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김소월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관은 공주(公州)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본명보다 소월(素月, 흰 달)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서양적인 시가 아닌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서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불린다.
그의 시를 보고 김소월을 현실에 대해 무감각한 예술가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1977년 발견된 그의 미발표 창작노트를 보면 가장으로서의 고된 삶에 대한 고뇌와 일제 치하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적은 글이 보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짧은 활동기간으로 인해 현실을 비판하는 성격의 시를 발표할 여건이 안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들로 대표되는 전성기 시절 후 발표하는 시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는 '집'과 '돈'이며 말년에는 시 쓰기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취미활동으로 여겼다고 한다. (특히 소월은 자신의 아버지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실질적인 가장의 의무를 하지 못한것을 본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말년에 집안의 가장으로써 돈을 못 벌어오는 자신의 모습에 굉장히 우울해했다고 한다.)
한국인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뜻으로도 보이니 이쯤이면 필수상식이다. 전 국민 애송시 1위 진달래꽃,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은 현재는 북한 지역이라 분단 이래 남한(대한민국)에서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을 뿐더러 오늘날엔 다른 의미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2. 삶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6]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철도일을 하던 일본인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PTSD에 시달리며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여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 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한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온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은 남산보통학교를 입학,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학교(現 서울시 용산구 오산중학교&오산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김억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자비로 출판시켜 주기도 했고 소월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을 치뤄준 인물이다. 평소 소월은 김억을 존경했으며, 소월의 유고 詩인 삼수갑산(三水甲山) 또한 김억이 먼저 발표한 동명의 시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적은 詩이다. 다만, 1977년 발견된 김소월의 유고에 김억이 발표한 시와 같은 시가 담겨져 있어서 김억이 김소월의 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의혹이 있다. - 참고: 김억과 김소월의 〈못 잊어〉)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를 하게된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게 된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하고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 대지진과 일본에 의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귀국한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 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상경학교에 입학시킨 것이었기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에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벙어리 삼룡이의 작가)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망하고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소월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곤 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아편 과다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3. 대표작
진달래 꽃
1922년 원문 표기 | 현대 표기 | 해 석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ᄯᅢ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藥山 진달내ᄭᅩᆺ 아름ᄯᅡ다 가실길에 ᄲᅮ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ᄭᅩᆺ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ᄯᅢ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이어령의 해석에 따르면 시 전체는 미래시제에 가까운 가정법으로 쓰였다. 즉, 시의 화자는 (흔히 알고 있듯) 현재 님과 이별한 상태가 아니라, 미래에 님과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 또한 진달래꽃을 가시는 길에 뿌린다는 3연의 의미가 님이 화자에게 이별을 말하고 돌아서는 길에도 손수 진달래꽃을 뿌려놓아 님을 축복한다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따르면 '미래에 님이 화자에게 이별을 말하고 걸음을 옮기면 마치 님이 화자의 피를 밟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내용이며, 마지막 4연 역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라고 쓰여 있지만 이것은 반어법이고 사실 눈물을 많이 흘리겠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
김소월(1925), 《진달내꽃》, 1925년 12월26일 매문사(賣文社)에서 발간
시의 제목은 시집 내에서는 '진달내ᄭᅩᆺ'인데 시집 전체 표지는 '진달내꽃'으로 되어있다. 시를 썼던 1922년과 이를 편찬해서 책으로 만들던 1925년 사이에 저자의 표기 의식이 약간 달라졌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어문 정책상의 변화는 아니다. 책 제목의 표기 변화와는 무관하게 1925년 시집에서도 詩 내의 표기는 '진달내ᄭᅩᆺ'으로 되어있다. (나무위키)
《진달래꽃》은 1925년 발간된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에 들어있는 서정시이다. 이별의 슬픔을 한국 고유의 정서로 드러낸 수미상관 형태로 이뤄진 이 시는 4연 12행으로 이루어졌고 7·5조의 음수율과 3음보 민요조의 전통적 리듬을 지니고 있다. 《진달래꽃》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꼽히기도 하였다.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 25호에 발표되었다. (위키백과)
김소월의 아버지 김성도는 1904년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이상이 되었다. 때문에 소월은 할아버지 김상주의 훈도(訓導)와 어머니 장경숙의 지극한 사랑, 숙모 계희영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주변 어른들의 이러한 관심은 소월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짐이 되기도 하였다. 소월의 숙모 계희영은 기억력이 비상하여 심청전, 춘향전과 같은 이야기를 어린 소월에게 들려주었고, 이것은 소월이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큰 동기가 되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소월에게 원천적인 한(恨)으로서 작용하였다. 소월은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14세의 어린 나이에 홍단실과 결혼하였다. 그는 조혼에 대해 탐탁히 여기지 않았으나 유교적 가풍 속에서 자란 영향으로 성실한 지아비로 살고자 하였다. 소월은 유교적 이상자인 할아버지, 현실적이나 일자 무식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도덕적으로 책임지기 버거운 아내와 같은 현실적 문제로 괴로워하였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가 소월의 시 쓰기에서 한의 정서로 표출되었다. (위키백과)
초간본 중 '중앙본'(중앙서림) 표지에 그림 없이 ‘진달내’이란 제목과 시집의 발간 연도(1925)가 적혀있다. |
초간본 중 '한성본'(한성도서주식회사) 표지에는 꽃·수석 등의 판화그림이 찍혀 있다. |
-.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둘 다 초간본 맞나 (중앙일보 2010.10.07)
그런 『진달래꽃』 초간본을 둘러싸고 진위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재청이 등록 예고한 초간본은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이하 ‘한성본’)과 ‘중앙서림’ 총판본(이하 ‘중앙본’) 두 종.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배민성 사무관은 “여러 가능성을 검토했으나 결국 객관적인 판권 정보(1925년)를 기준으로 판단해 두 종을 동시에 등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문학·서지학 전문가들은 제목의 표기법, 판형과 지질 등이 다른 두 종류의 책을 동시에 출간된 초간본이라고 보는 건 문제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은 2종 아닌 3종(연합뉴스 2019-06-26)
-.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문화재됐다 (연합뉴스 2011-02-24)
-.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 1억3500만원…경매신기록 (중앙일보 2015.12.20)
-. '진품명품'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간본, 감정가 3억 원… (SportsQ 2017.03.19)
100년전 김소월 시인의 질문 - "제 詩는 사랑을 받고 있나요. 그때쯤은 독립을 했을런지요."
