빈을 만나 복숭아를 얻어먹은 후 신선이 되었지요.
그 뒤에 바구니를 멘 신선은 남채화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름 없는 어린 선선들이지요.
이 그림은 오른쪽에서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사람 수가 10명, 6명, 3명으로 점점 줄어들면서 마치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군선도는 신선을 단독으로 그리지 않고 신선의 무리를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불로장생 사상이나 현세에 복을 기원하는 사상과 밀착되어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군선도에 관한 기록과 유품들은 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
군선도는 여러 폭의 병풍으로 꾸며져 장수와 혼례 등의 축하 선물용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집안의 장식용이나 복을 기원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윤덕희(尹德熙)의 「군선경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金弘道)의 「군선도」(리움 소장), 작자미상의 「요지연도」와 「반도회도(蟠桃會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해상군선도」(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이 전하고 있다.

김홍도필 풍속도화첩 / 군선도 (群仙圖)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조선 초기 윤덕희(尹德熙, 1685-1776) 작, 18세기 견본수묵, 28.4 x 19.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노인(壽老人), 이철괴(李鐵拐), 조국구(曹國舅),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동방삭(東方朔), 유자선(柳子仙). 범상치 않은 능력의 소유자들이 출렁이는 물살을 가르며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시선이 머무는 높다란 절벽 위에는 수노인이 당당하게 앉아서 영험한 신선들을 지긋이 바라본다. 수노인 곁에는 웅크린 사슴과 수명의 길고 짧음을 기록한 장부 및 술잔이 함께 한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신비로운 바람에 나부끼는 신선의 도복. 길고 유려한 필선으로 구사된 예사롭지 않은 존재들. 윤덕희의 걸작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이다.

요지연도 (瑤池宴圖), 작자미상
서왕모와 목왕이 곤륜산 요지의 잔치에 참석한 장면과 초대받은 신선들이나 불보살이 도착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요지(瑤池)는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의 아름다운 연못으로 주나라 목왕이 찾아오자 서왕모가 요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요지연도에는 서왕모·목왕·신선 등이 중심 제재로 등장한다. 요지연도는 궁중 회화로 출발하여 길상적인 장식화로도 쓰였다.
현전하는 요지연도 대부분이 8첩 병풍으로 19세기 작품이다. 요지연도는 불로장생의 염원을 담아 이상적인 신선 세계를 구현하였다.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비단에 당채(唐彩)로 그려졌고,
현재 6폭이 있으나 화면(畵面) 구성상 원래 8폭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또는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는 서왕모(西王母)가 중국 곤륜산에 살고 있는 최고위직 여신으로 도교에서는 모든 신선들을 지배하는 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서왕모와 관련된 고사(故事)가 우리나라 문학 작품에 등장한 시기는 남북국시대 말기로 알려져 있다. 요지에서 주최하는 반도회(蟠桃會)에 반도는 삼 천년만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는 복숭아이다. 초대받아 약수(弱水)를 건너는 군선들을 표현한 그림이다. 군선도는 중국 원(元)·명(明) 때에 경수(慶壽)를 경수란, 임금의 탄생일을 축하한다는 의미이다. 주제로 한 일련의 희곡과 소설, 신선전(神仙傳)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 해상군선도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신선들의 행렬을 묘사한 것으로 다른 배경은 없고 파도와 구름만이 표현되거나 혹은 배경이 완전히 생략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지연도(瑤池宴圖) 또는 선경도(仙境圖)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 말기까지 제작되었다.


필자미상 일월오봉병·해반도도
'반도회도'(蟠桃會圖)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의 뒷면에 그려진 그림으로,
신선들이 먹는다는 복숭아(반도)와 함께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요소(학, 소나무, 대나무 등)를 담아낸
해학반도도 유형의 그림이며, 이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도교적 염원을 담은 병풍 형식의 궁중회화나 민간 장식화로,
국립중앙박물관은 물론 다른 미술관에도 유사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월오봉도 병풍. 개항기 19세기 말~20세기 초. 4폭 병풍, 비단에 채색. 병풍 세로: 248.0, 가로: 366.0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동시에 왕조가 영구히 지속되리라는 뜻을 나타내는 일월오봉도 병풍.

