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관련 자료들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 김홍도의 금강산 여행과 금강사군첩
■ 김홍도의 풍속화와 배경
■ 김홍도의 춘화도 - 운우도첩(雲雨圖帖)
■ 도화서와 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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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는 중인이었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근간으로 하여 조선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스러운 성리학은 뿌리 깊은 정착으로 인해 중인이 신분상승하기에는 힘든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단원도 화선(畫仙)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벼슬을 하고픈 인간적인 욕망은 누구나 같은 감정이었던 같다. 중인출신인 화원이 벼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는 임금님의 초상인 어진을 그리는 일이다.
단원도 세 차례에 걸쳐 어진을 그리는 기회를 가졌다.
첫 번째는 1773년(29세) 1월에 영조 어진과 정조 왕세손 때의 초상을 도사(圖寫)하는 작업에 동참화사로 참여했다. 당시 주관화사는 고양이를 잘 그리는 변상벽이었고, 그 다음 동참화사가 김홍도, 수종화사로는 신한평(혜원 신윤복의 父),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 등이 선발되었다. 그 포상으로 사포서별제로 임명되었다. 사포서는 궁궐의 밭과 채소의 경영을 관장하는 곳으로, 별제는 정6품의 사포 다음으로 종6품의 벼슬이다.
두 번째는 1781년(37세) 8월에 정조의 어진을 도사하고 영조의 팔십세 어진을 모사(模寫)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1783년 12월에 안기역의 찰방으로 임명되었다.
세 번째는 1791년(47세) 9월에 정조의 어진 작업에 동참화사로 일한 덕분에 그해 12월에 괴산 연풍현의 현감으로 제수되었다.
단원이 양반으로서 본격적인 벼슬생활을 한다는 마음이 든 것은 지방에 근무한 안기찰방시절부터인 것 같다. 단원이 찰방으로 근무한 안기역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시 안기동 언덕 바로 밑에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서·화에 음악에 조회가 깊었던 단원 김홍도는 풍류가 가득했던 인물이었던 같다.
1784년 8월 경상좌도의 명산인 청량산에서 경상감사 이병모를 중심으로 흥해군수인 성대중과 인근의 지방 수령들과 함께 모인 아집(雅集)에 참여했다. 이때 김홍도는 달 밝은 밤에 바위 위에 앉아 퉁소를 불었다. 단원이 악기를 즐겨 연주했다는 사실은 당시 기록이나 단원의 그림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달 밝은 밤이면 김홍도의 가슴은 흥취로 가득해진다. 나도 단원의 그 마음을 조금 알 수 있다. 유리창으로 비친 둥근달이 잠을 못 자게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 처절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를 늘 곁에서 지켜보았던 강세황은 김홍도의 용모가 아름답고 뜻이 맑다고 하며 성품에 대해 “음악을 좋아하여 매번 꽃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때로 한두 곡을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고 한다. 그 기예가 바로 옛사람을 따를 뿐 아니라 풍속이 뛰어나 진나라, 송나라의 고사와 같다”라고 평했다.
출처: 단원 김홍도/오주석, 안산시사. 2차출처 : 조촐한 풍류모임 김홍도의 “단원도(檀園圖)”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본관은 김해이며, 호는 단원(檀園)이다.
예로부터 안산은 문화적 토양이 매우 비옥했던 고장이었다. 18세기 영·정조시대에 이곳은 학문과 예술의 향훈(香薰)으로 가득차 있었다. 첨성촌(현재의 일동)에는 실학의 거목인 성호 이익이, 북쪽의 부곡동에는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던 표암 강세황이 계셨다.
김홍도는 7∼8 세부터 20여세까지 이곳 안산에서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 선생으로부터 그림과 글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주었던 단원 김홍도는 후에 어진화가(御嗔畵家)로 대성하여 그 명성을 전국에 떨쳤던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이름이 드높다.
