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Klimt, 1862.7.14 ~ 1918.2.6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빈 분리파 운동의 주요 회원이다.
대담한 주제와 현란한 색채, 그리고 혁신적인 화면 구성으로 세계의 이목을 끈 화가.
신예술파(Art Nouveau) 혹은 분리파(Secessionist) 화가로 불리우는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누드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거장, 시대를 초월한 에로티시즘의 전위화가.
여성을 통해서 시대정신을 표출하고자 했던 클림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황금빛 섬광으로 물들인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 황홀경의 그림으로 교접을 꿈꾼 화가다.
그가 새삼 주목받는 까닭은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에로티시즘의 화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클림트는 보수적인 이들에게 환영받는 화가로, 고대 고전기 미술을 모방하던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화풍으로 각광받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 그리고 작가 무질, 슈니츨러, 호프만스탈의 작품과 함께 상징의 몽환적 세계를 향한 문을 열던 세기말 빈의 분위기 속에서 그의 그림은 아르누보 양식의 우아함과 추상과 구상의 통합,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색채와 시공을 초월한 듯한 구성으로 바뀌게 된다.
비엔나 분리파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된다.
Belvedere Museum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박물관)
‘벨베데레’는 ‘아름다운 전망(Beautiful View)’이란 뜻의 이탈리아 말.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미술관은 상궁과 하궁으로 나눠져 있으며 1923년부터 국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클림트 컬렉션으로 클림트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순례코스로 떠올랐다.
■ KLIMT Museum / Wikimedia Commons
■ 황금빛 유혹 클림트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 화려한 바로크 궁전서 클림트의 황금빛 유혹에 빠지다 (광주일보)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이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 보기 ▷ 클림트 황금빛 비밀 )
일상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자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클림트.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습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합니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 [출처: 불여우아빠]
Adele Bloch-Bauer I (1907), which sold for a record $135 million in 2006, Neue Galerie, New York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화가.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작가. 일명 "황금의 화가"로도 불리우나 수박 겉핥기식 평가에 가깝다.
미술이 격동하던 19세기 말에 장식 회화가로 교육받았으나 곧 건축 장식회화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사실적인 회화에도 능하였으나 점점 더 평면적이지만 장식적이고 구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화풍 뿐만 아니라 대학 회화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문제작들에서 특유의 반항적/회의적 주제의식을 보여줘 큰 비난과 함께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빠르게 기존 회화 경향을 대체하였고, 클림트의 이후의 작가들은 더이상 클림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지만, 그 이전의 전통과도 다르면서 훗날의 미술과도 다른, 고립된 섬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작가.
Gustav Klimt in 1887(26세)
14살 때인 1876년에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이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받았다. 1883년에 졸업하고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지극히 전통적인 사실적 화풍을 보여주었다. 이후 초상화나 우의화 등 장식과 독립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게 된다.
19세기 말에 영국, 프랑스 등에서 벌어진 인상파와 같은 진보된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들을 접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 경향과 미술 협회의 보수성에 반발하게 된다. 이후 반 아카데미즘 운동을 하면서 1897년 빈 분리파(제체시온;Secession)를 결성하고 아르누보 미술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는 결별했던 동료인 마치와 함께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의 패널화를 의뢰받게 되는데, 그가 의뢰받은 부분은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이었다(마치는 '신학'을 의뢰받았다). 클림트가 그린 3점의 대학 회화는 화풍 역시 기존 건축물의 패널화와 달랐지만,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 때문에 관계자들을 격분시켰다. 마치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며(<철학>), 인간은 삶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고(<의학>),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법학>) 해석되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클림트의 학력을 문제삼으며 그에게 너무 벅찬 주제라는 비난이나, 빈 대학교의 교수진 87명이 <철학>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으며, 반대로 그 당시 교육부 장관이 클림트를 옹호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클림트 역시 분노하여 권총을 들고 대학 담당자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고...
결국 패널화는 대강당에 걸리지 못하고 있다가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이라 낙인찍혀 압류당했으며, 전쟁 중 소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 세 작품을 찍은 흑백사진은 아직 남아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독일에서 55세를 일기로 스페인 독감의 증상이 악화되어 뇌경색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후원했던 학생들 중에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거장들도 있는데, 이들의 작품과 클림트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 작품이었다. 클림트가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아델레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한 것으로, 아델레가 사망한 후 남편 이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나치에게 몰수당했고, 남편은 사망할 때 조카에게 그림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나치 때문에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조카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은 전후 그 그림을 소장한 오스트리아 정부에게서 반환받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소송을 걸었고,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의 노이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우먼 인 골드가 2015년 개봉하였다. 마리아 배역으로는 헬렌 미렌이 출연했다.
비엔나 국제공항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보지 못했다면 비엔나를 떠나지 말라'는 문구가 있다. 단 한 번도 외국으로 대여된 적이 없는 작품이니 비엔나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꼭 보도록 하자. 소장처는 벨베데레 미술관. [나무위키]
The Kiss <고화질 사진_7,376 x 7,401px>
■ 클림트의 일생과 작품세계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 클림트 황금빛 비밀 (한국디지털대학교 예술학과 권용준교수)
■ ‘벌거벗은 진실’을 찾아나섰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세계 (씨네21)
■ 클림트 예술의 배경 / 클림트의 삶 / 클림트 예술의 특징 / 클림트의 작품세계 (느낌있는 갤러리)
■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으로 둘러싸인 희망과 사랑 (사람으로 본 20세기 예술사)
■ 세기말의 환상과 욕망을 그린 화가(상) / (중) / (하) [뉴스투데이]
■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그는 누구인가 [불여우아빠]
▶ Густав Климт (Gustav Klimt 1862-1918) (417 работ) [고화질 사진]
오스트리아 출신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이자 빈 분리파의 창시자.
빈 외곽의 바움가르텐에서 금속 세공사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1862년 태어났다. 금속 세공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을 비롯해 많은 작품에 금이나 은을 사용했다.
1876년 빈의 응용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다양한 소재와 기법에 대해 연구했다.
1883년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함께 벽화를 주로 그리는 스튜디오를 개업해 왕궁이나 저택, 극장 등에 장식화를 그렸다.
1888년 아카데미 화풍으로 그린 빈 시립 극장 벽화는 세밀하고 섬세한 그림이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덕분에 황제에게 훈장을 받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일약 스타 작가로 발돋움한다.
1892년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후 그 충격으로 1895년까지 약 4년간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그 이후에는 예전과는 다른 상징주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1894년 빈 대학교로부터 새로 짓는 대강당에 철학, 의학, 법학을 주제로 한 세 점의 천장 장식화를 의뢰받고 5년여의 구상 끝에 시안을 제출했다. 학교 측은 학문과 진리를 찬양하는 고전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기대했으나 클림트는 벌거벗은 인간들이 불안과 고통 속에서 떠도는 파격적인 시안을 제출했다. 이 시안은 의학계, 법조계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외설적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1898년경 빈 분리파의 창시자들과 함께
1897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기존 미술계에 반기를 들고 진보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를 창설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빈 분리파는 해외 미술계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시도하고, 전시 공간을 확보하여 진보적인 작가들에게도 전시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의 예술 운동이었다.
자국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던 〈철학〉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받았다. 클림트는 이 사건 이후 공공 기관의 의뢰를 받지 않았고, 기성세대들의 사고방식과 당국의 검열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빈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교수직을 세 번이나 제안 받았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까지 나서서 중재했음에도 끝내 수락하지 않았다.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요제프 호프만, 구스타프 말러 등이 참여하여 분리파의 정점을 보여 준 전시였다. 이때 클림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을 모티브로 한 〈베토벤 프리즈〉라는 벽화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클림트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선, 대담하고 자유로운 면, 화려한 색 패턴, 금박 등 새로운 소재 등을 모두 보여 주는 상징주의적 장식 미술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그 이후 분리파가 순수 예술을 옹호하는 파와 응용 예술을 옹호하는 파로 분열되면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자 1905년에 탈퇴했다. 이후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주로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의뢰받은 초상화를 그리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에밀리 플뢰게와 함께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작품의 모델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을 비롯해 사교계의 여인들, 작품의 모델 등 여러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을 정도였다. 그는 생전에 연인 중 한 사람이었던 마리아 짐머만이 낳은 두 아들만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했다.
클림트는 평생 동안 대중들과 주류 미술계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작품에는 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 유혹적인 눈빛을 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그림이 젊은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전시 중인 작품에 장막을 덮는 일도 자주 있었고, 지나친 성도착을 이유로 외설 시비에도 자주 휘말렸다.
성욕을 중시하는 그의 주장을 당시 사람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는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던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예술은 에곤 실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며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로티시즘에 영향을 주었다.
주인 떠난 작업실
1918년 1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다음 달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이후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1980년대 이후 〈키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등의 대표작들이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부각되면서 세계적인 인기 작가로 떠올랐다.
미완성 유작으로 <유람>,<신부>,<아담과 이브>를 남겼다.
■ [빈을만든 사람들] 구스타프 클림트 [박종호의 예술노트]
클림트는 에곤 쉴레와는 달리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으며, 글을 남기는 것에도 인색했다. 그런 그가 남긴 짧은 글이 하나 있다.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글을 쓰는 것에도 재주가 별로 없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나 내 작품에 관한 내용이라면 더 잘 할 수 없다. 아주 짧은 글을 써야 할 때조차 마치 배를 타기도 전에 배멀리를 걱정하는 사람과 같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을 절대 기대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나의 작품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를 말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오늘날의 14구역)에서 7월 14일 출생.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1834-1892)는 보헤미아 출신의 금 세공사였고, 어머니 안나 핀스터 클림트(1836-1915)는 빈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가수였다. 클림트는 그들의 일곱 자녀(3남4녀) 중 둘째였다.
1864년 클림트와 함께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될 동생 에른스트 탄생.
1867년 가족이 빈으로 이사. 구스타프는 이듬해 학교에 입학.
클림트 가족은 빈곤한 생활을 했으며, 1873년의 경제 공황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로 몰아넣었다.
1874년 8월 30일 에밀리 플뢰게 출생.
1876년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본 친척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산업 박물관 (현재의 오스트리아 응용미술 박물관)에서 새로 설립한 비엔나 미술공예학교(쿤스트게베르베슐레, 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1883년까지 수업한다.
동급생 프란츠 마치(1861-1942)와 일년 뒤 입학한 동생 에른스트(1864-1892)와 함께 2년간의 준비반을 거친 후 미술 학교로 옮겨가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1829-1881)와 빅토르 율리우스 베르거(1850-1902)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교회 창문 디자인,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미술 공예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1879년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는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에게 자신이 맡은 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도왔고,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1840 - 1884)의 지휘아래 황제와 황후의 은혼식 축하연 준비작업에도 참가하였다.
그린 계열의 차분한 색조로 정리 된 화면에서 한층 눈을 끄는 소녀의 파란색 눈동자와 빨강 입술, 그리고 가슴을 장식하고 있는 빛나는 흰색 목걸이가 인상적이다. 젊은 날의 소품이지만 이후 클림트의 그림을 특색 짓는 장식성을 느낄 수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
두 사람 모두 시선을 아래로 둔 소녀를 그렸지만 마츠는 소녀가 입고 있는 옷과 소녀가 앉아있는 의자의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인 반면, 클림트는 1896/97년 그가 자주 보여준 보다 여유롭고 흘러가는 듯한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
클라라 클림트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누이로 1862년 생인 클림트보다 2년 빠른 1860년에 태어나 1937년에 사망 (클림트는 1918년에 사망).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미혼으로 지냈으며 클림트의 또 다른 자매 헤르민과 평생 같이 살았다. 클림트는 본 작품 외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고 한다. |
Female Nude Study 작품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은 하단 코너에 보이는 의자에 올라 서 있다. 좌측으로는 천으로 덮인 대좌 위에 놓여진 조각상이 보인다. 당시 응용 미술 학교에서 누드 스터디를 위해 제공한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
Male Nude Study Facing Right 이 작품에서 클림트가 가장 집중적으로 작업한 부분은 모델의 근육으로서 해부학에 근거한 근육의 변화를 연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클림트는 이 남성 모델의 복근과 어깨 근육을 특별히 세심하게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
사보이 소년 Savoyard Boy 이런 아이들을 사보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적은 돈이라도 벌기 위해 종종 마멋이라는 동물을 데리고 큰 도시의 장터를 떠돌곤 했다. 당시 비엔나의 응용미술학교 학생들은 이런 사보이라고 불리던 아이들을 모델로 하여 자주 그렸었다. |
한스 마카르트의 초상, 1884
1880년 극장 건축가 펠너와 헬머로부터 최초의 주문을 받아 카를스바드의 온천장에 천장화를 그렸다.
Fable 우화1883.
클림트는 <우의와 상징>에서 11개의 주제를 의뢰 받았다. 어두컴컴한 숲그늘에는 한가로이 자는 사자, 그위에 흰쥐, 개구리를 입에 물고 있는 황새, 이것을 분해하는 여우 등 <이솝우화집>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묘사되었다. 클림트 초기의 작품으로 기술적으로는 능숙하지만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에는 아직까지 물들지 않은 작품이다. | Idylle (Idylls) 목가
자연을 모티프로 한 배경의 장식적인 패턴은 클림트가 존경하던 당대의 유명한 장식화가 한스 마카르트의 바로크 취미를 반영했다. 중앙 화면 양쪽에 앉아 있는 나체의 청년은 좌우대칭에 있으면서도 각각의 포즈는 대조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에 묘사된 청년상을 많이 닮아 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는 로마의 파르네제 궁에 있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천장화 영향을 받았다. | 신화의 한 장면 Mythological Scene 1884년 클림트가 속해 있던 ‘예술가 회사’는 리예카의 시립 극장 장식을 맡게 되었다. 클림트와 프란즈 마츠는 각각 세 개의 천장 벽화를 담당하였고 에른스트는 무대 앞 부분의 벽화를 맡았다. 본 작업에서 클림트는 처음으로 고전 문학을 주제로 작업하였고 그는 고전적인 건물 안에 있는 한 젊은 가족을 그렸다. |
1886년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에 새로 건설된 부르크 극장의 층계에 천장화를 그리는 최초의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1888년 이 부르크 극장 천장화들이 완성되었고 미술가 조합은 오스트리아 제국 왕실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클림트는 이 천장화에 고대의 유명한 극장이나 연극장면들을 그려 넣었다.
The Burgtheater Cycle of Paintings (1886 - 1888)
The Grand Staircases of the Vienna Burgtheater
In 1886 the members of the “Künstlercompagnie” (Artists’ Company), Gustav and Ernst Klimt as well as Franz Matsch, were commissioned to adorn the ceilings of the two grand staircases of the Vienna Burgtheater, newly built by Karl von Hasenauer, with depictions of the theater’s history. This first public commission represented a major step forward in the artist’s career and was crowned by the Golden Cross of Honor awarded by Emperor Franz Joseph I in 1888.
The cycle, which consists of ten paintings, comprises four works by Gustav Klimt: The Cart of Thespis, Shakespeare’s Globe Theatre, The Altar of Dionysus and Theatre in Taormina. The rendering Shakespeare’s Globe Theatre features the artist’s only known self-portrait. In 1990 the design drawings for the paintings were discovered in the attic of the Burgtheater. Following intensive restoration, they are now exhibited as part of a permanent presentation at the Burgtheater’s “Angelika Prokopp Foyer-Klimtraum”.