보존처리 전의 미국 데이턴미술관 소장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이 유물은 드문 금박 미술품이고, 병풍 전체 크기는 가로 734.4㎝, 세로 224.4㎝에 달해 규모가 병풍 중에서 가장 크다.
'대한제국 시기 궁중 병풍'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 보존처리 마치고 미국 돌아갈 우리 금박병풍 '해학반도도' 공개 2020.12.03)

보존처리 완료한 미국 데이턴미술관 소장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참고: 해외로 나간 왕실그림의 기막힌 사연 (해학반도도와 해상군선도)
규장각(奎章閣)은 1776년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즉위한 후 바로 설치한 기관으로 내각(內閣)으로도 불렸다.
정조는 선왕(先王)들의 어필(御筆), 어제(御製) 시문(詩文)을 봉안(奉安)하기 위한 전각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것이 규장각이다.
‘규장(奎章)’이라는 말은 임금의 어필과 어제, 즉 왕이 쓴 글씨와 글을 가리킨다. 규장각은 창덕궁(昌德宮)에서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영화당(暎花堂) 옆의 언덕에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역대 국왕의 어제, 어필을 보관하는 일뿐 아니라 규장각 소속의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각신(閣臣)들을 통해 국가가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었다. 즉, 규장각은 국가 경영을 위한 정책연구소이기도 했다.
〈규장각도(奎章閣圖)〉는 정조를 위하여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인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가 정성을 들여 규장각 주변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규장각도〉에 그려진 규장각 건물을 살펴보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32세였던 김홍도가 계화(界畵)에 매우 뛰어난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계화는 정교하게 건축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건축물의 묘사에는 자(계척(界尺))가 사용되었다.
화면 중앙에 2층 건물인 규장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1층이 규장각이고 2층이 주합루(宙合樓)이다.
김홍도는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여 응봉(鷹峯) 아래에 위치한 창덕궁 후원과 규장각의 모습을 웅장한 화면 속에 포착해냈다. 조선 후기 건축물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지붕은 청록색, 건물 기둥은 붉은색으로 그리는 것인데 이 그림에도 그대로 이 원칙이 지켜져 있다.
김홍도는 매우 가는 선으로 규장각의 문과 문살들을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로서도 〈규장각도〉는 응봉 아래의 울창한 수림(樹林), 규장각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연못 근처의 평화로운 정경 등이 잘 표현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월간우리문화웹진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 〈규장각도(奎章閣圖)〉, 1776년, 비단에 채색, 143.2×115.5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규장각도. 부분도
1776년 정조가 즉위하고, 즉시 규장각이 설치된다. 규장각은 대단한 기관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도서관이다. 당시 조선 땅에서 나온 모든 서책과 자료들을 보관하고 정리하여, 논쟁하고 전국적인 담론을 이끌어가는 기관이었다. 정조 대왕은 규장각을 정치와 학문의 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규장각이 완성되자, 규장각과 그 주변의 모습을 김홍도를 시켜 그리게 한다. 정조의 나이 25이었고 김홍도의 나이 32이었다. 이 그림은 정조의 일대 개혁의지를 표명하는 그림이기도 하고 김홍도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 개혁의 선봉에 회화부분에 있어서는 김홍도를 세운것이다.
현재 창덕궁의 비원에 있는 주합루건물이다. 그림의 창덕궁 뒷산은 응봉이다.