김홍도는 풍속화를 잘 그리기로 일반에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남종화, 평생도, 신선도, 풍속화, 진경산수, 초상화 등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그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김홍도의 산수화 배경은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운치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과 함께 우리 산수풍속(山水風俗)의 서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그가 44세 되던 해에 정조의 명을 받고 복헌 김웅황과 함께 금강산에 있는 4개군의 풍경을 그린 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독자적인 산수화를 확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김홍도가 실제 경관을 사생(寫生)한 것이 금강산 사군첩(四郡帖)인데 여기에서 우리나라 화강암 돌산과 소나무가 있는 토산을 표현하는 적절한 묘사법을 터득하여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모습을 경쾌하게 묘사한 수지법(樹枝法)이 완성되었다.
그의 산수화는 여백을 적절히 남기면서 대상을 압축하는 밀도있는 구도법과 형상을 집약해서 표현해 내는 묘사력, 그리고 운치있는 운염법 등으로 김홍도의 산수화는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가 하나로 만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이룩한 속화(俗畵) 양식은 같은 시대의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후배들이 그대로 추종하여 그의 아들인 긍원 김양기, 임당 백은배, 혜산 유숙, 시산 유운홍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승 벼슬자리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삼공불환도(三公不煥圖)와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가 가득찬 25면으로 구성된 풍속화첩(風俗畵帖), 말을 타고 가다가 꾀꼬리 소리에 멈추었다는 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 등이 있다.
안산에서 자라며 화가로서의 기틀을 닦은 김홍도
조선시대의 화가, 아니 우리나라 전시대의 화가들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단원 김홍도가 첫손가락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수많은 뛰어난 화가들이 활약하였다. 신라의 솔거(率居), 고려의 이녕(李寧, 12세기 전반과 중엽 활약), 조선 시대의 안견(安堅, c.1400~1470년경), 정선(鄭敾, 1676~1759), 장승업(張承業, 1843~1897)등 大家들만 해도 상당하다.
조선시대의 경우 안견, 정선, 김홍도, 장승업을 四大家로 꼽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들은 각각 독특한 예술적 성취와 업적을 지니고 있어 어느 한 사람을 최고로 추켜 올리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화가들 중에서 단연 김홍도를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화가로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작품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들이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조선 초기의 안견과 그 이전의 화가들의 경우 남아 있는 작품이 아예 없거나 아주 드물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라 해도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김홍도의 경우 작품세계가 아주 다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김홍도는 산수화, 화조영모화, 인물화 등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無所不爲의 기량을 발휘했다.
조선 후기에 김홍도보다 약간 앞서 명성을 떨쳤던 겸재 정선의 경우 주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長技였다. 그래서 정선은 그 회화적 성취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김홍도 만큼 많은 분야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의 장승업의 경우에는 작품세계가 다양하지만 김홍도처럼 서민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근한 국민적 화가인 김홍도는 경기도 安山에서 자라나며 대화가로서의 기틀을 닦아 나갔다. 안산이 이처럼 조선후기 최대의 화가 김홍도가 성장하는 배경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8세기 당시 안산은 노론(老論)과 이 당쟁에서 피해 물러난 남인(南人)과 소북(小北)계 문인, 학자들의 중요한 활동처였다.
우리나라 실학자 중 유명한 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조카이자 당시 문단의 거장인 이용휴(李用休, 1708~1782),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허필(許?, 1709~1768), 강세황의 처남이자 안산 문화계의 구심점이 되었던 진주 유씨 유경종(柳慶種, 1714~1784)과 그의 수많은 친구들이 당시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유경종은 조부인 이조판서 유명현(柳命賢, 1643~1703)의 고향집을 물려받아 오교장(午橋莊)을 마련하여 안산 문화계의 사랑방을 제공하였다(지금의 부곡동). 현재의 정재초등학교도 진주 유씨 후손들이 그 부지를 정부에 기증하여 건립된 것으로 유명현의 호이다.
어쨌든 유경종의 오교장에 드나들었던 많은 인물들 중에는 유명한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시인 신광수(申光洙, 1712~1775), 正祖代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정치인 목만중(睦萬中, 1727~?) 등 유명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홍도는 이처럼 풍성한 안산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로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스승 강세황과 이용휴가 있었으며, 이들은 안산 문화계의 핵심 인사들이었던 것이다.