'소와다리' 출판사에서 2015년 김소월의 시집 복원판을 출시할때 [경성에서온 소포 패키지]라는 주제로 마케팅을 벌였다. |
출처: 꽃송이네 책방 / 알라딘: 경성에서 온 소포 패키지로 발송 됩니다!
1925년에 첫 출간된 <진달래꽃>은 김소월 사후에도 수많은 출판사들에 의해 꾸준히 출간되어 왔으나 국어 표기법이 정해지고 편집자들의 손을 거치며 최초 모습과는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다. 이 책은 여러 판본 중 정본으로 여겨지는 중앙서림 초판본을 내용과 표기는 물론 활자까지 그대로 복원한 책이다.
산유화(山有花)
산유화를 꽃 이름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꽃 이름은 없고 '산에 꽃이 있다' 라는 의미인 산유화(山有花)이다.
시를 읽어보면 단순히 꽃이 피고 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자연친화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비평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런거 없다. 시에서 보다시피 그냥 꽃이 아닌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꽃 이기 때문에 이를 시인의 고독한 운명을 발견케 하는 매개물이라고 한다. 더 확장시켜 인간이란 결국 다른 사람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져서 고독하게 살다가 죽는 존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시에서 새는 화자를 상징하는 시어이기도 한다. (나무위키)
1924년 원문 | 현대표기 | 해 석 |
山에는 ᄭᅩᆺ픠네 ᄭᅩᆺ치픠네 갈 봄 녀름업시 ᄭᅩᆺ치픠네 山에 山에 픠는ᄭᅩᆺ츤 저만치 혼자서 픠여잇네 山에서우는 적은새요 ᄭᅩᆺ치죠와 山에서 사노라네 山에는 ᄭᅩᆺ지네 ᄭᅩᆺ치지네 갈 봄 녀름업시 ᄭᅩᆺ치지네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1연 : 존재의 생성 2연 : 존재의 고독 3연 : 존재의 고독에 대한 긍정 4연 : 존재의 소멸 |
산유화(山有花)는 산에서 피고 지는 모든 꽃을 의미하며, 이 작품에서는 홀로 외롭게 피고 지는 비극적 존재로 형상화 되어 있다. 그리고 산은 이러한 존재의 생멸이 순환되는, 근원적 고독감을 발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작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꽃이 피고 지는 일상적 자연 현상에서 착안하여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시는 고독하게 태어나고 고독하게 살다가 고독하게 돌아간다는, 탄생과 소멸의 순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단순히 꽃이 피고 지는 내용만을 쓴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진리를 담고 있다. 특히 '저만치'에 의미가 많이 담겨 있다. 이 시에서 '꽃'이 존재라면 그 존재를 '저만치'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상과 너무 가까이 있어 빠져있을 땐 그 대상이 전부인 것 같고 너무 가까워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상대를 인식해야 비로소 진정 대상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또한 표현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현실에서 떨어져서 홀로 서 있는 꽃(소월), 고독을 이겨내야 하는 소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키백과) -. 김소월의 산유화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의 경우 |
《산유화》(山有花)는 1924년 10월 《영대》 3호에 발표된 김소월의 시 작품이다. 1925년 간행된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되어 있다. 총 4연 16행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김소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하며 움직이는 무상(無常)의 우주적 원리에 대한 동경을 보인다. 수미상관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시어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네’로 행을 종결하면서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수미상관(首尾相關)은 시의 처음과 끝에 같은 구절을 반복하여 배치하는 기법을 말한다. 운율이 중요시되는 시에서는 '반복에 의한 운율'을 형성하고 처음과 끝을 비슷하게 작성하여 작품에 안정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여운을 남게 하여 감동을 준다.)
김동리는 《문학과 인간》(1948)에서 이 시의 형식이 “기적적인 완벽성”을 갖추었으며 “조선의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한 개의 최상급의 해조를 보여주었다”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2연의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꽃’의 형상에 주목하여 ‘저만치’의 의미를 “인간과 청산과의 거리”, “인간의 자연 혹은 신에 대한 향수의 거리”라고 풀이한 바 있다. 또한 김종길은 이 시에 대해 “자연에의 초월이 거의 불가능해진 현대인의 좌절이 숭고한 가락으로 읊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위키백과)
소월의 시가 으레 그렇듯 운율에 맞춰 노래로 만들기 좋기 때문인지 여러 버전으로 곡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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