정조 시대에는 1층을 규장각, 2층을 주합루로 썼지만 지금 규장각은 서울대학교로 옮겨진 상태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宙合樓)는 정조 즉위년(1776)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이다.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가 있는데 이 중에서 북쪽에 주합루가 위치하고 있다. 주합루 주변은 3단의 화계(花階)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魚水門)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 옆 작은 문(협문)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김홍도의 서른네 살 때 작품으로 화면에 제작연도 및 강세황의 화평, 그리고 한 세트(8폭)를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회화사적 의의가 자못 큰 그림이다. 김홍도가 34세 때(1778년, 정조 2), 강희언(姜熙彦, 1738~1782년경)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린 것으로, 바로 이 해에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등을 남기는 등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屛)란 선비가 세속을 유람하면서 풍류객의 눈에 비친 양반, 서민들의 세태 풍속을 담은 일종의 풍속화로 주인공은 대개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로 등장한다. 모두 8폭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폭의 위쪽에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이례적으로 그림마다 익살스런 그림평을 달아 놓았다.
산수인물화 형식의 이 그림은 대장간, 강변, 벼타작 장면등 다양한 세상살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각 세로 90.9cm, 가로 42.7cm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행려풍속도 行旅風俗圖, 그림 김홍도 金弘道 / 글 강세황 姜世晃. 조선 1778년, 비단에 엷은 색.
표암과 단원은 호랑이 그림을 합작해 그리는 등 신분을 초월한 스승과 동료의 인연으로 30년 이상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노년에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단원을 ‘그림의 모든 분야에서 묘품을 보인 신필’로 격찬했던 표암은 “단원과 관청에서 아침 저녁으로 같이 거처했으며 나중에는 예술계에서 나이를 잊고 지내는 벗이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강세황은「단원기우일본(檀園記又一本)」에서 김홍도가 조선 400년 만에 파천황(破天荒)적 솜씨라 극찬하고 풍속에 크게 뛰어남을 언급하며 구체적으로 그가 즐겨 그린 길거리ㆍ나룻터ㆍ가게ㆍ놀이등 구체적인 내용까지 밝히고 있다. 이는 강세황 자신의 풍속화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데, 김홍도가 풍속화에만 뛰어난 것이 아님을 이에 앞서「단원기(檀園記)」에서 고금의 화가들이 한 가지만을 잘하고 여러 가지를 다 잘 하지는 못하나 김홍도만은 모든 분야에 능함(妙品)을 천명하고 있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기는《단원풍속도첩》이나, 화면에 제작연도 및 강세황의 화평 그리고 한 세트를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회화사적 의의가 자못 큰 그림이 바로 <행려풍속도>이다. 김홍도가 34세 때는《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등을 남기는 등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낱장씩 전해온 것으로 최근 병풍으로 하였는데 순서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겠다. 매 폭마다 강세황이 그림의 내용을 간파한 화평이 있어 감상에 도움을 준다. <취중송사(醉中訟事)>는 <평생도>에서도 엿볼 수 있는 구도이며, 대장간ㆍ타작ㆍ노상과안 등《풍속도첩》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울러 이 그림에 등장된 소재들은 여러 풍속화 병풍에 있어 견본격적인 내용이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상사를 따뜻한 시각으로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김홍도의 천재성이 빛난다 하겠다.
출처: 박물관 이야기 -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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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염파행 賣鹽婆行> ‘밤게.새우.소금으로 광주리와 항아리에 그득 채워 포구에서 새벽에 출발한다. 해오라기 놀라서 날고 한 번 펼쳐보니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듯하다.’ 시골 아낙네들이 아이를 업고 생선을 머리에 이고서 시장에 가는 모습이 그 삶의 질퍽함까지 그려지며 정겹다. 김홍도 그림의 최고의 예술적 가치는 이런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그림은 사람의 온기와 정이 흐른다.
<진두대주 津頭待舟> '백사장 머리에 나귀를 세워 놓고 사공을 부르네, 나그네 두세 사람 같이 서서 기다리는 강가의 풍경이 눈앞에 완연하다.'
<노변치려 路邊治鑢> '논에서 해오라기 날고 높은 버드나무에 시원한 바람불고 풀무간에서 쇠를 두드리고, 나그네는 밥을 사먹는데 시골주막의 쓸쓸한 관경이나 오히려 한가로운 맛이 드네.'