김홍도의 폭넓은 회화세계는 풍속화(風俗畵)와 신선도(神仙圖 ⇒ 道釋人物畵), 고사도(故事圖 ) 등의 인물화, 다양하고 많은 소재를 포괄하는 화조화, 동물화, 진경산수화와 관념적인 산수화 등 너무나 다양하다.
이들 중 풍속화나 신선도 한 가지 분야만 해도 아주 큰 회화적 성취와 그에 따른 풍성한 미술사적, 문화사적 맥락을 짚어 볼 수 있다. 고사도나 화조화, 진경산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김홍도의 폭넓은 회화세계를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열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그것보다는 김홍도의 회화적 성취 중에서도 중요한 한가지 주제-금강산도에 대해서 그것이 그려진 경위와 회화적 특징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작품세계
* 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은 현재 200여 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의 변화는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에는 전기에는 원체화적(院體畵的) 경향을 띤 정형산수를 많이 그렸는데, 1778년 작인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6폭병풍과 선면화(扇面畵) 등에 잘 나타난다.
50세 이후의 후기에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檀園法)이라 불리는 보다 개성이 강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후기 산수화풍은 석법(石法)과 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고도의 회화감각으로 처리된 탁월한 공간구성과 변형된 하엽준(荷葉),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먹선의 강조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등을 통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화조 등을 그려넣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다. 도석인물은 전기에는 주로 신선도를 많이 그렸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소방하면서 농익은 필치로 바뀌게 된다.
김홍도의 회화사적 비중을 한결 높여주고 있는 분야는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광경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있는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했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나란히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당시 속화체(俗畵體)로도 불렸던 그의 풍속화풍은 현실적인 소재를 소박한 생활정서와 풍류적 감성이 가미된 생동감 넘치는 기법으로 창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평가 및 영향>
홍백화(洪白華)의 글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활달해서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한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김홍도가 이룩했던 한국적 감각의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화 발전에 탁월한 발자취를 남겼다.
안견(安堅)·정선·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켜 김홍도파 또는 단원파(檀園波)라 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과
개인소장의 〈단원도 1784〉·〈금강사군첩〉·〈섭우도 涉牛圖〉·〈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圖 1804〉
간송미술관 소장의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단원화첩〉(1796년작, 보물 제782호) 등이 있다.
연보로 본 김홍도의 생애
- 김홍도 年譜 -
1774년 강세황이 서울에서 안산시 부곡동 처가 근처로 이사옴
1745(영조21)년 : 金海 金氏 중인 집안에서 출생, 증조부는 萬戶(종4품). 부친 金錫武는 벼슬없음
소년기 - 10대 : 安山에서 유명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과
문학가 이용휴(李用休)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서 문예 전반의 교양을 쌓음.
10대말 - 20초 : 도화서 화원이 됨. 20대부터 명성 날림.
1765(영조41)년 (21세) : 《景賢堂受爵圖?屛》을 그림 (그림은 전하지 않음).
1773(영조49)년 (29세) : 英祖御眞 및 世孫(正祖)의 초상을 그리는데 동참화사
1776(영조52)년 (32세) : 봄 《群仙圖》8첩병풍(호암미술관)
※ 3월 5일 英祖 승하, 正祖 즉위.
1778(정조 2)년 (34세) : 《行旅風俗圖》 8첩병풍, <西園雅集圖>扇面,<西園雅集圖>6첩병풍
1779(정조 3)년 (35세) : 《神仙圖》 8첩병풍(국립박물관), <松月圖>
1781(정조 5)년 (37세) : * 眞率會. <仕女圖>, <正祖御眞>(31세상), 《慕堂平生圖》8첩병풍
1782(정조 6)년 (38세) : <南極星圖>
1783(정조 7)년 (39세) : 12월 28일 경상도 安奇察訪 임명(이후 1786년 5월까지 2년4개월간 재임).