The State Staircase Volksgartenseite
Altogether there are ten autonomous paintings, one in each of the tympana that adorn the state staircases and five in each of the two wings. While the cycle of paintings in the right staircase represents the evolution of the theatre and three classical playwrights, the left-hand side focuses on the themes of music, dance, medieval mystery plays and the ex-tempore stage.
All the scenes depict actors together with their audiences. In keeping with the spirit of the times the artists strove for historical accuracy, which manifests itself in such details as clothing, etc. In the staircase on the right, starting from the entrance and with the painting in the tympanum, there is the "Altar of Dionysos", "Thespis' Cart" (both by Gustav Klimt), "Ancient Theatre Scene" (Franz Matsch), "Shakespeare's Globe Theatre" (Gustav Klimt), and "Scene from Molière" (Ernst Klimt).
The State Staircase Landtmannseite
The cycle in the left-hand staircase consists of the "Altar of Apollo", "Ancient Ex-Tempore Actor" (Franz Matsch), "The Theatre at Taormina" (Gustav Klimt), “Medieval Mystery Play” (Franz Matsch) and "Clown on a Fairground Stage" (Ernst Klimt).
■ BrugTheather (부르크극장)
1741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창설한 궁정무대로, 고트프리트 젬퍼와 카를 폰 하제나우어가 설계하였고, 요제프 2세가 1776년 '궁정국민극장'이란 명칭을 내리고 스스로 총감독을 겸했다. 국립 오페라단,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함께 빈 3대 문화기구로 꼽히며, 왕궁 부르크(Burg) 근처 미하엘광장에 있었기 때문에 부르크극장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빈 회의(1811)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1866)에 이르기까지 J.슈라이포겔과 H.라우베 같은 명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유럽 일류극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표준 독일어 발음 공연으로 유명하며, 각국의 유명극단이 공연을 하기도 하는 독일어권 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극장으로서, 현재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공습당한 건물을 1955년 국가 보조를 받아 수리·복구하였는데, 내부는 필요에 따라 오케스트라 박스를 떼어내고 무대를 만들 수 있도록 하였고, 크림트가 제작한 '디오니소스의 제단' 등 천장화로도 이름이 높다.
부르크극장 중앙계단의 천장
■ The Altar of Dionysos (디오니소스 제단)
디오니소스(Dionysus) (Διόνυσος)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술과 풍요, 포도나무, 광기, 다산의 신이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고 아리아드네의 남편이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Bacchus)에 해당한다. 그가 지닌 티르 소스라는 지팡이 내지는 이 지팡이 이상으로 그의 상징인 술잔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는 일이 많고, 술이 포도주다 보니 포도 자체나 포도덩굴과 어울어진 모습 또한 많이 표현된다.
Ceiling painting "Altar of Dionysos" by Gustav Klimt,
southern Staircase, Burgtheater, Vienna 160X1200cm,oil on marble
무릅을 꿇은 숭배자가 금을 입힌 Pallas Athena의 조각상을 제물로 받치기 위해 왼손에 받쳐든체 제단에 비스듬히 기대있다.
어린아이와 클림트의 서명이 그려져 있다.
■ The Theatre at Taormina (타오르미나 극장)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있는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에 의해 지어진 고대 타오르미나 극장을 부르크극장 천장에 그린것이다.
"The Theatre at Taormina" by Gustav Klimt, Oil on Marble, 750 x 400 cm.
Northern staircase Landtmannseite, Burgtheater, Vienna, 1886-1888.
Hans Makart가 작업을 하던 것을 클림트가 완성한 '타오르미나극장'은
안정된 구조와 색감, 풍만한 분위기 등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
타오르미나 극장 (Ancient theatre of Taormina)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에 의해 지어졌으며 로마인이 도시를 점령한 후에 검투사의 결투를 주최하기에 적합하도록 개조된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시칠리아 최대의 휴양지이다. 이 그리스 극장은 타우로 산의 전망 좋은 곳에 서 있어서, 남서쪽으로는 에트나 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바라다보이고 북쪽 바다 건너편에는 칼라브리아 산맥이 보인다.
■ The Cart of Thespis (테스피스의 마차)
당시 전설로 전해오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이었던 테스피스가 아티카(Attica)지역을 돌아다니며 그의 마차에서 비극 배우로 분장을 하고 연극을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테스피스(Thespis)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이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전기는 전하지 않는다. 기원전 534년에 처음으로 비극을 상연했다고 전해진다. 배우, 연출가이기도하였으며, 또한 무대장치도 맡았다. 합창대가로부터 발달하여 기원전 5세기에 완성된 그리스 비극의 성립을 상징하는 전설적 인물이다. 독백과 대화를 도입한 최초의 시인이며, 또한 가면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The painting’s subject draws on the legendary beginnings of Greek theatre, when, as Horace would have us believe, Thespis journeyed round Attica with a cart doubling as a stage on which to perform his plays.
■ Ancient Theatre Scene (Franz Matsch)
이 작품은 프란츠 마치의 작품이며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고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연극 "Sophocles’ Antigone"의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리스 연극에서는 플룻 연주자를 제외한 모든 출연자들이 가면을 썼다.
무대 위에 가면을 쓴 3명의 배우와 플룻 연주자 등이 보인다.
부루크극장의 간판 여배우
Charlotte Wolter (1834-1897)의 초상 무대 앞 오르케스트라의 자리에 있는
디오니소스 제단 위에 화병과 월계관 소포클레스 동상
디오니소스 극장(Theatre of Dionysus)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세워져 있던 대형 야외 극장으로, 디오니소스제의 개최지였다. 현재는 초라하고 황량하기까지 한 모습의 이 디오니소스 극장은 사실 서양 문학사에서 대단히 의미 깊은 장소이다. 그리스 문화가 한창 꽃피던 시절 이 극장에서는 매년 유명한 비극 경연대회가 열렸다. 기원전 5세기에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소포클레스(Sophoc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와 같은 3대 비극 시인들이 정성들여 지은 걸출한 비극작품들이 바로 이곳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경쟁적으로 공연되며 문학적 자웅을 겨루었다.
당시의 디오니소스 극장에는 약 1만 4000명에서 1만 7000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황금 시대라 불리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전체 시민의 수가 약 3만 5000명 정도였다고 하니, 사실상 아테네 시민들 대다수가 이 디오니소스 극장에 모여 비극을 관람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극장의 구조 자체가 거대한 확성장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극을 통한 제의의 장, 디오니소스 극장]
■ Shakespeares's Globe Theatre (Gustav Klimt)
From antiquity we now move to the golden age of the theatre in Elizabethan England.
As spectators in Shakespeare’s Globe Theatre we witness the scene in the Capulets’ tomb in which a suicidal Romeo has collapsed beside Juliet, whom he believes to be dead.
영국 런던에 있는 Globe 극장에서 공연중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가운데 사진에서 목털 카라를 한 멋진 신사는 클림트 자신이고 그 뒤의 젊은남자가 동생인 에른스트 그리고
테없는 모자를 쓴 우아한 남자가 바로 Franz Matsch 라고 한다. 클림트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간 이 부분 때문에 유명하다고...
1990년 부르크극장의 다락방에서 이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 사전작업을 한 풀스케일의 스케치가 발견되었다.
이 값을 메길 수 없는 보물은 현재 잘 복원되어 부르크극장내 Angelika Prokopp Foyer(휴게실)에 방문객을 위해 공개되고 있다.
▼ The Shakespeare Globe Theatre in London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은 1598년 버비지 형제(Cuthberg, Richard Burbage)가 런던의 탬스강 남쪽 사우스 워크(Southwark)에 지은 극장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수 초연된 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1613년 6월 29일 헨리 8세 공연 도중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나 이듬해 6월에 재건되었다. 1642년에 청교도 혁명의 영향으로 폐쇄되고 1644년에 철거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1997년에 17세기 원형대로 복원된 것이다. 857석의 객석이 있다.
1888-89. Gouache on paper. 82 x 92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클림트는 1888년 구 부르크극장이 철거되기 전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빈 시위원회로부터 의뢰 받았다.
궁정극장의 위용을 잘 묘사한 이 작품은 클림트 초기의 사진적 리얼리즘의 전형적인 예라 할수 있다.
무대가 중심이 아니라 관람석을 그린 이 작품은 150여 명의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사교계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황제의 애인이자 배우인 카테리나 슈라트, 작곡가 브람스와 골드마르크 등을 볼수 있는데 이는 부르크극장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사교계의 인사들이 클림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함으로써 재정적으로 안정될 수 있게 만들어 준 작품이기도 하며 클림트의 출세작이다. 사진처럼 정밀하게 묘사된 이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프란츠 마치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옛날의 부르크 극장 실내 전경을 그렸는데, 클림트는 무대에서 바라본 관람석의 모습을 그렸다. 1890년 이 그림으로 400길더의 상금이 수여되는 상을 받아 그 돈으로 뮌헨과 베니스로 첫 여행을 떠났다.
Gustav Klimt’s contribution to the masterpiece of the festschrift on the occasion of the 25th anniversary of the Imperial Royal Austrian Museum of Art and Industry (today MAK) is Allegory of Sculpture. This watercolor painting represents the symbolism of his early work: In the center, the naked personification of the sculpture, adorned with hair ornaments that appear Hellenistic, a snake bracelet, earrings, and a golden, delicate necklace.
In her left hand she holds a Victoria with a laurel wreath who is balancing on the globe. The background of the picture features common sculptural motives from antiquity such as the Boy with Thorn, Athena Parthenos, as well as Juno Ludovisi—enthroned above all. In 1897, Martin Gerlach’s Allegorien. Neue Folge [Allegories. New series] was published in which Klimt again refers to the theme of allegorical depiction of sculpture but strongly breaks up the antique-like depiction.
1889. Pencil and watercolor heightened with gold on cardboard. 43.5 x 30 cm. 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s, Vienna,
Paintings in th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1890~1891
학생 때부터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던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 예술가들의 왕자 한스 마카르트의 도움으로 "미술가 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빈 미술사 박물관' 층계의 기둥 사이나 세모꼴 공간에 40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고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그림 <타나그라의 소녀>는 그의 양식적 변모를 드러내는 최초의 징후를 보여준다. 그림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왼쪽에 위치한 이 인물은 고대사 속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인물의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Ancient Greece at Great Stairs & The Girl from Tanagra (Ancient Greece)
Old italian Art 15~16C의 Florence Egypt
▼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The Kunsthistorisches Museum (Museum of Art History)
대대의 오스트리아 황제의 콜렉션을 중심으로 한 총합적인 미술관인데, 현재의 건물은 고트프리트 젬퍼의 설계에 의해 1891년에 개관하였다. 고대, 중세의 조각이나 공예품 등에도 명작이 적지 않지만 뭐니뭐니해도 중심은 회화로서, 질적 수준에서는 유럽 1·2위를 다투고 있다. 내용은 르네상스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각파에 걸치고 있는데, 더욱이 <바벨 탑(塔)> <농민의 춤> <눈 속의 사냥꾼> 등을 포함한 브뤼헐의 콜렉션은 세계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클림트가 이전 벽화에서 주제로 삼았던 역사주의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 있다.
클림트는 스물 한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될 무렵으로
이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1891년 예술사 박물관 장식을 완료한 클림트 형제와 프란츠 마치는
빈의 다른 화가들과 연합을 결성하였고, 빈의 유명한 화가들 중 일원이 되었다.
에밀리 플뢰게의 언니 헬렌이 구스타프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하였고,
구스타프는 에밀리의 첫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 Portrait of Joseph Pembauer
1890, the Pianist and Piano Teacher. 69 x 55, Tyrolean Provincial Museum, Innsbruck, Austria.
클림트의 사진적 리얼리즘의 전형적인 작품. 클림트 자신이 액자까지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
■ '국제 음악 및 무대미술 전시'를 위한 포스터 디자인
1892. 84x56cm, 비엔나 미술관, 캔버스에 유채,
'국제 음악 및 무대미술 전시'는 5월 7일부터 10월 9일까지 비엔나에서 열렸던 전시회의 주제이다. 이 전시를 위하여 클림트가 속해있던 ‘예술가 회사’에서 전시 포스터와 프로그램 커버 페이지 제작을 의뢰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전시회의 주최측은 전시 포스터 작업 작가를 선정하기 위하여 젊은 작가들의 습작들을 공모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컨셉에 가장 잘 맞는 습작을 선발하여 해당 작가에게 포스터를 의뢰하였다.
당시 제출되어 선정된 습작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 작품으로서 아폴로를 그린 유화스케치다. 실제로 본 전시의 포스터와 프로그램 커버 페이지는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가 맡아서 진행했으며 그의 완성된 포스터에는 클림트가 디자인한 아폴로 이미지와 함께 세 명의 뮤즈가 더 그려져 있다. [뉴스투데이]
아터 호수 근처의 별장에서 에밀리 플뢰게와 함께
에밀리 플뢰게는 1874년 8월 빈에서 태어났다. 클림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1891년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그녀의 언니가 결혼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해 클림트는 29살이었고, 에밀리는 17살이었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에밀리를 좋아했고 아껴주었다. 그녀를 위한 초상화를 그려주고 주문받은 그림에 그녀를 출연시키는 성의도 보여주었다. 클림트는 평생 에밀리 플뢰게의 모습을 네 번 화폭에 담았다.
1892년 에른스트가 갑자기 사망하자 클림트는 조카 헬레네의 후견인이 되었다. 에밀리가 성인이 되자 1890년대 말부터 옷을 만드는 양재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에밀리는 성실하게 일했고 재능도 겸비해서 수준높은 패션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에밀리는 클림트와의 만남에서 엄격한 규율을 만들었다. 그녀는 클림트처럼 정기적으로 아터 호수에서 여름여행을 보냈으나 클림트가 오기 전에 아터 호수를 찾았고 클림트가 떠난 후에 혼자 비엔나로 돌아오곤 했다. 에밀리는 클림트의 복잡한 여인관계를 알고 있었고 클림트의 자식문제도 알고 있었다.
클림트가 임종 직전에 애타게 찾았던 유일한 여성 에밀리. 그녀는 클림트와 함께 지낼 때는 물론이고 사망 이후에도 그 어떤 다른 남자도 사귀지 않은 채 1952년(78세)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플뢰게 집안의 가족 무덤이 아니라 클림트 무덤 옆에 묻혔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그와 함께했던 것이다. [에밀리 플뢰게: 영원한 정신적 연인]
에밀리 플뢰게..
평생 클림트와 플라토닉 사랑만을 나누었던 그의 애인이다.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작품 속 에밀리 플로게는 고고하고 정숙해 보인다.
여성편력과 성욕이 강했던 클림트에게.. 그녀는 여성 그 자체를 뛰어넘은 사랑의 대상이었다.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리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이다.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상호간의 정신적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고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반자로서 때론 여행의 동지로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글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클림트가 400회가 넘는 서신을 보냈다고 하니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알만하다.