<취중송사 醉中訟事> ‘물품을 공급하는 이들이 각기 자기 물건을 들고 가마의 앞뒤에 있으니 태수의 행색은 초라하지 않다. 시골사람이 나서서 진정을 올리고 형리가 판결문을 쓰는데 술 취한 가운데 부르고 쓰는데 오판이나 없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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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안흥취 破鞍興趣> ‘해진 안장에 비루먹은 말 타고 가는 나그네 행색이 심히 초라하건만 무슨 흥취가 있다고 목화 따는 시골 아낙네를 쳐다보는고?’
<노상풍정 路上風情> '소 등에 올라탄 시골 노파를 나그네가 말고삐를 느슨히 하고 응시하는가. 순간적인 광경이 웃음을 자아내네.'
<타도락취 打稻樂趣> '벼타작 소리 들리는데 탁주는 항아리에 그득, 수확을 지켜보는 이 또한 재미있어 보이네.'
<과교경객 過橋驚客> '다리 아래 물새는 당나귀 발굽소리에 놀라고 당나귀는 날으는 물새에 놀라네. 사람은 당나귀가 놀라는 것을 보고 놀라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 입신의 경지에 들어갔다.'

<취중송사(醉中訟事)> 1778년 작. 비단 바탕에 담채. 세로 90.9㎝, 가로 42.7㎝. 국립중앙박물관.


<취중송사(醉中訟事)>는 <평생도>에서도 엿볼 수 있는 구도이며, 대장간ㆍ타작ㆍ노상과안 등 《풍속도첩》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울러 이 그림에 등장된 소재들은 여러 풍속화 병풍에 있어 견본격적인 내용이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상사를 따뜻한 시각으로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김홍도의 천재성이 빛난다 하겠다.
구도는 근경·중경·원경을 갖춘 평원법으로 이루어졌고, 인물들은 가늘고 균일한 필선으로 묘사되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가운데 초기작에 해당되며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양식적 특징과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김홍도가 바라본 세상》2021. 7. 26. ~ 11. 28.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서화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가 바라본 조선은 어떠했을까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는 나그네가 유람하면서 보았던 세상살이를 그린 8폭의 그림입니다. 날씨 좋은 어느 날,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난 선비는 거리에서 판결을 하는 태수 행렬, 대장간의 대장장이, 논밭에서 일하는 남녀노소를 만나고, 때로는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김홍도의 탁월한 묘사와 재치에 감탄하며 각 폭마다 평을 적었습니다.
참고 : 김홍도의 풍속도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서원西園의 운치있는 그림) Elegant Gathering in the Western Garden
중국 북송대 영종(英宗)의 부마였던 왕선(王詵)이 수도 개봉(開封)주에 있던 자기 집 정원, 즉 서원(西園)에서 당시의 유명한 문인묵객들을 초청하여 베풀었던 아회(雅會)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왕선을 비롯해 소식(蘇軾), 채조(蔡肇), 이지의(李之儀), 소철(蘇轍), 황정견(黃庭堅), 이공린(李公麟), 조보지(晁補之), 장뢰(張耒), 정가회(鄭嘉會), 진관(秦觀), 진경원(陳景元), 미불(米芾), 왕흠신(王欽臣), 원통대사(圓通大師), 유경(劉涇) 등의 16인(진사도(陳師道)를 넣어 17인이 되기도 함)이 모여 시를 읊고 휘호를 하고 현금(玄琴)을 타고 담론을 즐기거나 석벽(石壁)에 제시(題詩)를 적고 있다.