1784(정조 8)년 (40세) : 燈淸閣雅集. 淸凉山 遊覽 <檀園圖>
1786(정조10)년 (42세) : "湛樂薺"懸板(안동인근 풍산읍 상리동 宣城李氏 ?華亭)
5월 경상감사 김상철과 이병모의 선정비 세움(현재 안동시립민속박물관 뜰).
5월 안기찰방 임기를 마치고 강세황에게「檀園記」를 청해 받음
<安陵新迎圖>(原本은 전하지 않음).
1787(정조11)년 (43세) : 李漢鎭과 <寧靜帖>을 합작
1788(정조12)년 (44세) : <金泥竹鶴圖>선면, <金泥花鳥圖>>선면.
隱巖雅集, 4월2일 李德懋의 부친의 71세 생일잔치에참석, 가을 金剛山 寫景.
1789(정조13)년 (45세) : 對馬島에 가서 지도를 그림. ※ 顯隆園 영건.
1790(정조14)년 (46세) : ※龍珠寺 창건, <騎驢遠遊圖>선면, 《十老圖象帖》 (강세황과 합작)
1791(정조15)년 (47세) : ※강세황 卒(79세), <松石園詩社夜宴圖>, <정조어진>, 12월 22일 충청도 延豊縣監 임명.
1792(정조16)년 (48세) : 연초 연풍현감 부임. 公靜山 上菴寺에 기우제와 시주. 이때쯤 아들 金良驥 출생.
9월 李光燮, 李漢鎭, 黃運祚 등과 西原雅集.
1793(정조17)년 (49세) : 연풍현감 재임. ※봄 작년에 이어 三南에 가뭄과 기근.
1794(정조18)년 (50세) : 연풍현감 재임. ※3년 연이어 三南에 큰 기근.
1795(정조19)년 (51세) : ※1월 7일 연풍현감 해임.
※윤2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華城).
『園幸乙卯整理儀軌』圖設 삽화, 《을묘년화첩》, 《풍속도8첩병풍》
1796(정조20)년 (52세) : 《병진년화첩》(檀園折世帖), 『佛設大報父母恩重經』再刊.
<徐直修肖像>, 《園幸乙卯整理所?屛》(수원능행도).
※8월 19일 華城 완공, 水原行宮에 排設한 병풍 ?本華城秋八景圖 그림.
1797(정조21)년 (53세) : 『五倫行實圖』
1798(정조22)년 (54세) : <海山仙鶴圖>
1799(정조23)년 (55세) : ※ 이 무렵부터 만년에 쓴 書簡과 詩文이 《檀園遺墨》
1800(정조24)년 (56세) : 正初 歲畵 《朱夫子詩意圖>, 8첩병풍
※6월 28일 正祖 갑자기 승하함.
1801(순조 1)년 (57세) : 《三公不換圖?屛》
1802(순조 2)년 (58세) : <滄波圖>선면, <老僧觀瀾圖>, <歸漁圖>
1803(순조 3)년 (59세) : <冠巖圖> 그림( 《高山九曲圖12첩》 병풍 중 제3폭).
1804(순조 4)년 (60세) : 이무렵 천식 등 병고로 시달림. 5월 5일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처음 差定 됨.
<耆老世聯契圖>, <老梅圖>, <知章騎馬圖>
1805(순조 5)년 (61세) : 8월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祿取才에 마지막 참여함. <秋聲賦圖>
1809년말 이후 1809년 이전 어느 때 죽음.
1809(순조 9)년 : 純祖가 《海山帖》을 洪顯周에게 下賜함.
1818(순조18)년 : 아들 김양기가 《檀園遺墨》을 만듬.
단원 김홍도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륵, 광개토대왕, 윤관, 장보고, 원효대사 등 영정을 많이 그렸던 한 한국화가가 1981년 비단에 채색화로 그린 <단원 김홍도 영정>.
