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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




7세기, 부여 능산리 출토, 높이 61.8㎝, 무게 11.85㎏, 국보 제287호,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는 백제에서 520~534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향로이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군 능산리 절터의 목곽 수로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초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똑같은 복제품이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

백제금동대향로는 원래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건설하던 곳에서 발견되었다.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시점에 물웅덩이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견 당시 백제금동대향로는 진흙 속에 있었고, 바닥에서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이 발굴되었는데, 발굴단은 이 섬유 조각이 백제금동대향로를 감쌌던 것으로 추정했다. 또, 대향로가 오랜 세월에도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진흙에 잠긴 진공 상태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1995년의 발굴 조사로 대향로가 발견된 일대가 백제 시대 왕실 절터였음이 입증되었다. 발굴된 목탑 흔적에서 발견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에서 "창왕(위덕왕) 13년(567년)에 정해공주가 이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학계는 이 점에 주목하여 대향로가 단순한 향로가 아니라 백제왕실 의식이나 제사용으로 사용된 신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 발굴당시의 이야기]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 안녕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백제의 것과 같은 대형 향로가 없으며, 한나라 때와 같은 금동 제품이 남조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남조시대 유물들 중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백제의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것이 확인되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


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天界)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백제 금동대향로

서기 660년 18만 나당연합군이 구름떼처럼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해오던 날, 도성 밖 능산리 사찰도 아수라장이 됐다. 의자왕의 마지막 충신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전사했다는 급보가 날아들고 소정방(蘇定方)이 탄 배도 부소산성 아래까지 밀고 올라왔다. 도성은 순식간에 함락됐다.


같은 시각, 사비의 나성(羅城) 동쪽 외곽의 이 능산리 백제왕실 원찰(願刹)에서는 선왕에 예를 갖추기 위해 간직하던 왕실 물건들을 숨기느라 미처 피란갈 겨를이 없었다.


왕실물건 담당관은 쫓기는 몸으로 사찰 내 웅덩이 바닥 진흙 속으로 가장 귀중품부터 밀어넣고 달아났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와서 찾을 요량으로...하지만 그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1400년 긴 세월 진흙 속 진공상태에서 잠자다 이 한 사람의 순간 기지 덕에 오늘날 후손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망국 속에 가까스로 숨겨진 이 보물은 발견때에도 극적이었다. 때마침 국립부여박물관이 신축 이전하던 1993년 12월12일 추운 겨울 저녁, 능사리사지 부근 주차장 공사로 땅을 파다가 마지막 철수 직전 웅덩이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의 실루엣이 아련거렸다. 모두가 놀라 건져올린 것이 1400년 전 엉겁결에 밀어넣은 금동대향로였다. 다음날이면 영원히 콘크리트 속에 묻힐 뻔 했던 찰나였다. [헤럴드경제 2013-01-21]




부여 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 소개 영상


향로는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을 없애기 위해 향을 피웠던 도구로 인도에서는 4000년 전부터 이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중국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제작되었다. 특히 전국시대 말에서 한나라 시기에는 박산향로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박산(博山)은 중국 동쪽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전하는 삼신산(三神山 :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표현한 것으로 그곳에 살며 불로장생한다는 신선들과 동물, 산수 등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이와 같은 박산을 향로 뚜껑에 표현하고 있으며, 갓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몸체를 한 마리 용이 입으로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백제 동탁은잔(무령왕릉 출토)

이 백제 동탁은잔의 발견전에는 중 일 학자들이
금동대향로를 백제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은잔의 발견으로 금동대향로가 백제 것이라는
확증을 해 준 아주 귀한 유물이다. (나주박물관)