당시의 아취 넘치는 광경을 모임에 참석했던 이공린(李公麟)이 그리고, 미불(米芾)이 찬문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공린의 그림은 전하지 않고 미불의 찬문만이 법첩(法帖)으로 전해 온다. 그러나 실제로 ‘서원아집’은 행해진 바 없고 문인 취향의 풍류적인 모임을 이상화하여 그렸던 일종의 상상화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남송대 이후 널리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화면 형식은 두루마리나 병풍으로 많이 그려졌다. 석상(石床)을 중심으로 휘호하는 일련의 인물들을 축으로 그 뒤에 병풍을 치고 탁상에서 서화를 완성하는 장면, 암벽 앞에 서서 동자를 데리고 시를 새기는 광경, 담소하며 현금을 타는 정경, 그리고 석교(石橋) 건너편 대나무 숲에서 한담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주변에 소나무와 버드나무, 파초, 매화나무, 학, 사슴 등을 배치하여 운치를 높이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미국 넬슨(Nelson)미술관에 소장된 남송 화가 마원(馬遠)의 「서원아집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이 그림이 마원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장자(張鎡)의 정원을 그린 「춘유부시도(春遊賦詩圖)」로 새롭게 밝혀졌다. 이 밖에 명대 구영(仇英)의 「서원아집도」가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많이 그려졌으며,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서원아집도」6폭병풍과 개인 소장의 8폭병풍, 그리고 선면화(扇面畵)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김홍도, 〈서원아집도〉 6폭병풍, 1778년, 종이에 수묵담채, 122.7×287.4㎝,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는 미불의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를 참고하면서도 중국의 서원아집도와는 다르게 화면을 구성하였다. 암벽에 시를 새기는 미불(제3폭), 병풍을 치고 탁상에서 글을 쓰는 소동파(제4폭), 〈귀거래도〉를 그리는 이공린(제5폭), 비파를 연주하는 진벽허(제6폭), 설법을 하는 원통대사(제6폭) 등의 모습이 보인다. (참고: 서원아집에서 단원아집으로 - 김홍도와 떠나는 그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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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우리 옛 그림 - 김홍도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설명이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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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의 왕진경(王晋卿)이 서원(西園)에서 선비, 도사, 스님 등과 더불어 아회(雅會)를 갖은 서원아집(西園雅集)은 고사인물의 한 주제로 즐겨 그려졌다.
조선시대 이 주제의 그림은 18세기 이 후 것들이 유존되고 있는데 김홍도의 경우 알려진 것만도 <선면서원아집도>를 비롯해, 8폭병으로 된 것 등 3점에 이른다. 선면 서원아집도에는 강세황이 등장인물 모두를 열거하고 있다.
시종드는 인물 10명을 포함하여 모두 26명이 등장되는 이 <서원아집도>는 강세황의 화평에서 중국의 이공린이 이 주제의 그림으로선 첫째이나 김홍도가 그와 우열을 다루기 힘들며 오히려 더 훌륭하며,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강세황의 화평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전에 본 아집도(雅集圖)가 수십점에 이르는데 그 중에 구영(仇英1509~1559字 十洲)이 그린 것이 첫째이고 그외 변변치 않은 것들은 지적할 가치가 없다. 지금 김홍도의 이 그림을 보니 필세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배치가 적당하며 인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미불(米 1051~1107 字 元章)이 벽에 글씨를 쓰고, 이공린(李公麟 1054~1105 字 伯時)이 그림을 그리고 소식(蘇軾 1036~1101)이 글씨 쓰는 것 등에 있어 그 참된 정신을 살려 그 인물과 더불어 서로 들어 맞으니 이는 선천적으로 깨친 것이거나 하늘이 가르쳐 준 것이다.
구영의 섬약한 필치에 비교하면 이 그림이 훨씬 좋다. 이공린의 원본과 우열을 다툴 정도이다. 우리 나라 지금 이러한 신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그림은 원본에 떨어지지 않으나 내 글씨가 서툴러 미불에 비교할 수 없으니 훌륭한 그림을 더럽힐까 부끄럽다. 보는 사람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1778년 설날 표암이 제하다.