Emilie Flöge, Aged 17. 1891, Pastel on Paper. Private Collection
클림트는 평생 에밀리 플뢰게의 모습을 네 번 화폭에 담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1891년에 그녀를 처음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가 직접 짰다는 그녀를 담은 첫 작품의 액자를 보면 클림트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실하게 보인다. 꽃이 피어져 있는 버찌 나뭇가지와 풀들은 일본풍을 빌리는 교묘함으로 가렸을 뿐, 그녀를 꽃과 같이 찬양하는 클림트의 속내를 느낄 수 있다.
작품 속의 그녀는 정말 꽃과 같다. 꽃다운 나이인 17살의 그녀지만 기품마저 갖춘 모습이다. 그녀의 눈망울은 꿋꿋함과 단호함을 담은 듯하다. 그녀의 머리와 얼굴은 뚜렷하게 채색해서 분명하고 강렬하다. 그리고 그녀의 의상과 배경을 단조로운 톤으로 만들어 인물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Portrait of Emilie Flöge. 1893. 1893년 클림트는 그녀를 역사화의 한 장면으로 옮겨와 놓았다. 이 초상화와 1894년에 완성한 〈로텐부르크 야외무대의 광대〉에서 광대를 구경하던 그녀의 모습과 비교하면, 이 작품이 원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협죽도(Oleander)와 우물이 있는 정원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이제 숙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로텐부르크 야외무대의 광대, 1894 Klimt completes his brother's Ernst's easel painting, "The Clown on the Improvised Stage at Rothenburg." He gives one of the central figures in the painting Emilie's face. | Portrait of Emilie Flöge 1902 클림트는 작품 속 에밀리를 위해서 2차원으로 표현된 그녀와 그녀의 의상 속에 다양한 상징기호를 넣고 많은 공을 들였다. 푸른색의 긴 원피스는 에밀리가 만든 개량 의상이다. 의상을 입은 에밀리의 모습은 일본 목판화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기모노를 입은 여인처럼 보인다. 그리고〈키스〉에서 도입한 클림트만의 상징체계를 적용하였다. 배경으로는 비잔틴 미술의 신비로운 화환(花環)을 넣어서 성숙한 여인이 된 에밀리 플뢰게의 여성성을 찬미했다. |
Gustav, Helene and Emilie, 1914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면 관능적이고 화려한 황금빛 회화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의외로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예술가’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나 괴팍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가 내면의 정열과 격정을 풀어놓을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캔버스뿐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지독한 가난과 정신병으로 형제들을 잇따라 잃었고, 장학금으로 미술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며 살아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떠맡았습니다. 특히 어머니와 누이들을 끔찍하게 위했으며, 수많은 애인을 만들었으면서도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금빛 에로스가 가득한 화려하고 관능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클림트는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섬세한 기교와 화려한 장식, 아찔한 관능과 상징이 가득한 작품을 통해 클림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그 어떤 화가보다 매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클림트의 작품은 600년 넘게 전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과 산업화에 따른 갈등, 그리고 세기말의 공포와 새로운 세기에 대한 흥분과 긴장감 속에서 쾌락적 탐미주의에 빠진 오스트리아 빈의 중상류층 사회의 종말론적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울렸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한 관능이 가득찬 찬란한 황금빛의 작품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광기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클림트는 화가로써 최고의 명성을 누릴 수 있었지요. 클림트는 파괴적인 열정에 사로 잡혀있던 시대에 자신만의 에로티시즘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그의 뮤즈였고, 사랑이었으며, 전부였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참으로 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신화 속 여인을 그린 그림도, 상류층 귀부인을 그린 그림도, 클림트의 상상에서 창조된(혹은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모델이 되어) 관능을 상징하는 여인을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클림트의 손에서 재창조되어 때론 아름답게, 때론 화려하게, 때론 아찔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클림트와 그 여인들간의 사랑이야기입니다.
1892년 미술가 연합은 요제프슈타터스트라스로 작업실을 옮겼다.
풀이 우거진 정원이 있는 그 건물에서 클림트는 1914년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에른스트와 헬렌의 딸 헬렌 탄생. 12월 9일에 동생 에른스트가 죽고, 구스타프는 조카딸의 보호자가 되었다.
1894년 구스타프 클림트와 프란츠 마치는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클림트의 양식적 변모는 미술가 연합의 점진적인 해체로 이어졌다.
클림트는 에른스트의 이젤화 <로텐부르크의 임시무대에 오른 광대>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 그림의 중심인물들 중 한명의 얼굴에 에밀리를 그려넣었다.
1895년 새로 준비된 <알레고리와 상징> 시리즈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했고,
그의 그림 <사랑>에서 그가 상징주의로 변모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플뢰게 자매들의 장녀 폴린(1866-1917)이 의상 관련 교육기관을 열었고, 거기서 헬렌과 에밀리도 일한 것으로 보인다.
■ Love
1895, oil on canvas, 60 x 44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커플의 애닯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사랑을 그려내었다. 자신을 포기한 듯 남성에게 매달린 여자의 표정에서 축복받지 못하는 사랑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클림트의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 마치 클림트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고, 신고전주의풍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가 확고해지지 않은 이 때에도, 클림트 특유의 은유와 상징이 살아 있다.
표구를 한 듯 그린 이 작품의 첫 인상은 팬시한데 어찌보면 그저 통속적인 사랑 타령쯤으로 보일 수도 있다. 몽환적인 느낌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 하고, 특유의 작품세계의 단서도 보인다. 그림 제일 윗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흐릿하게 그린 얼굴들은 어린아이부터 노파, 그리고 유령까지 등장한다. 그림 아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풍경이다.
그러나 사랑이 그저 두 사람의 반짝 만남이 아니라 오랜 인연과 과거, 그리고 미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이 부분으로 인하여 그림은 통속성을 벗어나고있다. 사랑을 보는 다른 시각, 아주 독특하고 통찰력 있는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Portrait of Josef Lewinsky. |
Portrait of Marie Breunigne |
◀ 이 그림의 모델은 마리 브로이니크라는 여인으로 그녀는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공한 비엔나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행운의 여인이다. 그녀는 에밀리 플뢰게 자매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그녀들이 운영하던 패션살롱의 고객이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한동안 클림트는 드레스에 비치는 빛의 반사나 검은색 유리구슬, 반지 등의 장식과 같은 작은 디테일을 묘사하는데 주력했고 벽과 구분되는 윤곽선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그렸다. 모델의 배경은 텍스타일과 벽면으로 구획지어져 있고 가구(의자)와 같은 오브제를 통해 화면을 구석구석 채워 나갔다. 이처럼 구조적으로 정밀하게 그려나갔던 작가의 태도는 후기 풍경화 화면전체에서 발견되는 탄탄한 유기적 구조의 발판이 되었다. |
Sculpture 1896. |
Junius. 1896. 41.5 x 31cm. |
Tragödie (Tragedy). 1897. 41.9 x 30.8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Black chalk, pencil and gold. |
Music 1895, |
Music 2. 1898 |
Lady by the Fireplace The Galerie Belvedere, Vienna, |
Music 1895, Oil on canvas, 37 x 45 cm, Neue Pinakothek, Munich
Blind Man, 1896. oil on canvas, 532 x 660cm, Leopold Museum
1899. Oil on canvas. 150 x 200 cm. Destroyed by fire at Schloss Immerdorf in 1945
Schubert at the Piano (study) 1896
(같은 제목의 유화를 위한 습작)
캔버스에 유채, 30x39cm, 개인소장, 비엔나
1899년 빈의 링스트라스에 있는 둠바 빌라의 음악실 실내장식이 완성되었는데 클림트는 이 음악실 장식을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슈베르트>를 그렸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이전 벽화에서 주제로 삼았던 역사주의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증된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한 정확한 세부묘사 대신 모델로 하여금 당대의 의상을 입히고 촛불의 미묘한 효과를 강조하며 자연스러운 빛과 어둠의 효과를 연출하였다.
클림트는 가장 정확한 빛으로부터 그림자까지의 진행을 포착해내기 위해 수 차례 촛불 스케치를 했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는 특히 소녀들 머리와 얼굴의 윗부분에 밝고 어두운 대비를 강화시켜 더욱 신비스럽게 보이는 효과를 얻었다.
이 작품의 피아니스트는 슈베르트이다. 슈베르트를 주인공인 피아니스트의 모델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이 작품의 제작 후원자였던 둠바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피아노 선생은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는 흔했기 때문에 이런 선생들은 귀족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치고 집안일도 돕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화재로 불에 타버렸다.
1896년 클림트와 마치의 작품이 더 이상 양식적인 공통점이 없었지만 여전히 빈 대학의 천장화를 다루는 그림을 함께 맡았다.
클림트가 의학, 철학, 법학을 맡고, 프란츠 마치가 그 나머지를 맡았다.
1897년 클림트는 20여명의 다른 화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제체시온, Secession)를 결성하였고, 그 초대 회장을 맡았다.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전시 동인이라 할 수 있는 분리파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관영화 되어있던 전시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전시회를 기획하고 조직하였으며
이듬해부터 월간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란 뜻)>을 출간했다.
클림트는 세기말의 빈에서 청년 화가를 이끄는 개혁의 주역이자 유명 인사로 떠오른다.
동시대에 에드바르트 뭉크는 <절규>를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작곡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판하고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이 초연됐다.
프로이트와 말러는 클림트의 작품세계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이다.
1898년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원들의 그림 뿐 아니라 뵈클린, 크레인, 클링거, 리버만, 로댕, 세간티니, 슈툭, 토마 등 잘 알려진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해 제출한 스케치로 인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완성된 그림을 심사 받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에밀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Hallst Atter 호수의 St Agatha에서 최초의 풍경화를 그렸다.
(최근에 발견된 1881년작 풍경화 두점을 제외하고서이다. 이 그림들은 1992년 취리히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볼 수 있다.)
1898년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원들의 그림 뿐 아니라 뵈클린, 크레인, 클링거, 리버만, 로댕, 세간티니, 슈툭, 토마 등 잘 알려진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빈 대학 대강당 벽화를 위해 제출한 스케치로 인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완성된 그림을 심사 받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에밀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Hallst Atter 호수의 St Agatha에서 최초의 풍경화를 그렸다.
(최근에 발견된 1881년작 풍경화 두점을 제외하고서이다. 이 그림들은 1992년 취리히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볼 수 있다.)
Theseus and the Minotaurs. 1898, Lithograph 62 X 43cm,
Scanned from the book 'Secession' 1898
테세우스의 성기를 나무를 이용해 가렸다.
Pallas Athene (아테나 여신) 1898 Oil on canvas. 75 x 75 cm.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팔라스아테네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와 같은 해에 제작되지만 출품은 제2회 분리주의 전시회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실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오게 되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자세히보면 일단 아테네여신이 서있고 그녀의 가슴에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황금색 고르고가 보인다. 오른손엔 나체의 여자가 서있습니다. 뒷쪽 검은 부분에 얼핏 보이는 그림은 전투장면인데 헤라클레스와 트리톤이 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팔라스 아테나를 처음 보면 눈에 쏠리는 것은 정 가운데의 황금 메두사입니다. 무게감 나가는 황금을 가져다 붙인만큼의 압도적인 사실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 다나에와는 달리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두르고 있는 금빛 갑옷의 물고기 비늘은 이 것이 정말 한 인간이 일생이 아닌 단기간의 시간을 두고도 그려낸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아테나 여신의 오른손에 관능적인 여인의 조각상이 자세가 양팔을 벌리고 하늘과 교감하는 듯 얼굴을 위로 올린 걸 보니 아테나 여신에게 제를 올리는 여사제같습니다. 클림트는 아테나 여신의 왼손엔 창을 오른손엔 매혹적인 여사제의 조각상을 올려 놓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아테나 여신에게 투영시켰습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게 아닌 자신만의 색채로 매혹적인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를요.
클림트가 팔라스 아테나를 그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클림트의 주류를 차지하던 미술가 연맹에서 자신과 같은 분리파 화가가 이제는 아테나처럼 등장하여 판을 바꾸겠다 라는 의지입니다. 그렇기에 아테나의 입은 여물다. 굳은 결의의 다짐이자 그의 손에 든 여신상(승리의 여신 니케라고 한다)을 통해서 의지는 재확인됩니다.
여기서 나타난 아테네 여신은 역시 전형적인 팜므파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뇌세적인 눈빛. 남성으로 하여금 겁탈하고 싶게 하는 욕망이 생기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거세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느낌. 정말 기가막힌 이미지라고 생각됩니다. 눈빛하나로 이런 느낌을 자아낼 수 있는 화가가 클림트 말고 또 있을까요? 뒤에 나타나있는 헤라클레스의 전투장면의 상징성은 위에서 본 테세우스의 전투장면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인상 깊은 부분은 고르고입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고르고는 폰토스와 가이아의 자식들인 포르코스와 케토.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매들인데 각기 이름은 스텐노, 에우뤼알레, 메두사입니다. 이 세명중 스텐노와 에우뤼알레는 불사의 운명이지만 메두사만이 죽을 운명을 타고나게 됩니다. 흔히 단수로 고르고라고 하면 메두사를 말합니다.
팔라스 아테네에서 그려진 저러한 혓바닥을 내민 고르고의 모습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구세력에 대한 조롱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차용한 강력한 아테네여신의 모습에서 저런 형태의 메두사를 차용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거세공포를 일으키게하기위해선 좀 더 무섭고 강렬한 메두사의 이미지를 차용하는게 옳을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오른손위에 있는 나체의 여성입니다. 저 여성은 니케(Nike)를 의미합니다.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거인 팔라스와 암흑의 강 스튁스는 승리(Nike), 힘(Kratos), 열성(Zelos), 완력(Bia)의 자녀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우스가 크로노스 및 티탄신족과 전쟁을 시작할때 스튁스와 스튁스의 저 4명의 자녀들이 제우스의 편을 들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즉 승리, 힘, 열성, 완력은 제우스가 티탄신족을 제압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상징하는 니케는 동시에 아테네와 제우스의 상징이므로 특별히 니케가 따로 신으로서 숭배되기보다는 제우스와 아테네가 니케를 들고 있는 형태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주로 팔에 올려놓는 형태입니다. 그렇기에 클림트의 팔라스 아테네에 나오는 저 여성이 니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니케는 단독으로 그려질 경우 날개가 달리고 종려나누 잎을 들고 있는것이 특징입니다.
왜 그 흔히 배의 선상에 세우는 날개달린 여신상을 생각하면 됩니다. [출처] 아테나 여신(Pallas Athena)|작성자 불여우아빠
클림트는 <팔라스 아테나>에서 처음으로 황금을 색으로 사용했다. 예술을 후원하는 여신으로도 알려진 아테나를 클림트는 황금 갑옷과 투구, 그리고 창으로 무장하여 예술을 수호하는 강력한 힘을 상징했다. 그는 아테나의 갑옷에 메두사가 혀를 내밀며 적의 세력을 조롱하는 모습을 새겨 넣었다.
팔라스는 타이탄족 크리오스의 딸인 지혜의 여신으로 아테나가 팔라스의 뒤를 이어서 지혜의 여신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팔라스 아테나라고 부른다. 팔라스 아테나는 트럼프에서 퀸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여신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은 클림트는 역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흥미를 느꼈으며, <팔라스 아테나>란 제목으로 아테네의 수호여신을 비엔나의 남자들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이라고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바꾸었다.