대체 이 작가는 어떤 근거로 김홍도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표준 영정을 제작하려면 학계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정부가 지정해야 하는데 자료가 없는 이를 어떻게 그렸으며 표준영정으로까지 지정될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서 공식 표준 영정으로 지정할 만큼 급했던 이유라도 있었을까. 의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
서울에만 수없이 많은 동상이 입상과 좌상, 흉상으로 놓여있지만 김홍도의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어느 기록에도 김홍도의 초상화라고 확실히 단정할 수 있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이 자신의 또 다른 저서 「화인열전」표지로 김홍도의 자화상이라며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자화상>을 실었지만 출간되자마자 논란이 일었다.
이 그림이 게재된 북한 도록에 자화상이란 언급이 없으며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의 저자 오주석이 가짜라며 주장해 지면 논쟁이 불붙었다. 결국 뜨거운 설전만 남겼을 뿐 「화인열전」2권 표지의 김홍도가 진짜 김홍도인지는 가려지지 않았다.
다만 몇몇의 그림들을 통해 이렇게 생겼을 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재까지 거의 100퍼센트 김홍도의 얼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화상이 들어있는 그림이 있긴하다.
김홍도의 작품 < 단원도(檀園圖) 1784>가 그렇다.
종이에 담채로 그려진 1미터가 넘는 중형 크기의 이 작품 한 귀퉁이에는 세 명의 선비와 한명의 노비(머슴)가 그려져 있다.

사진(1,120 x 740) 출처 : 이미지 공유마당
참조 :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99> 김홍도의 집 단원
이 세 명의 인물은 김홍도와 강희언, 정란이다. 거문고를 켜고 있는 이가 김홍도 자신이며 벽에 기댄 채 부채를 들고 이가 동시대 화가 강희언이다. 그리고 김홍도의 거문고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구부정한 사람이 조선 최고의 여행가였던 화가 정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그림에서조차 김홍도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너무 작게 그려 놓아 뚜렷한 외관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김홍도의 얼굴임을 인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김홍도가 그린 <포의 풍류도(布依風流圖)>이다.
이 그림은 <단원도>에서 거문고를 뜯던 김홍도의 확대판으로, 이번엔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단원도>에서 보여준 방안의 분위기와 상당히 닮아 있다. 여기에 무심한 인물 표정, 비파를 연주하는 단아하고 꼿꼿한 모습, 특히 ‘흙벽에 아름다운 창문을 내고 여생을 야인으로 묻혀 시가나 읊조리며 살리’라며 본인에 대한 심정을 담담히 담아내고 있는 화제(畵題)로 미뤄 짐작컨대 이 그림의 주인공이 김홍도 자신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고해상도 이미지 : 이미지 공유마당
그러나 불행히도 이 그림 역시 그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리얼리티가 있는 <자화상>은 아니다. 간결한 필선으로 음영 없이 처리한 탓에 가시적인 두드러짐이 강세황이 71세 때 직접 그린 영정(보물 제 590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진다.
결국은 아무리 고서를 뒤적여도 김홍도의 초상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출처] 단원 김홍도 흉상의 정체 (미술품투자카페) 작성자 물망초
포의풍류도
[포의풍류도]는 손바닥만 한 그림이다. 작은 화폭에 즉흥적으로 쓱쓱 그렸다. 화제로 쓴 글씨도 거친 편이다. 풍속화나 신선도를 그려낼 수 있는 필력의 김홍도에게 이 정도 그림은 아무것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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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풍류도]는 손바닥만 한 그림이다. 작은 화폭에 즉흥적으로 쓱쓱 그렸다. 화제로 쓴 글씨도 거친 편이다. 풍속화나 신선도를 그려낼 수 있는 필력의 김홍도에게 이 정도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림에는 선비가 비파를 타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배경이 생략되어 공간을 가늠하지 어렵지만 버선을 신지 않은 걸로 봐서는 실내가 분명하다. 선비 주변에는 붓, 벼루, 서책, 생황, 도자기, 파초, 호로병, 중국 고대청동기 고(觚), 사인검 따위가 표현되어 있다. 심지어는 청동기 안에 영지와 산호도 보인다. 이러한 소품들은 모두 선비의 풍모나 가치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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