김홍도金弘道의 (선면서원아집도扇面西園雅集圖)

김홍도 '서원아집도', 선면(부채 위에 그린 그림), 18세기후반, 지본담채, 27.6X80.3cm, 국립중앙박물관
이 부채그림은 김홍도가 역관인 이민식에게 그려 준 것이다. 이민식은 그림을 좋아한 수장가로 김홍도가 '신선도 8폭 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그려주었던 대단한 재력가였다. "여름 생색은 부채요, 겨울 생색에는 달력이라"는 향중생색(鄕中生色)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는 말이 있었다.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는 부채 선물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22줄로 빽빽하게 쓴 화제는 김홍도의 스승 표암 강세황이 썼다. 내용은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로 북송 영종의 부마인 왕선이 주최한 서원의 아취 있는 모임을 서술한 것이다. (출처: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김홍도 작 '서원아집도')
<서원아집도기>에 의해 왕선의 원림에 모인 16명의 문사들을 다음의 다섯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왕선·체조·이지의 및 소철이 소식이 붓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음. ② 이공린이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그림으로 그리는 장면을 황정견·조보지·장뢰·정정로가 옆에서 보고 있음. ③ 진관이 노송나무 아래 앉아서 도사 진경원이 월금(月琴) 타는 것을 듣고 있음. ④ 왕흠신이 미불이 암벽에 제(題)하는 것을 머리를 들어 보고 있음. ⑤ 유경이 원통대사의 무생론(無生論)에 대한 고담(高談)을 귀 기울여 듣고 있음. (출처: 조선 김홍도의 선면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참고: 춘야연도리원과 서원아집
구영(仇英1509~1559字 十洲)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전 구영(傳 仇英)_ 서원에서의 아취 넘치는 모임(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중국 명나라. 비단, 세로 115.6cm, 가로 59.4cm. 타이페이고궁박물관 소장품번호 동원 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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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 아래에 ″구영제(仇英製)″라는 관서(款署)가 있으며 위의 별지(別紙)에는 동기창(董其昌, 1555-1637)과 진계유(陳繼儒, 1558-1639)의 제발(題跋: 책이나 그림에 그 유래나 펴내는 뜻, 감상, 비평 등을 적은 글)과 낙관(落款)이 있어 구영(仇英)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구영은 장쑤 성(江蘇省) 타이창(太倉) 출신으로 처음에는 칠공(漆工)이었으나 그림에 뜻을 두어 주신(周臣, 약 1450-1536)에게 배우고 다시 역대 명가들의 화법으로 배우는 한편 남북종 양파의 화법을 종합하여 명사대가(明四大家)의 하나로 꼽힐 만큼 뛰어난 그림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는 고화(古畵)의 모사에 뛰어났으며 특히 인물사녀화(人物仕女畵)와 계화(界畵), 청록산수화에 뛰어나 정교하고 치밀하며 농염(濃艷)한 인물화는 명대(明代) 제일로 일컬어진다.