Sonja Knips, 1898, 145 x 145cm. Österreichische Galerie at Vienna, Austria
이 아름다운 여인은 육군 여단장의 딸이자 실업가의 아내였다고 한다.
클림트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붉은 가죽장정을 한 스케치북을 여러 권을 주었고,
그 중 하나에 자신의 사진도 끼워 넣었다고 한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균형 있게 나뉘어 있고, 어두운 배경에 의해 드레스의 색감이 돋보인다.
Portrait of Helene Klimt (His niece) 1898. 60 x 40 cm. Private collection.
Water Nymphs (Silverfish, 은빛 물고기). 1899. 82x52cm, Zentralsparkasse (Private collection), Vienna
물의 정령은 관람자에게 프로이드의 '상징의 세계'와 비슷한 성적인 세계를 환기시킨다.
이것은 이미 〈흐르는 물 (Fishblood)〉과 이 작품 〈물의 님프 (은빛 물고기)〉를 통해 어렴풋이 펼쳐졌던 세계이며 몇 년 후 〈물뱀 Ⅰ〉, 〈물뱀 Ⅱ〉연작에서 거듭 나타난다. ---- 중략----
님프의 얼굴에서는 귀족부인 로제 폰 로스트호른 프리드만의 특징이 분명하게 보인다. 이렇게 귀족 출신 팜 파탈이 탄생했다. 클림트가 그녀의 동의를 구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 그림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빈 사람들은 그러한 추측과 험담 거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출처: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Fishblood. 1898. Original distroyed.
Pen and ink. From "Ver Sacrum" Nr 3.
클림트는 물의 모티프를 자주 사용했으며
『베르 사크룸』을 위한 아름다운 삽화 <물고기의 피> (1898년) 에서 처럼
물의 요정이나 인어 같은 주제를 여러 번 사용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물고기의 핏줄기가 상아질 몸체의 요동치는 무리를 생성해내는 듯하다.
Still Pond(캄머성의 고요한 호수) 1899, 74 x 74 cm, oil on canvas, Leopold Museum
Tranquil Pond (Egelsee near Golling, Salzburg)
260 x 64.5cm, Austrian National Library, Vienna, Austria
2m의 이 여성상은 기이한 표정과 자극적인 누드를 통해 빈의 시민들을 당황케 했다. 그녀의 붉은 음모는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미의식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승리에 대한 작은 우의는 아름다운 작품 <누다 베리타스> 에서 나타난다.
『베르 사크룸』을 위해 1898년 그린 그림의 머리 부분에 있었던 셰퍼의 인용구 “진실은 불이다. 진실은 불을 밝히고 불사르는 것이다” 는 이번에는 대중의 취향에 도전하는 동시에 예술의 자율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실러의 주장, “당신의 행동이 대중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소수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라. 여럿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악이다.” 로 바뀌었다.
비평가 헤르만 바르의 사무실에 걸기 위해 그린 이 작품은 진실과 예술을 동일시한 복합적인 상징의 총체를 보여준다. 물에서 태어나는 근대적인 비너스는 거울을 들고 그 안에 바라보는 사람의 이미지를 반영하고자 하지만, 현명함과 관능을 동시에 상징하는 뱀 한 마리가 발밑을 감고 있다. 가볍고 아른거리는 화관을 가진 두 송이 민들레꽃은 새로운 사상이 세상에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이기에 진실하고 그래서 순수한 새로운 예술은 위선이나 핑계 없이 그 시대의 진정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 목소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롭고, 그리고 바람처럼 빠르게 퍼진다.
클림트의 두 번째 팜 파탈은 높이 2.6m의 유화 대작 〈누다 베리타스〉로 이 때 처음으로 '자연주의' 양식이 나타난다. 붉은 머리카락과 음모를 드러낸 도발적인 누드로 사람들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비너스가 아니라 거대한 니니, 즉 전통적 예술의 이상화된 누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살과 피로만 이루어진 그저 몸뚱이일 뿐이었다.
음모를 표현한 것 자체가 고전적인 이상주의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림 위의 주석을 단 듯 인용한 실러의 시귀는 그림 자체보다 먼저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을 자극했다.
출처 :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벌거벗은 진실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1899년에 그린 그림으로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그림입니다. 클림트는 <필라스 아테나>에서 아테나 여신이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을 <벌거 벗은 진실>로 확대하여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두가지로 제작되었는데 베르사크룸을 위한 삽화로서 흑백으로 된 그림이 한장 있으며 또 하나는 지금 보고 있는 이그림입니다. 이 작품 역시 분리파와 팜므파탈 그리고 상징주의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진한 관능미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 이 여성상은 여신이 아니라 팜므 파탈(프랑스어로 성을 무기로 삼아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을 뜻함)로 다가와 비엔나 시민들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붉은 음모는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미의식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거울을 들고 있는 형상은 비엔나의 모던한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쎼쎼시오니스트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생략)
[출처] 벌거벗은 진실(Nuda Veritas)|작성자 불여우아빠
화가는 현대인에게 텅 빈 거울을 갖다댄다.
화가는 그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욕망으로 들끓는 심리적 인간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클림트의 여성은 굴곡이 진 섹시한 몸매로 천천히 바뀌어간다.
이제 '누다 베리타스'가 아니라 '베라 누디타스'(진짜 누드)다.
1900년 제 7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클림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 <철학>을 선보였다.
이 그림은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87명의 교수들이 이 그림을 대학 대강당에 두는데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
클림트의 작품들이 자국에서는 그토록 천대받았지만
이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에 접어든 프랑스 등에서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그의 작품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고,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즈(1902)"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Composition project for the University painting
오스트리아의 빈을, 음악의 도시에서 예술의 도시로 승화시켰고, 고전주의자들의 검열로 부터 분리주의(아르누보)를 이끌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3연작으로 클림트의 회화 「철학」「 의학」「 법학」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 대강당 천장화를 위한 밑그림이었다.
비엔나(빈) 대학의 천장화로 주문받았던 그림들이지만, 외설논란이 일자 자신이 그림을 주문받는 대가로 받았던 것을 돌려주고 그림들을 철수시켰다. 당시 대학 측과 교육부의 극심한 비난과 반발로 인해 천장화에 사용되지 못한 이 세 작품은 얼마 동안 국립 근대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었다. 후에 <철학>은 에리히 레데러가, <의학>과 <법학>은 콜로만 모저가 구입했고, 나중에 오스트리아 화랑이 <의학>을 모저로부터 구입했다.
세계 제 2차대전 중에는 이들 작품의 안전을 위해 오스트리아 남쪽 임멘도르프 성으로 옮겨졌으나 나치가 침공한 후 <철학>과 <법학>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유태인 소유자의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의학>과 함께 1945년 5월 오스트리아 남쪽 슐로스 임멘도르프 궁전에서 나치 친위대에 의해 불에 타 영원히 사라졌다. 현재 남아 있는 도판은 대부분 전쟁 이전에 촬영한 상태가 좋지 않은 흑백사진뿐이다.
Philosophy 「철학」
그 속엔 천진한 아기, 나체의 젊은 여인, 머리를 감싸 안은 늙은이도, 저들은 쾌락과 출산, 노동과 늙음의 애환에 뒤엉켜 울고 웃고 신음하며 정처없이 부유하는 육체들. 은하수처럼 흐르는 무수한 빛의 파편 속엔 인간기둥을 바라보는 미동않는 얼굴이 보인다.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일까, 지혜(sophia)와 사랑(philo)을, 이성과 우주의 법칙, 그리고 절대자의 말씀을 우리에게 명징하게 일러줄 것인가. 아래, 부푼 머리카락으로 두상을 감싼 여인만이 뚜렷한 의식으로 나를 직시한다. 전시회 팸플릿에 '지식'으로 명기 되었다는 그녀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너희도 모두 저들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고~' 영원히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 창조와 파괴, 그 혼돈에 따르는 고통과 환멸까지도 자신의 운명이라면 사랑해야 한다는 ‘아모르 파티(amor pati)’,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 본다. | Medicine 「의학」 「철학」맞은편 천장에 자리하기로 한 「의학」은 구도가 「철학」과 비슷하지만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클림트는 의학의 최대 목적인 질병 예방과 치료는 생략한 채, 인간의 삶과 죽음, 에로티시즘을 과감히 드러냈다. 의사들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의사인 아스클레피오스의 딸, 즉 건강의 여신인 ‘히게이아’ 묘사에는 수긍하지만, 도발적인 여인의 나체와 의술의 무력함을 말하고 있는 듯한 죽음을 묘사한 해골은 의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포르노그라피라는 비난이 격해져 의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삶이란 탄생과 성애,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임을. 의학마저도 저 大河를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 Jurisprudence 「법학」
그림에서 문어처럼 생긴 동물이 벌거벗은 늙은이로 묘사된 죄인을 포획하고 늙은이는 머리를 떨군 채 벌을 기다리며 서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진실, 정의, 법이 상단 저멀리 세 여신으로 상징되었다. 그는 죄를 남성으로 법을 여성으로 의인화했다. 상단의 세 여인은 진실, 정의, 법의 은총이고 그 아래 세 누드는 상징화한 여신들이다. 클림트는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는데,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여신들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앙심을 품은 여신들 앞에 오레스테스가 벌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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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남은 구성 스케치(습작)
72 x 55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클림트와 마치는 1894년 교육부 장관 폰 하텔에게서 비엔나 대학 대강당의 벽화를 위임받고 2년 후 벽화 스케치를 교육부에 제출합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모두 세 점으로 <의학>·<철학>·<법학>이었습니다. <의학>의 경우 1901년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바이에른 정부가 <음악>을 구입했으므로 클림트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클림트는 작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의학>을 1898년 비엔나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했고, 미완성의 <철학>은 1900년 비엔나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했습니다.
중산층이 그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산업화와 경제적 붐을 통해 형성된 중산층은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을 전후해서 산업화의 실패와 현대 경제의 실패로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비엔나의 경제와 문화는 부르주아를 주축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중산층이 정치·사회적으로 영향을 주기에는 힘이 미약했고, 문화적·경제적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전통을 가장 가치 있게 여겼으므로 클림트의 요염한 여인의 누드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더러는 좋아했더라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선정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클림트의 화면에 나타난 선정적인 여인의 누드와 해골이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그림들이 대학에 장식될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항의가 일어났고 논란은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비엔나 대학을 위한 그림으로 인해 비엔나에서 클림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1901년에도 교수 물망에 올랐지만 보수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로 선임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파리나 베를린과는 달리 비엔나는 현대미술이 성장할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베를린 분리파가 1900년에 그를 멤버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가 유럽의 중요한 화가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07년에 완성한 <의학>·<철학>·<법학> 모두 1945년 나치가 침공한 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유대인 소유자의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1945년 5월 오스트리아 남쪽 슐로스 임멘도르프 궁전에서 불태웠습니다.
클림트는 <법학>을 1904년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금붕어>와 <희망 I>도 전시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비엔나 대학에 벽화를 그리기로 한 정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을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그는 교육부 장관 앞으로 공개서한을 발송했습니다.
몇 년이 걸리는 이 작업이 완성되려면 우선 저의 열광을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현재와 같은 정부의 후원 상황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지한 예술가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말할 것입니다. 언젠가 난 그들을 대변하며 몇 가지를 분명히 할 것입니다. 정부는 전시회와 예술가들의 말에 독재적인 간섭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의 역할은 중재자와 상업적 에이전트로 제한되어야 하고 예술적 독창력을 예술가들에게 완전히 일임해야 합니다.
당시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나는 검열을 너무 많이 받았다.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자유롭기 바란다. 내 작품을 가로막는 그런 불쾌한 하찮은 것들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회복코자 한다. 나는 정부의 모든 후원을 배척하며, 어떤 일도 원치 않고 …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오스트리아 정부와 교육부의 정책에 대항하고자 한다."
클림트는 정부로부터 받은 계약금을 돌려주고 자유를 택했습니다. <철학>은 에리히 레데러가, <의학>과 <법학>은 콜로만 모저가 구입했고, <의학>은 훗날 오스트리안 화랑이 구입했습니다. [출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김광우/도서출판 미술문화
Philosophy 「철학」 1899 - 1907, 1907년 확정판. 캔버스에 유채 430×300cm
아득한 우주, 현현한 공간에 수많은 불꽃 에너지로 흘러내리는 그 공간에
허둥대는, 벌거벗은 사람이 모여 원주(圓柱)를 이룬 인간군상.
그 속엔 천진한 아기, 나체의 젊은 여인, 머리를 감싸 안은 늙은이도,
쾌락과 출산, 노동과 늙음의 애환에 뒤엉켜 울고 웃고 신음하며 정처 없이 부유하는 육체들.
은하수처럼 흐르는 무수한 빛의 파편 속엔 인간기둥을 바라보는 미동않는 얼굴이 보인다.
아래, 부푼 머리카락으로 두상을 감싼 여인만이 뚜렷한 의식으로 나를 직시한다.
전시회 팸플릿에 '지식'으로 명기 되었다는 그녀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너희도 모두 저들과 다를 바 없지 않으냐고~.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다.)
Medicine 「의학」 1900-1907, 1907 확정판. 캔버스에 유채, 430×300cm
흘러가는 강물일까. 망망대해일까. 벌거벗은 남녀들이 수직을 가른 원주에 모였다.
인간기둥 속엔 아이들, 황홀경의 여인들, 나체로 웅크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해골바가지도...
生老病死에 뒤엉켜 강물처럼 흘러 흘러가는 얼굴들,
이승에서 마지막 마시는 레테의 강물, 팔에 뱀을 감고 그 망각의 물을 들고 있는 여신
'히게이아'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삶이란 탄생과 성애,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 의학도 결코 저 大河를 막을 수 없다."
Jurisprudence 「법학」 1903-1907. 1907 확정판- 캔버스에 유채, 430cm×300cm
멀리, 화려한 장식적 배경 상단에는 진실과 법률의 여신과 가운데 정의의 女神이 서 있다.
세 여신, 엄숙한 재판관의 권위가 눈앞의 농락과 폭력 보다 더 작고 멀게만 느껴진다.
(법에 의한 정의보다는 힘의 횡포로 인한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다.)
Hygeia. Detail of Medicine. (The only color photo)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의사인 아스클레피오스의 딸, 건강의 여신
“의학”의 부분그림으로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히게이아”가 뱀에게 ‘망각의 강물 Lethe’을 마시게 하는 장면.
망각의 강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 Hades에 있는 강으로 강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다.
이 여신 위에는 죽음의 신이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 서 있다.
그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의학을 무시했다는 의료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던 작품이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 그림이 불태워졌다니...
20세기초 10년간 클림트는 특히 <유딧> <금붕어> <물뱀> <희망> 등 많은 우의화 걸작들을 완성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들에서 학생 시절부터 탐구했던 주제들을 가장 성공적으로 정의한다.