백제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표면에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은제잔인 동탁은잔(銅托銀盞)은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왕비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산봉우리 모양의 잔 뚜껑에는 산과 산 사이 골짜기에 노닐고 있는 봉황과 나무, 연꽃잎 등이 빼곡히 새겨져 있고 잔의 표면에는 물의 흐름인 듯한 부드러운 무늬가 너울거리고 그 밑으로 세 마리의 용이 잔의 하단에 묘사된 연꽃을 둘러싸면서 호위를 하는 듯하다. 화려한 문양으로 새겨진 동탁은잔은 다시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진 잔받침에 올려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탁은잔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마찬가지로 연꽃 장식과 봉왕, 산악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뚜껑 중앙의 연꽃과 손잡이를 제외하면 동탁은잔은 전체적으로 ‘봉황-산악도-류운문-연꽃과 용’의 구성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은 백제대향로의 수직적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 비록 잔(盞)과 향로라는 기물(器物)상의 차이가 있고, 동탁은잔의 장식 내용이 백제대향로보다 조금 고식(古式)이라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구성상의 일치는 양자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게다가 백제대향로나 동탁은잔에 장식된 이러한 구성은 중국의 향로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이것은 위와 같은 구성이 전통적인 중국적 구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동탁은잔은 525년 무령왕(武寧王·501-523)의 무덤에 수장된 유물로 대향로보다 제작시기가 앞선다. 따라서 백제대향로를 제작한 장인들은 동탁은잔이 수장되기 전에 실물을 보았거나 동탁은잔의 구성 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동탁은잔이 수장된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백제대향로가 제작되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출처: 대전일보사]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 한나라 박산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했지만, 전체적인 모티브는 무령왕릉출토 동탁은잔(銅托銀盞)과 부여외리출토 산수봉황무늬벽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동탁은잔은 봉황과 산악도, 연꽃과 용의 구성을 갖추고 있어 백제대향로의 전체적인 구조와 아주 유사하다. 또한 향로에서 보이는 코끼리를 탄 인물이나 악어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나 중국의 남북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승려 형상과 같은 불교 요소를 박산향로에 넣은 것도 중국향로에서는 그 선례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중국의 박산향로를 뛰어 넘는 백제만의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보여준 것이다. [출처: 사이언스올]


백제 동탁은잔.pdf







백제 금동대향로 - 도재기의 천연향기 (경향신문 선임기자)


■ 백제와 함께 묻히다


부여 능산리 석조사리감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

1993년 12월12일,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충남 부여의 능산리 절터 유적. 국립부여박물관 발굴조사단은 여느 때처럼 발굴조사로 분주했다. 어둑해질 무렵, 서쪽 발굴현장 땅속 50㎝쯤에서 목곽수조가 발견됐다. 발굴단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험상 습지유적은 공기가 통하지 않아 유물이 있다면 보존상태가 아주 좋아서다. 구덩이 속에는 기와·토기편들이 진흙과 뒤엉켜 있었고, 그 사이로 금속편까지 빼꼼 드러났다.


물을 닦아내며 깨진 기와와 토기편을 하나씩 들어냈다. 늘 그렇듯 발굴작업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3~4시간이 지났을까. 밤 8시가 넘어서자, 마침내 금속편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누르스름한 빛의 금동유물. 발굴단원들은 모두 느꼈다. 조각 수준이나 크기, 출토지 등으로 볼 때 적어도 사비시대를 넘어 백제사를 다시 쓸 문화재라고. 1400여년 만에 다시 나타난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여느 ‘국보’들처럼 그렇게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듬해엔 획기적인 연구자료도 발굴됐다. 향로 출토지인 공방터 인근 목탑터에서 명문이 있는 ‘능산리사지 석조 사리감’(국보 288호)이 나온 것이다. 20자의 명문은 사리감이 창왕(위덕왕·재위 554~598) 때인 567년 창왕 누이의 발원으로 봉안됐다는 등의 사실을 알려줬다. 이에 따라 능산리 절은 신라와의 관산성전투 중 사망한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창왕이 세웠고(절 이전에 성왕을 추모하는 건축물이 있었다는 학설도 있다), 향로 제작 시기도 그즈음이라고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또 향로는 발굴 정황상 급하게 숨겨진 것으로 보여 백제 멸망과 함께 묻힌 것으로 보인다. (왕실에서 제사용으로 사용되던 물건이 천에 곱게 싸인 채 땅에 묻힌 이유는 사비성이 함락되어 약탈과 방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어느 백제인이 급히 숨겼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 인고의 세월 용하게 견뎌낸 명품


백제 금동대향로는 높이 61.8㎝, 무게 11.85㎏, 몸체 지름 19㎝다. 한 마리의 용이 용틀임하며 막 피어나는 듯한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물고 있는 형상이다. 뚜껑과 몸체 두 부분이지만, 자세히 보면 위로부터 상상의 새 봉황, 뚜껑, 뚜껑으로 열고 닫는 몸체, 받침 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향을 피우는 향로니까 연기가 나오는 구멍도 있다. 12개다. 오래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봉황은 날개를 힘있게 활짝 펴고 보배로운 구슬(보주) 위에 서 있다. 턱 아래에는 여의주 같은 구슬을 품었고, 꼬리는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유려한 선을 그려낸다.