이 그림은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로 옛 부터 고사 인물의 한 화제(畵題)로 자주 그려졌다. ′서원아집′이란 송나라 때 학자 왕진경(王晋卿)이 서원의 동산에서 친구인 소동파(蘇東坡)를 비롯하여 당시 명성 높은 유학자, 승려, 도사들을 초대한 모임을 말하는데, 이 모임에 참가했던 화가 이공린(李公麟)이 이를 그린 그림을 <서원아집도>라 하였다. 이후 여러 화가들에 의해 즐겨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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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 趙孟頫 西園雅集圖 명대로 추정, 대만 고궁박물관
김홍도가 그린 서원아집도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아집의 충실한 모델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화하고 한국화하는, 한국적인 아집도를 창출했다. 아마 중국 명나라의 서원아집도를 모델로 삼아 그렸을 것이다. 원나라 조맹부의 작품으로 전하지만 명대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서원아집도>(대만 고궁박물원)과 비교해 보면, 전체 구성은 다르지만, 장면 하나하나의 모습은 서로 닮았다. 김홍도가 조선에 전래된 명나라의 서원아집도, 특히 구영의 작품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채색을 수묵담채로 격조를 높이고, 명료한 대각선 구도로 명로하게 배치하며, 훤칠하고 격조있는 인물로 묘사하고, 여기에 시종의 해학적인 장면까지 곁들여서 김홍도의 체취가 물씬물신 풍기는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이 작품에 대해 그의 스승 강세황은 극찬에 극찬을 더했다. 그가 수십 본의 아집도를 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명나라 구영이 그린 그림인데, 이보다 뛰어난 것이 김홍도의 서원아집도이고 원작인 이공린의 작품 정도와 우열을 다툴 정도의 수준이라는 평가다. "김홍도의 이 그림을 보니 필세가 빼어나고 고상하며 포치가 적당함을 얻었으며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라는 정도의 평가는 약관이고, 더 나아가 "이것은 정신으로 갚이 깨달은 것이거나 하늘이 주신 재능"이라고 했으니 더 이상의 어떤 찬사가 가능하겠는가? (출처: 서원아집에서 단원아집으로 김홍도와 떠나는 그림여행)
작자미상,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작자미상,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Gathering of Xiyuan, 비단에 채색 Color on Silk, 97×331cm
발문에 서원아집기(西園雅集記)가 설명이 되어 있다 (출처: 빛과 이미지 - 서원아집도)
貢院春曉圖 -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
이 작품은 단원 김홍도의 전성기인 30대 때 그린 작품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당시 과거제도의 폐해를 풍자하며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공원춘효도'는 과거시험장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산(일산)들을 회화적이고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드라마틱 하게 담은 작품으로 작품에 대한 해설을 들어보시면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 많습니다.
'공원춘효도'는 6.25전쟁 당시 부산에 주둔하던 미군이 구매를 해서 미국으로 넘어가 골동품가게와 경매장을 돌다가 2001년 패트릭패터슨이 경매장에서 이 작품을 구매하게 되었고 작품에 대한 보증을 위해 정병모 교수에게 연락이 가게 되어서 이 작품의 존재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정병모 교수는 '공원춘효도'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기에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당시 주인이었던 패트릭 패터슨이 높은 가격을 제시해서 환수하지 못하고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작년(2020년) 사랑의 종신기부 운동 본부에서 주최하는 강연에서 이 작품이 소개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안산시와 서울옥션을 통해 작품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네요. (출처: 단원 김홍도 '공원춘효도' 다시 안산으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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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의 소과응시

김홍도(1745-1806?), '단원도(檀園圖)', 1784년(40세), 종이에 담채, 135×78.5㎝, 개인 소장
고해상도 사진 : 이미지 공유마당 (2,639 x 4,598)
'단원도'는 김홍도가 자신의 집 단원을 그린 그림이다. 단원을 스승 강세황은 아름다운 화초가 있는 깨끗한 뜰에 정결한 화실이 있는 집이라고 했다.
김홍도가 살았던 단원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을 보면 한양도성의 성벽이 있는 골짜기 바로 아래였다. 막돌을 쌓은 돌담에 문은 사립문이고, 초가지붕 처마에는 솔가지로 햇빛과 비바람을 가린 송붕(松棚)을 달아냈다.
이 집을 둘러싼 식물이 범상치 않다. 문밖에는 늘어진 버드나무가, 담장 안으로는 키 큰 파초가, 마루 옆에는 우뚝한 벽오동이, 네모난 못에는 수련이, 못가에는 괴석과 어우러진 관음죽이 있다. 괴석 옆에는 장대를 세워 소나무의 휘어진 가지를 받쳤다. 마당에는 한 마리 학이 노닌다.
"그 때의 광경을 그렸다"고 한 이 그림에 과장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김홍도의 자기 서사가 드러난 작품이지만 즐거웠던 옛 일을 회상하며 그 자리를 함께 했던 지인에게 그려준 그림이기 때문이다.