예를들어 <금붕어> 에서 여성의 모습은 더욱 관능적이 되고, <유딧Ⅰ> 과 <유딧 Ⅱ> 에서는 매혹적이고 구속을 거부하는 클림트적 ‘팜 파탈’의 유형이 구현된다. 3차원 장식에 대한 취향과 비잔틴 양식에 견줄만한 정교한 회화적 표현력은 <물뱀> 같은 신비로운 작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Judith and the Head of Holofernes.
연인을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고혹적 이미지가 드러나 있다. 살짝 들어올린 얼굴, 반쯤 감긴 유혹의 눈길, 주춤하게 벌어진 입술, 풀어헤쳐 가슴이 드러난 옷섶 등이 팜므파탈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을 “낡은 보석 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응축된 사악함”이라 표현했다.
Judith II
죽음과 성,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관계는 클림트와 프로이드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전체를 사로잡았던 주제였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클리템네스트라의 피에 젖은 욕망의 이야기는 대중을 오싹한 전율로 사로잡았다
<성녀에서 팜므 파탈로 변화해 가는 Judith>
유디트는 서양 미술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주제 중 하나였다. 주로 패덕과 욕망을 단죄하는 겸손과 순결, 믿음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한 기독교적인 미덕의 소재로 다루어지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살인과 폭력의 흥분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실제 19세기 중반부터 유디트는 원래 애국적이며 영웅적인 여자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The Return of Judith to Bethulia, 1472, Alessandro Botticelli (1445- 1510),
31 x 24,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화가. 보티첼리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이미 적장의 목을 베어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한 손엔 적장 홀로페레느스의 목을 베었을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하녀가 이고 있는 것은 적장의 목이고, 그녀의 손에는 적장을 취하게 만들었을 술병이 들려 있다. 유디트가 돌아가는 발 아래로 장군의 죽음에 놀란 앗시리아 병사들이 허둥지둥 패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살인의 장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1515, Vecellio Tiziano, (1490-1576)
89,5 x 73, Galleria Doria-Pamphili, Rome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를 보자.
원래 성서에 의하면 유디트의 하녀 아브라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받아 곡식자루에 넣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티치아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마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받아든 살로메의 구도로 보인다. 얼핏 보아서 드러나지 않은 적장의 목은 마치 유디트의 연인이 편안히 누워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디트의 하녀 역시 매우 어린 소녀로 나타나고 있으며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벤 당찬 여걸이라기 보다는 부끄러움에 살며시 고개를 숙인 순결한 처녀의 형상에 가깝다.
Judith Beheading Holofernes c.1598. Caravaggio (1571-1610)
145 x 195 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카라바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홀로페르네스는 편안히 잠들어 있다가 유디트의 불의의 일격을 당해 눈을 치켜뜨지만 이미 목은 절반이 잘려 나갔고, 피는 분수처럼 침대를 적시며 빠져나가는 그의 생명처럼 보인다. 그런데 적장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손을 보자. 적장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는 더러운 듯 한껏 몸을 뒤로 젖히고 있으며 칼을 쥔 손은 파리 한 마리도 잡아보지 않은 듯 보인다. 그녀를 뒤따라온 하녀 역시 매우 늙은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아무 하는 일없이 떨어지는 목을 냉큼 주워 담으려는 듯 포대를 들고 있다.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1-1612 Artemisia Gentileschi (1597-1651).
159 x 126 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 Naples
17세기에 이르러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진 유디트를 볼 수 있게 되는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의 작품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듯한 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생생함은 카라바조와 비교할 수도 없다. 유디트는 매우 건강한 팔뚝을 지닌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처럼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도 않다. 그녀는 매우 결연한 표정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털을 힘센 팔뚝으로 움겨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단단히 틀어잡고 있다. 성서에는 밖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된 하녀 역시 저항하는 적장의 양팔을 내리누른다.
[출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 유디트 (Judith)|작성자 불여우아빠]
Goldfish. 1901-1902. 181 x 66.5 cm.
Oil and gold on canvas. Swiss Institute for Art Research, Zurich, Switzerland
이 그림의 몽환적이고 도발적인 자세는 앞에서 언급한 빈 대학 천장화의 논쟁에 대해 클림트가 보여준 일종의 대응, 혹은 대답차원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1904년 드레스덴 살롱에서 클림트의 <금붕어> 는 당국의 매우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작센 왕자의 눈에 띠어 클림트가 처벌 받는 것을 우려한 당국은 결국 전시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화가 난 클림트는 대중 앞에 풍만한 엉덩이를 내보이며 목욕하는 여자의 포즈는 충분히 감동적이라며 작품의 제목을 <나의 비방자들에게> 로 바꾸려 했으나 다행히도 친구들이 이를 만류했다.
클림트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물 속을 표현했으며 나체의 세 여인은 물 속에 있는 '금붕어'들과 같이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비평가들에게 가장 모욕감을 주었을 법한 것은 맨 앞의, 조롱의 표정을 담은 여성이 자신의 엉덩이를 보는 이를 향하여 내밀고 있습니다. 아마 모욕감을 느끼라고 의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모욕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사실 언뜻 보면 모두가 되게 비웃음을 흘리고 있고 심지어 금붕어마저도 비웃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그의 예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면 클림트의 예술세계에 또다시 강렬한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후에 이는 프로이트의 '내제된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엉덩이를 통해 조롱의 뜻을 전한 클림트의 <금붕어 Goldfish>. 자신의 작품을 외설적이라 비난하는 비평가들을 향해 에로틱한 여성의 풍만한 엉덩이를 던져줌으로써 그 비난을 "반사"하며 조소하고 있습니다. -- (생략) -- [출처] 불여우아빠
1902년 5월에 요제프 호프만(1870-1956)과 콜로만 모저(1868-1918)는 빈 공방을 설립하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설립된 빈 공방은 재료의 존중, 구조의 간소화,
기능성을 기본 조건으로 삼아 분리파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예품의 생산과 기술자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가을에 빈 분리파는 그때까지 열린 클림트의 전시회 중 가장 대규모인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이 전시회는 분리파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열었는데,
이때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즈를 제작하였다. (프리즈란 벽의 띄 같은 것을 말한다.)
이 그림은 열광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회가 끝난 후 개인 수집가에게 매매되었다. (현재에는 다시 분리파 전시관에 있다)
또한 이 1902년의 분리파 전시회에 빈 대학 대강당을 위한 세가지 "학부" 그림이 최초로 다같이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당연히 그 그림들이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야 할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플뢰게 자매는 11월에 카사 피콜라 건물로 이사했고, 이듬해 그곳에 패션-하우스를 열었는데,
그 가구와 장식은 빈 공방에서 맡아 제작하였다. 그리고 에밀리의 마지막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전체 길이 : 34.14m, 높이 : 2.15m 회벽 위에 카세인, 금색물감, 검은색 및 다색 분필, 그라피티, 다중매체(유리, 진주, 금, 치장벽토)
Casein, gold pigment, black and colored chalk, graphite, stucco and various materials (glass, mother of pearl, gold) on plaster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가 끝나면 지워 없애기로 한 벽화였으므로 클림트는 싼 재료를 사용했다. 클림트는 격자로 된 나무 위에 바른 플래스터에 그리면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석 도금한 압정·거울조각·색유리 단추와 가짜 보석 등을 사용했다.
전시가 끝나는 대로 폐기처분 될 운명이었으나, 그 반향이 예상을 띄어넘자 미술품 수집가 칼 레닝하우스가 이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벽화들을 구입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시 한번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클림트의 영원한 예술동지인 에곤 쉴레의 노력으로 레더러 가족에게 모든 벽화들이 전임되었다. 당시 에곤 쉴레는 <베토벤 프리즈>야 말로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노력을 쏟아 <베토벤 프리즈>를 살려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인수하여 오랫동안 벨베데레 궁에 보관되었다가 오스트리아 정부는 1973년에 <베토벤 프리즈>를 제체시온 안의 원래 자리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고 10년이 넘는 정밀한 복원 작업 끝에 <베토벤 프리즈>는 1986년에 원래의 위치에서 다시 사람들에게 선을 보였다. (참고 : History of the Beethoven Frieze)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아르누보 상징주의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벽화의 주제는 Sickness(질병), Madness(광기), Wantonness(음란), Intemperance(무절제) 이러한 것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이 결국은 예술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행복의 환희를 부를 수 있다는 것....
Beethoven Skulptur, 1902 by Max Klinger
제체시온 건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했던 전시가 1902년의 분리파 전시였다. 제14회 분리파 전시회에서 독일의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상을 전시하기로 되어있었다. 그것은 분리파 회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새로운 예술 운동을 펼칠 그들에게는 그들을 대표할만한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로 하였다. 그럴 때 나타난 것이 바로 베토벤이었다.
물론 베토벤은 분리파를 알지도 못하고 이미 이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었으며 또한 미술가가 아니라 음악가였다. 하지만 시대에 항거하고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하였으며 세상에 홀로 우뚝 섰던 베토벤의 모습이야말로 분리파들의 정신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클링거의 작품 베토벤 상이 전시된다는 것을 기회로 이번 전시는 분리파의 정신을 만천하에 천명하는 일대 사건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베토벤 상이 전시될 방의 전실(前室)에 클림트는 베토벤을 기리는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것이 바로 전실의 높은 벽 중 세 면을 가득 채우는 전대미문의 걸작 벽화 ‘베토벤 프리즈’다.
클림트는 8년 동안 23회에 걸친 빈 분리파전을 이끌면서 일본화전, 인상파전 등 훌륭한 국외의 작품들을 소개하여 빈을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고,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미술의 씨를 뿌리는 데 기여하며, 이 같은 영향이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그 중에서도 1902년에 개최된 제14회 빈 분리파전은 분리파 사상 가장 중요한 전시회로 기록되고 있다.
21명의 미술가가 참여하고, 관람자의 수가 5만8천 명으로 여태까지의 분리파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 한 전시회에 5만8천 명이나 다녀갔다는 것은 빈 분리파의 위상, 더 나아가서는 클림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보여준다. 전시회의 특징은 각 미술가가 순수한 동기에서 자신의 미학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전시장 내부 디자인은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다. [불여우아빠]
클림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제4악장 중의 <환희의 송가> 부분을 벽화로 표현하였다.
즉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빛이여 오 세상에 입맞춤을 주리라”라는 유명한 가사와 음악을 형상화하였다.
이것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대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해석을 중심으로 클림트가 구성한 것이다.
左, 中, 右의 세 벽에 크게는 세가지, 작게는 다섯 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1. 행복을 향한 열망 (The Longing for Happiness)
베토벤 프리즈는 <행복을 향한 열망>으로 시작한다.
고통받고 있는 나약한 인류는 황금 갑옷을 입고 강력한 무기를 든 영웅에게 행복을 간청한다는 의미의 작품이다.
천사들이 음악으로 무장한 전사위에서 하늘 가득 흐르며 이 강인한 전사 베토벤을 위에서 격려하고 있다.
나약한 인류의 고통(The Suffering of Weak Humanity), 행복에 대한 열망을 간청, 강력한 무장 등을 묘사하고 있다.
황금빛 갑옷과 큰 칼로 완전 무장을 한 기사가 서 있고 배경에는 두 여인들이 있다.
기사의 뒤에 허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한 남녀 커플이 무릎을 꿇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다.
그 뒤에 또 한 명의 여인이 손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위로는 천사들이 하늘 가득 날고있다.
나약한 인간의 고통 1, 2 행복에 대한 열망을 간청 강력한 무장 Knight
2. 적대적인 힘 (The Hostile Powers)
The Beethoven Frieze "The Hostile Powers (적대적인 힘)" 가로 6.36 m 높이 2.15 m
적대 세력들
정면벽에 인류의 염원에 적대적인 세력이 등장한다. 거대한 고릴라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존재는 신들조차도 대항할 수 없었다는 타이푼 Typhoon (티폰 Typhon 그리스 신화 최강의 마왕으로 거친 폭풍들과 여러 괴물들의 아버지)이고, 타이푼 옆으로 각각 질병, 광기, 죽음을 상징하는 그의 세 딸 고르곤 (Gorgons - 스텐노, 에우뤼알레, 메두사)이 등장한다. 그리고 욕망, 음란, 무절제(폭식)가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 중간 부분의 세 여인들인데 그냥 보아도 그들의 눈빛이나 자세가 선정적이다.
그리고 가운데에 마르고 슬퍼하는 여인 뒤로 타이푼의 그늘과 타이푼의 털로 둘러싸여 있으며 뱀의 소용돌이가 갑옷과도 같이 두꺼운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간은 이 적대적 세상을 건너가야 행복의 땅에 도달할수 있다. 그리고 인류의 염원과 욕망이 그 적대적 힘들 위로, 그들 뒤에서 날고 있다.
타이푼의 딸들 Gorgons 정욕·음탕·무절제 통렬한 슬픔 1, 2
3. 온세상을 향한 키스 (The Kiss to The Whole World)
The Beethoven Frieze "The Kiss to The Whole World" 가로 13.78 m /높이 2.15 m
예술은 이상의 왕국으로 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곳에는 오직 순수한 환희, 행복, 그리고 순수한 사랑만이 존재합니다.
천사들이 합창합니다. "환희, 그대는 영원한 천국에서 광채를 발하는 구나.. 전 세계를 위한 키스와 함께."
이 부분이 <제 9 교향곡>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코러스를 시각화 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다른 두 벽면의 그림보다 입체감 있고 살아 숨쉬는 인물의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클라이맥스에 클림트작품의 특징이랄수 있는 그만의 화려한 금색과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던 '예술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또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여우아빠]
행복을 향한 염원은 '詩'를 통해 이루어진다. The Yearning for Happiness Finds for Fultilment in Poetry.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의 한 장면인 '시(詩)'에는 리라를 연주하는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고개를 파묻은 채 현악기의 울림에 푹 빠져 위로와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파라다이스의 천사들의 합창', ‘기쁨·가장 순수한 활기의 거룩하신 당신’, ‘전 세계를 위한 키스’ 등을 그렸다.
인간의 끊임없는 고통과 슬픔은 많은 것들로부터 나오고 또한 인간은 많은 유혹과 방해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시와 미술과 음악이다.
나약한 인간이지만 예술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하게 된다.
1902년 분리파 전시회 때에 베토벤 상과 베토벤 프리즈가 처음 공개 되던 날,
당시 빈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었던 구스타프 말러는 빈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주자 십여 명을 동반하여 이곳에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이 좁은 방에 섰다.
그리고 말러는 이 금관 앙상블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편곡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지휘하면서,
'베토벤 프리즈'의 공개를 기념하였다. 얼마나 역사적인 날이었을까? 그 날을 상상해본다. [빈숲속의 이야기]
● 1902년(14회) 분리파 전시회 당시 사진들 XIVth exhibition 1902
main hall with Beethoven statue by Max Klinger. 1902 |
view from the left-hand aisle to the main hall with Klinger’s Beethoven. 1902 |
Interior of Secession building on opening day. 1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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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Team for Beethoven Frieze. It’s easy to spot Gustav! |
Secession Exhibition Building, Vienna, 1898 |
Secession Exhibition Building, Vienna, 1898 |
around view in 1898 |
● Secession Exhibition Building
Secession building in Vienna in 1945
이 건물은 제2차 대전 때에 심각하게 파괴되었던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 Painting Human Desire For Happiness)
또한 분리파의 특징의 하나가 바로 문자를 장식에 이용하는 것인데, 디자인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 내용도 중요하다. 일종의 격문과 같은 것이다. 건물의 문 위에는 당당하게 금박으로 이렇게 적혀 있다.