봉황 아래 뚜껑에는 고대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실감나게 돋을새김됐다. 완함 연주자를 중심으로 피리 모양의 종적, 관악기 배소, 북, 거문고를 연주 중이다. 그 아래엔 저마다 새가 앉아 있는 5개의 봉우리가 서 있다. 악사와 이 봉우리들 뒤편에 각 5개씩 10개의 향 연기 구멍이 숨었고, 2개는 봉황 가슴에 있다.


그 밑으로는 산봉우리들이 중첩돼 빙둘러 세워졌다. 봉우리들 위, 사이사이에는 명상 중이거나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사람 등 여러 형상의 인물상, 호랑이·코끼리·원숭이·멧돼지 같은 현실세계의 동물과 기괴하게 생긴 갖가지 상상 속 동물들, 바위, 식물, 폭포 등이 표현됐다. 마치 우주만물을 응축한 것 같다. 뚜껑의 조각상을 정리하면 생략시킨 것을 포함해 봉우리가 70여개, 신선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상 10여개, 40여마리의 동물과 6종의 식물 등이다.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화제를 모은 사람 얼굴을 한 새(인면조)는 물론 사람 얼굴을 한 네 다리 동물인 ‘인면수신’상도 있다. 하나같이 섬세하다. 심지어 봉우리들 가장자리에 빗금을 새겨 마치 나무가 많은 산을 연출한 것처럼 보여 백제 장인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금동대향로 몸체의 연꽃장식

몸체는 8장의 연꽃잎이 3단으로 배치됐다. 자세히 보면 그 끝이 모두 밖으로 살짝 반전됐다. 생동감을 더하는 것이다. 연꽃 위나 사이에도 물고기와 새, 날개 달린 물고기 같은 상상 속의 동물 등 20여마리의 동물, 2명의 인물이 표현됐다. 향로의 받침은 승천하는 듯한 역동적인 용이다.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은 목 뒤로 뻗었고, 갈기는 뚫음기법으로 장식됐다. 이빨까지 표현된 용의 입은 짧은 기둥으로 몸체와 연결됐다. 용틀임하는 몸통 사이에 파도·연꽃무늬가 조각됐다.


과학적 분석결과 향로는 빼어난 청동 밀랍주조기술, 첨단의 도금술이 적용된 금속공예품이다. 주성분은 구리와 주석, 도금기법은 수은에 금을 녹여 청동에 바른 뒤 열을 가해 수은을 없애는 당시 첨단기술인 수은아말감법이다. 두께는 0.5~0.6㎝로 일정하다. 물리적으로 받침은 용의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만들어 안정감을 높였다. 특히 바닥에 닫는 세 지점을 이으면 정삼각형이다. 치밀한 설계가 읽혀진다. 향 연기 구멍도 연기가 곧바로 올라가지 않고 봉우리와 악사들을 타고 더 환상적으로 피어오르도록 했다.