1784년(정조 8) 김홍도가 찰방으로 부임해 있던 경상도 안기로 창해 정란이 찾아왔다. 김홍도는 3년 전 서울의 단원에서 담졸 강희언과 함께 셋이 나이를 잊고 음악과 술과 담소로 마음이 통했던 그 때를 회상하며 정란에게 이 그림을 그려줬다. 당시 김홍도는 37세, 강희언은 44세, 정란은 57세였다. 그 사이 강희언은 이미 옛사람이 됐다. 그림 위쪽에 정란의 시와 이 사실을 기록한 김홍도의 제화가 있다.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강희언은 부채질하고, 정란은 무릎을 치며 장단을 맞춘다. 활짝 열린 김홍도의 방 안에는 당비파가 걸려 있고, 책이 쌓여있으며, 공작 꼬리 깃이 꽂혀 있는 화병이 있다. 정란의 제화시 중 한 수는 이렇다.
단원거사호풍의(檀園居士好風儀)/ 단원거사는 풍채와 몸가짐이 훌륭하고
담졸기인위차기(澹拙其人偉且奇)/ 담졸 그 사람은 장대하고 기이했네
수교백수산남객(誰敎白首山南客)/ 누가 백발이 된 영남의 나그네로 하여금
박주충금작허치(拍酒衝琴作許癡)/ 술잔 부딪치고 거문고 두드리는 바보가 되게 했나
창해옹(滄海翁) 작(作)/ 창해옹(정란) 짓다
'단원도'는 화가가 자신의 집을 자세히 그린 드문 그림이다. 돌담을 두르고 초가를 얹은 조촐한 집이지만 격조와 운치가 넘치는 단원의 정경이 이 집의 주인 김홍도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 그림의 서명은 '단원주인(檀園主人) 김사능(金士能) 화(畵)'다. 단원은 김홍도의 집이자 호다. 집이 곧 그 집에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출처 :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99> 김홍도의 집 단원

어쩐지 단원 옆에서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있는 정란과 부채를 들고 기대어 있는 강희언과는 대조적으로 꼿꼿한 자세로 거문고를 타고 있는 단정한 김홍도의 모습은 그 비범함을 더 해주는 듯 합니다.
자화상은 아니지만, 여기 한점의 산수화 속에서 멀리서나마 단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래 발문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단원 자신이 쓴 내용입니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그림이야기 - 김홍도의 <단원도>

창해(정란) 선생께서 북으로 백두산에 올라 변경까지 다다랐다가
동편 금강산으로부터 누추한 단원(김홍도의 집)으로 나를 찾아주셨으니,
때는 신축년(1781)청화절(4월1일)이었다.
들의 나무엔 햇볕이 다스하고 바야흐로 만물이 화창한 봄날에 나는 거문고를 타고,
담졸 강희언은 술잔을 권하고, 선생께서는 모임의 어른이 되시니
이렇게 해서 참되고 질박한 술자리를 가졌도다.
어언간에 해가 다섯 차례나 바뀌어 강희언은 지금 세상에 없는 옛사람이 되어
가을 측백떨기에는 이미 열매가 열렸다.
나는 궁색하여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산남에 머물러 역마를 맡은 관청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해가 장차 한 차례 돌아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홀연히 선생을 만나게 되니
수염, 눈썹, 머리칼 사이에는 구름 같은 흰 기운이 모였으되 그 정력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올 봄에는 장차 제주도의 한라산을 향하리라 하니 참으로 장하신 일이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원없이 이야기하기를 단원에서 예전에 놀던 것처럼 하였더니,
슬픈 느낌이 그 뒤를 따르는 지라,
끝으로 <단원도> 한폭을 그려 선생에게 드린다.
그림은 그 당시의 광경이고 윗면의 시 두 절구는 당일 선생계서 읊으신 것이다.
갑진년(1784)12월 입춘 2일 후에 단원 주인 사능 김홍도가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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