베토벤 프리즈 (하얀첼로) / 클림트 전시회 리뷰 (김홍기의 패션제국) / Max Klinger, Statue of Beethoven, 1902
[빈숲속의 이야기] 제체시온(박종호의 예술노트) / GUSTAV KLIMT – DER BEETHOVENFRIES (고해상도 사진들) /
"This Kiss to the Whole World" / Secession Building (Secessionsgebaude) /
1903년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의 초기 기독교 모자이크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것이 그의 "황금빛 양식"에 반영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으로 치장한 장식화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아 그는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이른바 "황금 시대"를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클림트에게 있어서도 황금기였다.
그는 <다나에>, <세기의 세 여자>,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1904년 요제프 호프만과 빈 공방은 실업가 아돌프 슈토클레트의 주문으로 브뤼셀에 저택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클림트는 그 저택 식당에 설치할 대리석 벽화의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1905년 클림트는 학부 그림들을 완성했지만, 후원자의 도움을 얻어 비용을 지불하고 전시를 포기했다.
빈 분리파 회원들을 인상주의와 아르누보라는 서로 다른 양식으로 나누어 놓았던 오랜 의견 대립 끝에 아르누보 계열의 예술가들이 분리파를 떠났다.
1905년에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하고 <여자의 세 시기>를 완성한다.
뒤에 1911년 이 그림으로 '로마 국제 미술전'에서 금상을 수상한다.
Irrlichter (Will-O'-The Wisps). 1903, Oil on Canvas, 52 x 59.7 cm
이 그림은 도깨비불 이라는 뜻이 아마 가장 나을듯 싶군요.
미국의 모 소장가가 가지고 있으며 역시 공개하길 꺼리는 귀한 그림 입니다.
평면 공간을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뜨린 클림트의 입체적인 시각과 점묘법을 세밀하고 극대화시켜 상징주의를 빛나게 만든 걸작 입니다.
이그림을 보면 크게 문제가 되었던 빈 대학 강당의 벽화중 하나였던 Medicine에 나왔던 여인들이 또다시 등장 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그만큼 클림트의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그림이라는....
여성들이 수직으로 부유하는 동적인 모습의 상징주의 그림들을 그렸던 클림트인데 이 그림의 여성들 역시 위 아래로 흘러다니는 부유하고 있는 상태이나, 뭐랄까 여타 다른 부유하는 그림들과는 달리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정중동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멋진 그림.
출처: Gustav Klimt - Irrlichter (Will-O'-The Wisps)
Girl With Blue Veil. 1902
Hope I. 1903. 189.2 x 67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Canada
<희망1>은 인류의 희망은 임신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상징하고 있지만 그의 에로틱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서 미술사상 보기 드문 소재인 임산부를 주제로 대담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 속 임신한 여자는 부끄러움이 없이 붉은 머리카락과 음모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임신이라는 것은 섹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성적 암시입니다.
클림트는 이 작품에서 임신한 여성의 얼굴은 타락한 요부와 어머니의 모습을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데 배 위에 깍지를 낀 양손은 인류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죠. 그것은 결국 희망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인을 보여줌으로써 클림트는 완벽한 여성상, 생명과 육체의 찬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실적인 주제와 비현실적인 주제가 한 화면에 나타나는 클림트만의 구성 요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질병·죽음·빈곤·탄생할 생명 등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데 임신한 여성은 희망을, 여성 머리 뒤로 보이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모델이자 클림트의 정부였던 미치 짐머만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클림트는 그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 했고 모델들 가운데 마침 임신 중인 헤르마라는 여인을 발견하게 되죠. 임신한 헤르마는 모델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모델들과 성적 쾌락을 누리고 있었던 클림트는 모델비는 물론 그녀들의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에 가난한 임산부였던 그녀는 결국 클림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파격적인 포즈로 화폭 앞에 서게 된 것이죠.
이 작품이 주는 충격을 알고 있었던 클림트는 비난에 휩싸일 것을 우려해 실업가 프리츠 베른도르퍼에게 팔렸을 때 교회 제단화처럼 그림을 덮개로 가리라고 충고했을 정도였습니다. (생략) --
[출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 희망 (Hope)|작성자 불여우아빠
임신한 여자를 모델로 썼다는 것에 대해, 당시에 음란하고 관능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희망>은 가까스로 미술전시회에 전시되었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미치 침머만' 이라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클림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지만 아이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희망'이라는 작품이 탄생할 당시 미치는 그의 두번째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이 시기 클림트의 작품속에는 임산부의 모습이 자주 출현한다. 처녀들의 어떤 모습보다도 임산부가 옆으로 선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기도 했다고...
클림트에 있어 여성은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 여인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난다. 클림트의 작품세계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는 미치 침머만, 에밀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다.
Hope II. 1907-1908.
110.5 x 110.5cm. Oil and gold on canvas.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USA
추상적인 바탕에 가슴을 드러낸 임산부가 그려져 있습니다. 임산부의 옷은 화려하고 무늬는 추상적입니다. 아래쪽에 상념에 잠긴 듯한 여인 세 사람이 보이는데 화려한 무늬에 묻혀 그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임산부의 불룩한 배 위에 해골이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임산부와 해골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해골은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새로 태어날 아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아야 하므로 새로 태어날 아기라도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아이와 관련해 클림트는 큰 슬픔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들 오토가 태어난 이듬해 죽고 만 것이다.
죽은 아들의 얼굴을 섬세하게 스케치한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클림트는 아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죽음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람의 운명이지요. 클림트는 임산부 배 위에 해골을 그려 넣어 그 깨달음을 영원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작품에 특이하게도 ‘희망’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날 때부터 죽음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인간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 깨달음 속에 있는 사람은 주어진 날 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삽니다. 그렇게 사노라면 진정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가꿔갈 수 있지요. 삶도 죽음도 모두 고맙고 귀한 선물로 여기게 됩니다. 희망은 그런 감사하는 마음에서 피어납니다.
여자의 세 시기 (여인 삼 대)
The Three Ages of Woman, 1905 '여자의 세 시기'
180 x 180 cm, 로마 국립갤러리
고요히 눈을 감고 잠든 어린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 그녀는 마치 꿈꾸듯 세상을 향한 두 눈을 꼭 감은채 서 있습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늙은 여인 하나가 서 있습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듯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습니다. 마치 죽음이 바로 목전에 와 있는 사람처럼 말이죠. 늙음, 절망, 어둠,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으며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고스란히 한폭의 그림에 담아낸 이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은 이렇다고 합니다. 만성적인 질환에 시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삶에 대해서,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의 과정 흔적으로서 이 그림이 그려졌다고 합니다. --- 생략---- [출처] 불여우아빠
로댕의〈아름다웠던 투구제조사의 아내〉
1902년 오귀스트 로댕은 '베토벤 전시회'를 방문해 클림트의 '비극적이고도 거룩한' 프리즈에 찬사를 보냈다. 클림트 역시 〈철학〉에서 군상을 표현할 때 아래쪽에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절망하는 두 남자의 모티브를 로댕의 〈지옥의 문〉에서 차용하면서 로댕에 대한 찬사를 명확하게 표한 바 있다.
〈여성의 세 시기〉 역시 로댕의 〈아름다웠던 투구제조사의 아내〉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그림은 〈희망〉과 마찬가지로 인간, 운명, 시대, 그리고 여성의 중심적인 역할 등을 떠올리게 하면서 한편으로 우주의 무한함이나 남녀의 융합까지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녀의 결합 모티브를 동반한 생물학적 장식의 범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암시적인 모자이크와 색의 흐름 속에서 서로 융합된다. 당시의 사회는 죽음과 성을 카오스의 양상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금단의 것으로 배척했다.
이러한 사회와 대면한 클림트는 이 무렵무터 인간의 실존에 관한 궁극적인 답을 찾기 위해 험난한 탐구에 운명적인 발을 내디뎠다. 조르주 바타유에 의하면 진정한 예술은 필연적으로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도 물질의 횡포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나, 진리와 이념을 추구하는 노력을 상징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단순히 사면과 은총을 베푸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 정의의 왕국을 창조하도록 했던 것이 아니었을가 ? 그러나 제우스의 관대함을 갖추지 못했던 빈은 결코 클림트를 허용하지 않았다. [출처] The Three Ages of Woman|엽전
Portrait of Fritsa Reidler (1906) 프리차 리들러 부인
Oil on canvas, 153 x 133cm. O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
클림트의 ‘황금시대는 1906년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으로 시작해
1907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Ⅰ〉에서 절정에 달했다.
1906년 슈토클레트 저택을 보기 위해 브뤼셀로 여행했고, 이어 런던을 여행함.
최초의 사각형 초상화 제작. 클림트는 새로 설립한 화가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1907년 "학부 그림"이 완성되어 베를린에 전시되었고, 에곤 쉴레와 만남.
1908년 "클림트 그룹"은 쿤스트 쇼를 기획하였고, 여기서 다양한 유형의 아르누보 작품들이 54개의 전시실에 전시됨.
전시의 중심은 <키스>를 포함한 16점의 그림이 전시된 클림트의 전시실로서 이 그림은 현대 미술관에 팔림.
클림트의 도움으로 아직 신인이던 오스카 코코슈카도 그림을 전시할 수 있었다.
Watersnakes I (물뱀 I). 1904-1907.
50 x 20 cm. Watercolor and gold on parchment.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법을 걸어 바다 속 푸른 침실로 유인하는 인어는 유혹적인 창조물로 클림트가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다.
물 속에서 수초처럼 물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는 물의 정령들은 성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작은 화폭에 황금빛 머리카락과 상아빛 피부를 지닌 가녀린 두 육체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물뱀1"은 물의 여신을 가장 고혹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클림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값비싼 그림에 속하는 작품이다.
<물뱀 Ⅰ> (1904~1907) 에서 클림트는 인간의 형태를 섬세하게 미세화한 식물 모티프로 바꾸어 <금붕어>에 등장했던 아찔한 미녀를 다시 등장시킨다. 오래된 화려한 비단에서 잘라낸 것 같은 인물들은 장식적인 비늘과 꽃 같은 촉수, 그리고 황금색의 잔가지로 만들어진 융단에서 미끄러지듯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다.
Water Serpents II. 1904-07. 145 x 80cm, 개인 소장
<물뱀 Ⅰ>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물뱀 Ⅱ> 에서도 직사각형 틀이 사용되었지만 구성은 수평적이다.
젊은 여인들의 몸은 마치 알록달록한 꽃의 바다를 떠다니는 해초처럼 겹쳐지며 자유롭게 미끄러진다.
Farm Garden with Sunflowers, 1907. 110 x 110 cm. 벨데베레 박물관 [고화질 3462x3508px]
고흐의 해바라기는 화가에게 가장 중요했던 열정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광기와 죽음의 원인이 된 눈부신 태양을 상징한다.
그러나 클림트는 꽃을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그의 해바라기는 신비스러운 영적 기운의 상징이었다.
즉 ‘사랑의 요정’이 입은 가운처럼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Oil and gold on canvas 138 x 138 cm / Austrian Gallery, Vienna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빈 은행 연합의 총감독이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대표하는 7대 은행을 좌지우지하던 인물의 딸이었습니다. 아델레는 1899년 열 일곱 살 연상의 기업가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했는데, 불행히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아델레는 두번 유산했고, 세번째 아이도 태어난지 며칠 안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엇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나이 차이가 았었던 만큼 성적인 관계보다는 서로에 대한 높은 존중과 세심한 배려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페르디난트는 아내의 초상화를 빈의 이름난 화가 클림트에게 의뢰했습니다. 클림트는 페르디난트나 아델레의 부친 모리추바우어의 사회적 위치와 재력에 무척이나 합당한 초상화를 제작합니다. 이전에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화법을 구사했는데.. 바로 금을 사용한 것입니다. 온통 금박으로 장식된 바탕 위에 역시 금은 보석의 목걸이와 팔찌를 끼고 앉은 아델레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는데도 우수에 젖어 창백하기 그지없습니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두꺼운 목걸이나 금팔찌,드레스 등은 남편페르디난트가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장신구들은 이델레의 초상화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이로써 남편의 재력과 현대적인 취향을 더 과시할수 있었습니다.
황금의 연못에서 아델레가 수련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강렬한 매력을 지닌 존재로 모델을 표현했습니다.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진 부분은 아델레의 얼굴과 손, 어깨 부분이 전부입니다.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려진 부분은 그림의 면적으로 따지자면 전체의 1/12이 채 못 됩니다. 이렇게 작은 부분만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나머지는 장식적인 무늬와 패턴으로 처리해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실적인 처리가 극소화되었지만, 그래도 클림트는 그림에서 아델레의 개성적인 면모를 표현하는데 꽤 신경을 썼습니다. 섬세하면서도 여린 인상과 강한 자존심이 돋보이는 표정이 그렇게 표현되었습니다.
손의 처리도 매우 신경을 쓴 부분입니다. 아델레는 지금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런 포즈를 취한 것은 자신의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델레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해서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절단되는 손상을 입었습니다. 남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을 받아온 그녀지만, 이처럼 숨기고 싶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클림트는 거기에 자신의 따뜻한 시선을 얹어 매끄럽게 표현해 냈습니다. 그만큼 모델을 향한 화가의 애정이 드러나는 그림입니다. 2006년 에스티 로더 창업자의 아들 로널드 로더에게 1천3백50만 달러에 팔려 역사상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 그림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출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작성자 불여우아빠
〈유딧〉연작에 비해 아델레를 그녀의 모습 그대로 그린 초상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Ⅰ〉은 그래도 점잖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유딧〉에서도 볼 수 있는 깊고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가 여전히 고혹적이지만, 단정하고 반듯한 사교계 여성의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화려한 황금빛 배경의 구성으로 인해 마치 비잔틴 이콘화의 마돈나인 양, 혹은 다른 지고한 숭배대상인 양 그림은 영원한 광채로 빛난다. 클림트는 이 그림을 1900년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190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완성했다. ----생략----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만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을 듯... 클림트를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을 서줄만큼 그를 신봉했으며 꽤 오랜동안 육체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디트'와 '키스'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출처] G. Klimt -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엽전과캐더린
★ 2006년 7월, 외신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기록'이 경신됐었음을 긴급 타전했다. 그동안 최고가를 유지했던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을 가볍게 뛰어넘은 작품은 클림트의 1907년 作「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었다. 매매가는 놀랍게도 1억 3500만 달러 (한화로 약 1천 6백억원 정도..흐..)
Danae. 1907-1908. 77 x 83cm. Galerie Würthle, Vienna, Austria
<다나에>는 주피터(제우스)를 상징하는 쏟아지는 황금 빗줄기를 받아들이려고 몸을 도사리고 있다. 제우스와 다나에의 그 쾌락적 합일과 열락을 관능적으로 포착한 그림이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에로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황금빛 물결이 흘러내려와 끝나는 부분에 검은 사각형이 보이는데 이것은 클림트가 공공연하게 남성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형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황금물결로 변한 제우스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됩니다. 따라서 지금 다나에는 제우스와의 관계를 가지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영원의 황홀경에 빠져있는 여인이라....