■ 향로로 그려낸 백제인의 사상


백제 금동대향로는 미술품이자 한편의 시, 영화 같다. 인물이든 자연물이든 등장하는 모두는 저마다 풍성한 이야기를 품었다. 나아가 그 모두는 독특한 배치로 어우러지며 극적인 미장센을 드러낸다. 또하나의 신비하고 거대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앞에서 향로의 겉을 찬찬히 살폈다면, 이제 향로 제작의 사상적 배경 등 그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크고 작은 산봉우리와 신령스러운 동물로 구성된 뚜껑은 도교의 삼신산(봉래·방장·영주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신산은 중국의 동쪽 바다 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산다는 곳이다.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이 꿈꾼 이상향, 별천지다. 그러고보면 뚜껑 곳곳에 도교적 요소들이 많다. 펼쳐진 산수, 민머리에 도포를 입어 신선 같은 인물상, 신비로운 동물들이 그렇다. 이런 도상은 중국 한나라 때 신선사상을 담아내며 제작된 ‘박산향로’에서도 보인다. 물론 백제 금동대향로는 중국 박산향로와 비교해 보다 크고, 조형성도 빼어나며, 산·인물·동물상도 훨씬 수준높게 표현됐다. 백제만의 고유한 미감과 창의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도교사상이 강한 뚜껑에 비해 연꽃잎이 가득한 몸체는 불교적 색채가 짙다. 몸체 자체를 연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연꽃은 불교문화의 상징으로 생명 창조·왕생 등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향로가 연화화생(蓮華化生) 사상을 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다. 연화화생은 중생이 극락에서 연꽃을 통해 왕생한다는 것으로 우주만물이 연꽃에서 태어난다는 생명관이다. 연꽃 무늬도 있는 받침은 도교·불교적 요소가 어우러졌다. 용은 입에서 내뿜는 기를 통해 만물을 생성시킨다는 상징성이 있다. 용의 입을 통해 마치 기가 나오고 그 위의 연꽃(몸체)이 뚜껑의 만물을 생성시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향로를 음양오행설로 풀어내기도 한다. 음양오행설은 우주만물의 생성·소멸을 설명하는 고대 동아시아의 세계관이다. 꼭대기의 봉황은 양을 대표하는 동물이니 천상세계를, 맨 아래의 용은 음을 대표하니 수중세계를 상징화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 향로에 표현된 개별 요소들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도상도 많고, 학설이 충돌하기도 한다.


다만 많은 학설과 견해들은 백제 금동대향로가 도교와 불교 두 요소가 융합된 당시 백제인들의 종교와 사상, 세계관·자연관을 상징적으로 압축해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데로 수렴된다. 실제 도교·불교적 표현이 나타나는 것은 다른 유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나온 ‘청동받침이 있는 은제잔’이나 부여 외리에서 나온 문양전(무늬벽돌·보물 343호) 중 ‘산수봉황무늬벽돌’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백제 금동대향로를 통해 우리는 백제인의 탁월한 예술적 미감과 독창성,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적 역량도 알 수 있다. 백제를 넘어 삼국시대 문화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 향로를 바탕으로 고대 종교·사상사, 미술사, 음악(악기)사, 의복사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공공조형물이나 갖가지 전통공예 문화상품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출처: 경향신문]




  




연화화생(蓮花化生)  연화화생이란 연꽃에 의하여 만물이 신비롭게 탄생되는 생명관을 말한다. 이 향로는 신산(神山)인 박산(博山)을 표현한 것이지만 향로에 표현된 용, 봉황, 연꽃, 산 그리고 수많은 물상(物像) 모두가 이 연화화생과 직, 간접 관련되고 있다.  


연화화생의 중심을 이루는 연꽃은 이 향로의 경우 동체(胴體)인 연꽃봉오리이다. 그런데 연꽃은 물속에 뿌리를 박고 물 위로 꽃을 피우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향로에서의 연꽃은 용을 통하여 물속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이 향로의 연꽃은 용의 입과 연결되고 있다. 이 연화(蓮花)는 단순히 용의 입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아시아의 신수(神獸)인 용의 입에서 피어나는 기(氣)이다. 결국 용과 연꽃이 상호동격인 것이다. 용의 입에서 화생된 이 향로의 연꽃은 노신(爐身)에서 보듯 만개한 연꽃이다. 그런데 이 만개한 연꽃은 뚜껑 부위에서는 山으로 화생하고 있다. 이 산은 신선세계의 중심의 산, 박산(博山)이다. 결국 박산이 연꽃에 의해 화생된 것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  신선사상에는 음양오행설도 포함되고 있다. 이 향로에서 음양관은 맨 정상에 봉황을 배치하여 양(陽)을 상징하고, 맨 아래에 용을 배치하여 수중세계이자 음(陰)을 상징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오행관은 뚜껑의 산이 5방위로 또 5단으로 솟았으며, 또 각 단은 5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5곳의 박산문(博山文)을 남긴 것, 원앙 5마리, 악사(樂士) 5인, 5개의 구멍을 2겹으로 뚫은 향연구멍(香煙穴) 등으로 반영되었다.