이 얼마나 관능적이고 자극적이란 말인가...
[출처] 다나에(Danae)|작성자 불여우아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황금빛의 그 끝에
남자의 상징으로 그렸던 사각형이 그려져 있다.
'키스'이후 클림트는 더욱 대담해 졌다. 이 그림은 황금의 정액과 뒤섞인 황금비를 맞고있는 다나에의 절정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육감적이고 관능적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던 여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사이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가 다나에의 풍만한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들어가 그녀를 방문하는 장면이다.
태아처럼 웅크린 다나에의 자세만이 그녀가 이 기이한 성교로 영웅 페르세우스를 잉태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림속에는 신화적 배경이나 사건 전개를 지시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그림은 오직 신들의 신인 제우스의 정액, 인간의 그것과 달리 황금빛으로 빛나는 생명수를 다나에게 풍만한 넓적다리 사이로 받아들이고 있는 순간만을 클로즈업했다, 그래서일까? 황금빛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다나에의 도취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여인을 휘감는 유혹, 몸의 일부를 가리는 엷은 비단은 그녀가 온몸을 내던져 뛰어든 강렬한 쾌락의 물결처럼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다. 여인은 몸을 내 맡기고 꿈 같은 세계에 잠겨 드는데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감지한것일까? 신화속 여주인공이 완벽하게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며, 황금빛이 깊은 곳에서부터 출렁이며 솟아오르는 관능의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황홀경의 색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쯤되면 쾌락은 어떤 행위의 단순한 보상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경험이 된다. 아마 누구도 이토록 적나라한 장면에 이 만큼의 신성을 부여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신화적 소재와 금색 덕분이다, 장식과 금의 적절한 사용으로 자칫 잘못하면 퇴폐적인 느낌만을 줄 장면이 성스러움이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세속적인 관능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을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가 그림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나에>에는 성적 도취에 온몸을 내 던진 여자만 있다. 신화에 입각해서 보면 그녀의 도취가 제우스의 승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되겠지만 신화의 흔적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면 남자는 사라지고 오직 여자만 있는 성교 장면인데, 잘 찾아보면 제거된 남성의 흔적이 없는것도 아니다. 황금비 속에 숨겨진 사각형을 보라. 그녀의 허벅지가 끝나고 엉덩이가 시작하는 지점에 하얀 테두리로 강조된 사각형은 클림트의 수많은 다른 그림속에서 남성성의 상징으로 남자옷을 장식하던 것이다.
운명의 힘보다 강한 욕망의 굴레 (다나에와 관련된 전설)
2,024 x 1,960px
The Kiss. 1907-1908. 180 x 18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화려한 황금빛 색채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1908년 5월 쿤스트샤우 전시회에 이 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은 바로 이 작품을 구입하였습니다. 남녀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 신비의 그림은 지금도 수많은 연인들을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키스'는 국가적인 보물로써 그 가치가 어마어마해서 외국에서 전시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에 가야만 하지요. [출처] 키스 (Kiss)|작성자 불여우아빠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키스>(1907/1908)를 만났다. 금색을 배경으로 꽃들이 가득 핀 벼랑 끝에서 남자가 여자의 뺨에 입맞춤을 한다. 남자는 두 손으로 여자의 얼굴과 머리를 감싸 쥐고, 여자는 머리를 뒤로 젖혀 감흥에 몰입되어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볼은 부끄러운 홍조를 띠었다.
남자의 목덜미를 감은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은 절정의 순간을 감추듯 살짝 쥐어져 있으며 왼손 또한 그의 오른손을 영원히 놓치 않을 것처럼 붙잡고 있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맨발은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발끝까지 잔뜩 힘이 들어 있다.
두 사람 모두 황금빛의 화려한 가운을 둘렀는데 남자 옷에는 직사각형, 여자 옷에는 원형의 무늬를 그려 넣어 남성과 여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후광에는 가운보다 밝은 색으로 남성의 성기 형태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남성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라고 풀이한다. 즉 남성 성기 모양의 광채 안에서 젊은 남녀가 진한 화해의 키스를 나누고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화해뿐만 아니라 자신 속에서 잠재되어 있는 다른 성으로의 화해를 꾀하고 있다.
클림트는 예술가로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느라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사교계 여성들과는 플라토닉 러브만을 나누었으며 모델들과는 육체적인 사랑만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사후에 14건 이상의 유자녀 생계부양비 지금 청구소송이 제기돼 이 가운데 4건이 받아들여졌다는 기록도 있다.
모델들에게 금전적으로 무척 관대했으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꺼이 해결사 노릇을 했다. 그들에 대한 관대함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해소하거나 예술적 필요에 따라 온갖 관능적 표출의 요구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순수 에로티시즘이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키스>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인기 또한 하늘을 찌른다. 빈의 오스트리아 미술과(벨베데레궁) 소장으로 간간이 작품에 빠진 연인들이 그 앞에서 뜨거운 키스신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1903년에 매킨토시 부부가 베엔젠돌프 음악당을 위해서 그린 벽화<바람의 오페라>와 <바다의 오페라>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그리게 되었다. 자신과 정신적인 사랑만 하며 임종을 지켜준 연인 에밀리와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과, 여자 모델이 부유한 금융인의 아내로 정부였을 거라는 추측이 난무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라는 해석도 있다.
육체적 관계없이 정신적인 사랑만을 한 에밀리쪽 보다는 화폭에 담긴 화해의 의미가 너무 뜨겁게 느껴져 아델레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어머니로부터 정상적인 독립을 하지 못하고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심을 가진 그에게 남성과 여성의 화해는 가장 아름답고도 궁극적인 목표였다. 어느 쪽이 맞든 클림트는 개인적인 애욕의 차원을 넘어 모든 사랑과 화해의 이미지로 키스를 그렸을 것이다.
누군가와 이렇게 아름다운 화해의 키스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림 앞에서 한참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콩닥거리고 볼은 붉게 물들었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화해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져 버린 지금, 뜨거운 키스의 몸짓이 그리워진다.
- 노문정 <책과 인생> 2004년 9월
1909년 두 번째 쿤스트 쇼에서는 당대 유럽 회화에 대한 탐색이 행해졌다.
코코슈카의 그림뿐 아니라 에곤 쉴레의 그림도 포함되었던 이 전시는 클림트가 기획한 마지막 전시회였다.
가을에 그는 파리로 여행했고,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갔다.
클림트의 "황금 양식" 시기가 막을 내렸다.
크림트는 대표작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황금시대를 종료한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 새로 발표한 작품이 Judith II. 전형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최후의 순간까지 관능성과 장식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Judith II (Salomé) 1909,
Oil on canvas, (178 x 46 cm), Galleria d'Arte Moderne, Venice
클림트는 1909년 또 한 번 아델레를 모델로 <유디트2>를 제작했다. 세로로 긴 그림인데 이런 형식은 일본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극동적인 요소는 그의 서명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치 그림에 낙관을 채우듯 화면 왼쪽 하단에 금색 네모 안에 두 줄로 'GUSTAV KLIMT'가 새겨져 있다.
작품에서는 금색 바탕은 최대한 줄어들었지만, 좌우로 두껍게 짠 액자를 금색으로 칠해 여전히 '황금 양식'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에서와 같이 모자이크 형식이 나타난다.
가슴을 드러낸 유딧은 경직해 있는 듯 하지만, 옷자락을 쥔 손이나 흰색 곡선은 그녀가 춤을 추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왼손으로 목이 베어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다. 이렇게 춤을 춘다는 것은 세례 요한을 죽이기 위한 살로메에 관한 내용이지 유딧과는 상관이 없다.
완력으로 자신을 겁탈한 남자의 목을 벤 후, 그 머리를 들고 승리의 춤을 추는 유딧의 얼굴 표정을 보자. 두 눈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보이며, 손가락은 희열의 경련이라도 난 듯 잔뜩 구부러져 있다. 사실 아델레는 사고로 손가락 하나를 펼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곧잘 손가락을 모아 쥐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서양화에서 잘려진 남자의 얼굴과 칼을 든 여인의 그림에서는 그 주인공이 유딧인지 살로메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두 인물이 도덕적으로 서로 반대편에 서 있지만 클림트는 왜 살로메와 같은 일반적인 팜므 파탈을 그리면서 굳이 유딧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바로 유딧이 직접 행동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국심에서 비롯된 살인이지만, 얼마나 단호했으면 직접 대검으로 한 사내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 대목에서 유딧이 '치명적인 여인'이 된다. 그래서 유딧의 미덕인 정숙함과 높은 신앙심이 베일 뒤로 가려지고 마는 것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자신을 대상으로 그려진 두 점의 유딧 그림에 스스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들은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끌어가는 부유한 엘리트였으니까. 그녀는 그 외에도 클림트가 그린 <키스>의 여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주장했다고도 한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1925년 1월 24일 마흔넷의 나이로 남편보다 일찍 사망했다.
그녀는 매우 진보적인 여성이었지만, 당시 서양은 여자의 교육과 권리에 매우 인색했다. 그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지만 남자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재력이 풍부했던 그녀는 자신의 저택을 개방하여 문학과 예술, 정치계 명사들을 초대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배우며 스스로 깨우쳐가던 중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죽을 때 카톨릭의 전통적인 장례를 거부하고 화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며 자신이 소장한 클림트의 그림을 사회로 환언하겠다며 빈의 현대 갤러리에 기증했다.
- 홍진경 저,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 중
1910년 클림트는 제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했고, 프라하에서 독일의 화가연맹과 함께 전시했다.
슈토클레트 저택(Palace Stoclet)의 벽화를 위한 스케치를 완성하였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하였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더불어 그만의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말년에 찾아든 명성은 그의 호반 생활과 더불어 분명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무렵 수많은 풍경화들을 남겼는데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작품들이 이 무렵의 것들이다. 클림트는 모두 22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1/4이 풍경화이다. 대부분 클림트가 1900년에서 1916년까지 플리게 자매들과 함께 여름을 보냈던 오스트리아 북부의 아터 호숫가의 풍경을 담고 있다.
Seal for Gustav Klimt, 1907~09
Josef hoffmann이 클림트에게 선물한 도장이다. 금박을 살짝 입힌 은과 공작석으로 만든 이 도장은
호프만의 디자인과 비엔나 워크샵의 세공술의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군데 군데 벗겨진 금박에서 클림트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하다.
1905년에 착공해 1911년에 완성한 스토클렛 저택(벨기에의 브뤼셀 소재)은 건축가 요세프 호프만의 대표작이다.
그는 클림트에게 저택의 식당을 장식할 모자이크 장식화를 의뢰하였고, 이 그림은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클림트는 후원자의 풍부한 재정 덕분에 값비싼 재료를 이용하여 모자이크를 완성했다.
1910년 유리, 산호, 자개, 준보석 등을 사용한 클림트의 모자이크 도안이 완성되었고, 빈 공방이 이를 제작하였다.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상적 표현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클림트 회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Palais Stocklet, Brussels, Belgium. A collaboration between Josef Hoffman and Gustav Klimt
클림트가 금융 재벌 스토클렛의 다이닝룸에 거대하고 몽환적인 '생명의 나무'를 금빛으로 벽에 그려넣었다. 한 가정의 강복을 기원하며..
나선형으로 퍼져나가는 중앙 부분의 나무가 아주 인상적인데 이 나무를 흔히 '생명의 나무'라고 부른다. 소용돌이 치는 나뭇가지는 고대 신화에서 유래된 상징으로 생명의 연속성, 삶의 보편적인 순환을 의미한다고 하며 유리, 자개, 산호 등으로 모자이크 장식되어 아주 화려하다. 브뤼셀에 있는 이 스토클렛 저택은 클림트의 내부벽화로 유명하지만, 사유재산이라 관람이 불가하다.
Stoclet House, Brussels, Belgium
UNESCO world heritage
'美의 상아탑' 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스토클렛 저택을 신축할 때 클림트는 식당의 벽면에 '생명의 나무'를 모티브로 한 "스토클렛 프리즈"를 제작하였습니다. 이 생명수는 창세기에서 에덴 동산의 '선악과 나무' 바로 옆에 있던 나무로 요한 묵시록에 의하면 이교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합니다.
"스토클렛 프리즈"의 '생명의 나무'아래에는 연인 뿐만 아니라 이집트풍의 무희도 있습니다. '기다림'을 은유하는 무희는 춤을 추면서 생명의 나무와 융합하고 있습니다. 생명수 아래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깊이 '포옹'하고 있습니다. '충만'은 이 아름다운 장식 벽화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그렸던 클림트의 작품들과는 어떠한 연관성을 찾기는 힘듭니다. 그의 초기작품을 보면 고전주의 화풍의 영향으로 신화적인 요소를 그림의 주제로 많이 사용했는데, 유독 이 그림에서는 스토리보다는 장식성에 치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에는 철학과 고대의 신화에 뿌리를 둔 요소들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지하세계 사이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림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부분은 바로 소용돌이치는 나뭇가지의 모습입니다. 소용돌이치는 나뭇가지는 고대 신화에서 유래된 상징입니다. 생명의 영속성을 의미하지요.
이 특이한 나뭇가지는 나선형으로 돌며 기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꼬여 있는 듯 어지럽게 빙빙 도는 나뭇가지는 '인생의 복잡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긴 나뭇가지들은 빙빙 돌면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의 뿌리는 단단하게 땅에 결속되어 있습니다. 신화 속 하늘과 땅의 연결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이 나무는 '윤회'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며 죽은 후 다시 땅으로 돌아가 태어난다는 미신은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 여러 신화나 종교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염원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줄 수 있었던 신념이지요.
이 생명의 나무는 여성상과 남성상의 조화를 표현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남성의 미덕에 대해서만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생명의 자양분이나 보살핌, 성장은 여성상에 가깝고 나무는 남근상의 표현이라 볼 수 있으며 이 둘의 결합이 생명을 탄생하게 한다는 주장도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나무의 가운데 부분에 검은 새가 앉아 있는 모습도 발견하셨을텐데요. 검은 새는 많은 문화권에서 죽음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생명의 시작이 있다면 그와 동시에 끝도 있음을 지각하게 해 주는 요소입니다.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소용돌이치는 나뭇가지들은 생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보며 한참을 바라보게 합니다. [출처 : 불여우 아빠]
View of the dinnig room (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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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ctation (기다림) 유일하게 얼굴과 손이 구상적으로 표현됐는데, 생명의 나무에 휘감겨 있는 여인은 고대 이집트의 벽화처럼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고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이집트 풍의 인물과 추상화풍의 배경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고 있는 작품이다. |
Tree of Life (생명의 나무)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상적 표현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클림트 회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
Fulfilment (성취) 아홉면의 벽화는 양식화된 모티프인 '생명의 나무'와 추상적, 구상적 모티프인 '기다림'과 '성취' 가 혼합되어 있는데, 따라서 '기다림'을 설명할 때, '성취'를 빼놓을 수 없다. |
End of Wall 스토클레 저택 식당의 중앙 좁은 벽면에 있는 작품이다. 상징주의에서 추상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Embrace (포옹) <기다림>의 맞은편에 있는 작품이며 전체적으로 동양풍의 의상은 클림트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잔틴 취향을 짙게 나타내고 있다. |
● 오스트리아 응용미술관 MAK (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s)에 전시되어 있는 스토클렛 저택 식당의 벽화 초안
Nine Cartoons for the Execution of a Frieze for the Dining Room of Stoclet House in Brussels
1905-1909 Mixed Media 193.5 x 115 cm, 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s, Vienna, Austria
위 사진들은 구글아트에서 이 초안을 캡쳐한 것으로 스케치와 구상을 위한 메모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보석과 산호 유리같은 값비싼 재료들을 이용하여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레플리카로 본 호화스러움만으로도 놀라울 뿐입니다.
Avenue of Schloss Kammer Park. 1912. 110 x 110cm 벨데베레 박물관
햇살을 가득 머금은 싱싱한 푸른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있고, 녹음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고흐에게 영향을 받은 듯한 붓질과 밝고 화사한 색채가 충만합니다.
환희로 가득한 이 그림은 클림트가 말년에 사돈지간인 열두 살 연하의 에밀리 플뢰게와 정신적 동반자로
지내면서 그린 작품입니다. 그는 플뢰게와 번잡한 빈을 벗어나 아터제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며
평온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Adele Bloch-Bauer II. 1912. 190 x 120 cm. Private collection
클림트와 같이 했던 Adele Bloch-Bauer의 첫 번째 작품 속에서 그녀는 앉아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속의 그녀는 서 있다. 그리고 전작이 전성기와 비잔틴 미술이 강하게 들어간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배경으로 존재하는 기마병사와 사람들의 의복 그리고 가옥의 모습 등이 모두 동양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클림트는 배경을 색에 따라서 자주색, 붉은색, 분홍색과 초록색으로 나누었으며 분리된 배경들 속에서 사람과 꽃을 분리하여 그려 넣었다.
첫 번째 작품과의 시간의 간극이 5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한 미술사학자는 이 그림을 통해서 관람자에게 보여주는 변화를 ‘경의에 찬 시작’이라고 말하였다. ‘경의에 찬 시작’이라는 것은 클림트가 이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초상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회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집트 신관의 모습을 본뜬 구성이나 그림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 동안 클림트의 작품세계에 항상 존재해 왔던 환상적 이미지와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섬세하고 생기있는 여인의 모습을 우아하게 창조하고 있다. 턱까지 올라오는 긴 원피스 드레스가 상체를 더울 길게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깃털 달린 커다란 검은 모자와 함께 긴 보아형의 테두리를 한 푸른색 모피 장식의 솔은 격조 높은 멋을 유동적인 곡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의상은 기능적인 측면보다 순수하게 미적 감각과 장식적인 측면이 강조된 개량의상이라 할 수 있다.
클림트는 이 초상에서 에로티시즘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있다. 풋풋한 소녀와 같은 이미지로 아델레를 기억하려는 클림트의 의지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출처] Gustav Klimt - Adele Bloch Bauer(아델레 바우어) : 팜므 파탈로 구현된 연인
Mäda Primavesi (1903–2000), 1912, oil on canvas, 110.5 x 149.9cm ,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Virgins (Die Jungfrau) 처녀 1912-13, 유채, 190x 200cm, 프라하, 나로드니 미술관
<처녀>는 잠재적 성욕을 내포하는 여인들을 포착하고 있다, 라고 평론에 되어 있다.
1911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 미술전에 참가하였고, <죽음과 삶>으로 일등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실이 헐리게 됨에 따라 빈 13구역의 Feldm hlgasse에 새로운 작업실을 얻었다.
1912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미술 대전에 참가하였다. 에곤 쉴레는 자화상을 그렸고, 클림트는 <은둔자>를 전시했다.
Arpad Weixlg rtner가 클림트에 대한 장문의 글을 썼고, 잡지 <> 35호에 실렸다.
1913년 부다페스트, 뮌헨, 만하임 등지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함.
1914년 브뤼셀로 가서 슈토클레트 저택의 벽화가 완성된 것을 직접 봄.
거기서 콩고 미술관을 방문하였고, 원시 조각에 강한 인상을 받음.
말년의 그는 1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낮에는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아터호반에서 에밀리 플뢰게와 함께
1915년 바르바라 플뢰게의 초상화를 그림.
1916년 쉴레, 코코슈카, Faistauer와 함께 베를린 분리파 전시관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전시회에 참가.
1917년 뮌헨과 빈 순수미술원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됨.
Portrait of Eugenia Primavesi. 1913. oil on canvas, 140 x 85cm, Toyota Municipal Museum of Art
Death and Life, 1916, Oil on canvas, 178 x 198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적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1908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 뒤에는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으며 1912년에는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 등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죽음과 삶 (Death and Life)
클림트는 1908년부터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16년에 완성하게 됩니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은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왼쪽은 어두운 쪽이고 오른쪽은 다채롭습니다.
왼쪽에 어두운 쪽에는 보란 듯이 죽음의 사신이 자리하며 기분 나쁜 미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죽음의 사신은 좋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목의 표현 그대로 '죽음'을 상징하겠지요. 사신의 옷을 보니 십자가로 가득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십자가가 아닌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동묘지의 십자가들은 종교적인 의미가 느껴지기보다는 섬뜩한 느낌이 강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저는 섬뜩함 이외의 것도 보였습니다. 사신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흩어보실까요? 흔히들 이런 걸 '잘 빠진 라인(?)'이라고 하지요.. 그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클림트는 모든 것을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섬뜩하게 묘사되어야 할 죽음의 사신에게까지 아름다움을 부여했습니다. 물론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신의 부드러운 윤곽과 굴곡은 나름 신경쓰여진 것 같습니다.
제목 그대로 왼쪽이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면 오른쪽은 당연히 '삶'을 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두운 톤의 배경 속의 순색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마치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효과를 줍니다. 둥글고 부드러운 윤곽도 그 효과에 한 몫하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가장 상단에 보시면 아기와 아기를 팔로 감싸고 있는 여성이 보이는데 삶의 시작인 생명 탄생의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변을 잘 둘러보시면 삶의 마지막 부분인 노년기의 모습도 보입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 뒤로 침울함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여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한 남성도 매우 돋보입니다. 근육질의 남자는 여자를 감싸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말 못할 아픔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표현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시선이 집중되는 부분은 바로 사신의 시선이었습니다. 호시탐탐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죽음으로 데려가기를 노리고 있는 사신의 모습은 섬뜩합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안전할 수 없습니다. 방금 태어난 새로운 생명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신은 방금 태어난 생명에게 으시시한 미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생명이라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미 죽음이라는 기회도 동시에 기다리고 있는 법이지요. 어린아이에게든 노인에게든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든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아름다울 줄만 알았던 이 그림이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깨워주었네요.
삶이라는 것이 이 색처럼 아름답기도 한 것이지만 왼쪽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조심만 한다면 불청객을 빨리 맞이할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죽음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는 인생. 그것이 더욱더 인생에 대해 감사하고 열심히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이 뒤엉켜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처] 불여우아빠
Portrait of Friederike Maria Beer, 1916. oil on canvas, 168 x 130cm, Tel Aviv Museum of Art
Girlfriends or Two Women Friends 1916–17, 99 × 99 cm , Welz [de]. Later destroyed
클림트는 여성을 그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이미 〈물뱀〉에서 묘사한 동생애적 요소처럼 여성끼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성을 그릴 때는 단지 필요한 경우에만 마지못해 그린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Leda (30" x 30") / FRAMED (33" x 33") Original 1917,
Destroyed in 1945 fire at IMMENDORF PALACE
레다는 아이톨리아의 공주로 태어나 스파르자 왕의 왕비가 된 여인으로
다나에와 마찬가지로 제우스의 변덕스런 사랑을 받게 된다.
제우스는 아내 헤라의 질투가 두려워 백조로 변신해서 레다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 후 레다가 낳은 백조의 알에서 헬레네를 비롯한 네 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레다>는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벌거벗은 몸으로 엎드린 채 엉덩이를 쭉 빼고 있는 여인의 자세도 그렇고,
이 그림에서는 흑조로 그려진 백조의 목 부분만,
그것도 레다의 엉덩이 쪽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클림트의 황금빛 유혹-신성림-내용중에서>
Baby-cradle, 요람 1917-1918 사진출처: fineartamerica
Gustav Klimt in Blue Painter's Coat
by Egon Schiele 잠옷 같은 푸른색 통옷을 걸치고 작업했다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한 해 앞둔 1918년 전유럽을 강타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바로 얼마전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던 클림트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1월 11일 발작을 일으킨 후 회복되지 못하고 비엔나의 자택에서 2월 6일 사망, Hietzing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비엔나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도,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실레도 갔다.
그의 작업실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미완성 유작으로 <유람>,<신부>,<아담과 이브> 등을 남겼다.
클림트 사후에 그의 재산은 클림트 자매와 에밀리 플뢰게에게 나누어졌다.
에밀리는 클림트가 그녀에게 부친 편지들을 대다수 태워버렸다고 한다.
1938년 플뢰게의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여 클림트의 스케치북 50권이 소멸되었다.
미완성 작품은 클림트 말기 작업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전까지 보이던 금의 사용을, 존경했던 보나르나 마티스를 떠올리게 하는 생생한 색채로 대체했다.
한편 위에서 내려다 본 것 같은 피라미드와 만화경적 구도는 일본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주제는 여전히 에로스와 삶의 순환을 다루고 있지만 더 이상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나 불쾌한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부채를 든 여인 (Dame it Fächer), 100 x 100 cm, 캔버스에 오일
1917~1918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부드러운 순백색 피부가 배경의 몽환적인 동식물 세계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화려한 장식은 마지막까지 클림트의 작품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The Bride (unfinished) 1917-18 신부
〈신부〉는 에곤 실레의 영향이 드러나는 후기 작품인데 클림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장식 모티프의 범람은 이전만큼 힘이 넘치지는 않지만 캔버스를 기하학적으로 구조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묘사한 인물의 혼란은 추상적 요소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이 후기작들은 분석하기가 점점 어려운데, 그 이유는 인물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간파할 수 없게 작품이 미완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신부〉에서 남성의 얼굴은 구성상 부차적 중요성만을 갖는다. 이 작품은 이미 다른 작품에서 표현되었던 일련의 모티프와 개념들의 총체로, 클림트의 예술적 고백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꿈꾸는 얼굴은〈죽음과 삶〉, 〈처녀〉를 연상시킨다. 작품 왼쪽 아래의 누드는〈금붕어〉를 인용한 반면, 왼쪽 아기의 얼굴은〈요람〉의 아기 얼굴과 흡사하다.
반면 도바이에 따르면 신부 자신이 가진 몽환적 이미지의 화신인 오른쪽 인물은 참신하다. 준비 단계의 작업은 클림트가 자웅동체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작업하면서 그는 오히려 자웅동체를 암시하는 남근 모티프를 치마에 남기면서도 여성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아직 미분화된 총체적 에로스의 초기 단계를 보여준다. 자웅동체는 프로이드의 가설에서 아동 성장의 첫 단계에서 성취한 욕망, 혹은 상반되는 양극 통합의 구현이다. [출처: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Adam and Eva (unfinished) 1917-1918 Oil on canvas, 175 x 60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에서 남성인 아담은 흑빛으로 질려 있고, 생기발랄한 이브 뒤에 숨어 있다. 아담이 마치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반면에 이브는 마치 볼테면 맘껏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 당시의 여성들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담과 이브"는 그의 미완성작이자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그림을 잘 보시면 느낄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 나온 아담과 이브의 이미지에 화가의 이브에 대한 팜므파탈적인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두운 배경만큼이나 어두운 아담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금발의 머릿결과 아담에게는 무언가를 감추는 듯한 이브의 표정, 붉은 입술, 그리고 꽃과 표범 장식 등... 이 작품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가 성경을 읽고 느낀 아담과 이브의 모습일 뿐이니까요.
이브는 순수와 관능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갑니다. 묘하게 에로틱하고 퇴폐적인 향기를 뿜어낸다고 할까요. 어둠을 배경으로 서있는 아름다운 이브. 눈부시게 하얀 피부, 길게 늘어뜨린 매혹적인 금발, 붉게 상기된 뺨, 발그레한 입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숙한 여인의 몸은 아네모네 꽃보다 더 매혹적입니다. 그녀는 심지어 나신인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란 듯이 당당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냅니다.
아직 부끄러움이 뭔지, 쾌락이 뭔지도 모르는 여인. 그런 이브를 보며 당황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림트의 이브 역시 팜므파탈의 전형입니다. 특히 우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저 도발적인 눈동자는 그녀의 파괴적인 속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반면 아담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눈을 감고 있는 남자, 그의 몸을 거의 다 가리며... 그는 마치 설익은 소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중년의 남성처럼 보입니다. 여인의 향기에 취한 그는 완전히 이브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신을 드러내고 서 있는 여자. 여자의 발 아래 아네모네 꽃들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꽃은 순결과 죄를 동시에 상징하죠. 이브에게 어울리는 상징입니다. 이브는 팜프파탈입니다. 남자를 타락시킬 정도로 사악하지만 매혹적인 여인이죠. 그러나 뱀을 만나기 전의 이브는 순수한 여인의 전형이었습니다. 클림트의 이브가 지닌 모습입니다.
정점과 선의 승리를 대변하는 존재였던 이스라엘의 여자 영웅 유디트를 팜므 파탈의 전형으로 만들었던 클림트가 정작 팜므파탈의 원조 격인 이브를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클림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작품으로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미완성에도 불구하고 순수와 퇴폐, 쾌락과 죽음, 관능과 고독의 공존과 그 긴장을 탁월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출처] 아담과 이브 (Adam and Eva) <미완성작>|작성자 불여우아빠
요한나 슈타우데의 초상 (Portrait of Johanna Staude), 1918, (unfinished). 70 x 50 cm, Belvedere
This portrait of Johanna Staude, which remained unfinished, was painted in 1917/8 and is one of the very last portraits Klimt ever produced. In this late stage of his career, portraits and landscapes play an ever-greater role, while allegorical themes recede noticeably into the background.
마치며......
클림트가 사망한후.. 그의 기법을 추종하는 문파가 생기지 않았고..
그가 생존했을때는 염쇄적이고 퇴폐적인.. 문란한 작품이라고까지 비판받았던.. 그의 화법이
미술사적 입장에서 그리 대단하게 전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대단한 사랑을 받고있는 것을 보면..
현대의 클림트는 분명 환영받고 있다.
그가 살았던 오스트리아는 그의 작품 덕을 톡톡히 보고 있을 뿐더러,
그의 그림들은 여러 패션 디자인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또한 그의 그림은 카페나 술집 등에 그 모조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문구류에도 등장하고 있다.
마치는 글은 제 스스로 써보고 싶었는데 이마저도 표현력이 잼병이라 쉽지가 앉네요 ㅠㅠ
이 마치는 글도 인터넷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인데 그 출처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표현하셨는지... 존경스럽습니다.
공부하는 셈 치고 클림트의 정리를 시작했는데... 정말 엄청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네요..
추가로 클림트의 풍경화와 초상화도 정리할 계획입니다..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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