세부 설명


백제 금동대향로는 크게 네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상부의 봉황(鳳凰), 박산(博山)을 표현한 본체 뚜껑, 연꽃으로 둘러진 본체 하부, 받침부분인 용(龍)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봉황이 턱밑에 여의주(如意珠)를 끼고 있고, 그 아래로 다섯 악사와 봉황, 뱀을 물고 있는 짐승 등 상상의 동물과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등 모두 42마리의 짐승(먹이로 잡혀 먹히는 두 마리와 어미 뒤에 있는 새끼도 포함), 5인의 악사를 비롯한 17명의 인물이 74곳의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돋을새김[浮彫]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도 6종류의 식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는 폭포 등이 보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과 짐승들은 거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 다리의 동물들은 앞발을 들어 왼쪽으로 전진하는 생동감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고 말탄 사람[騎馬人物]의 경우는 말의 목과 사람의 시선은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으나 말은 왼쪽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악귀를 막는 기능을 하는 포수(鋪首)가 봉황의 꼬리 쪽에 위치하고 있어 봉황은 남쪽을 바로 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정면을 바라보는 봉황과 그 아래의 완함 연주 주악상과 낚시하는 사람이 있는 부분이 처음부터 정면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 부분에는 74개의 약화(略畵: 사물을 직접 취재하거나 기억을 더듬어서 간략하게 대강 그린 그림)된 봉우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산과 산 사이, 계곡과 계곡 사이에 한가로이 오가는 선인들과 동물들의 모습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죠. 봉우리의 모양새는 굴곡이 심하지 않은 단봉을 중첩시켰고, 각 봉우리의 테두리에는 빗금모양의 문양을 조각해 넣어 입체감을 살렸습니다.


이 향로의 중첩된 산을 정돈하여 보면 모두 5단이며 그 단은 각각 5봉우리로 이루어져 그 결과 큰 산은 25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큰 산의 각 단은 엇갈리게 배치되었고, 또 큰 산과 연결되는 작은 49 봉우리도 있어 그 결과 뚜껑의 산은 매우 중첩된 양상이 되었습니다. 이 산들은 모두 공제선(控除線: 하늘과 지형이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선)을 따라 테두리를 하고 그 내부를 직선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직선의 선각은 용의 날개와 목덜미 그리고 향로의 몸체(爐身)를 감싼 연꽃잎 가장자리의 직선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만물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연꽃

박산은 도교적인 사상의 모체가 되며, 아래의 연꽃문양에서 나타나는 연화화생(연꽃이 만물을 성서로운 조화로서 다시 탄생시킨다는 불교적 생성관)의 불교적 정신과 결합하여 동양적인 정신세계를 백제만의 독창적인 표현기법으로 나타낸 것으로 백제공예미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는 용모양의 받침이 받치고 있는 연꽃봉오리의 형상입니다.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연꽃잎의 끝부분을 사선문[斜線文]으로 음각하여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특유의 연꽃 표현방식으로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의 상부 연봉형 장식 아래 부분이나 부여 외리 무늬벽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층을 이룬 연꽃 잎은 몸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上段)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데 제일 하단의 연꽃잎에는 2줄의 음각선을 복엽(複葉)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윗단과 그 아랫단 연꽃잎 사이의 여백에는 27마리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돋을새김[浮彫]되어 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 용받침

받침은 한 다리를 생동감 있게 치켜들고 있는 용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입으로 몸체인 연꽃봉오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용이 한쪽 발을 치켜들고 있으며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형성하여 안정되게 만들었습니다. 받침에 표현된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와 그 곳에서 뻗어 나온 구름 모양의 갈기를 투각 장식하였습니다. 


바다에 사는 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용의 발톱 부분에 물결 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물결 무늬와 다리 사이에 6엽의 연꽃 무늬를 나타내었는데, 용의 세 다리와 물결 무늬가 원형을 이루게 구성하여 안정감있는 구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은 두 갈래로 목 뒤까지 길게 뻗어 있고 길게 찢어진 입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히 묘사되었습니다. 


용의 입안에 물려진 짧은 기둥[幹柱]은 향로 몸체의 하부 받침과 연결시켰습니다. 용이 입에 물고 있는 기둥의 위로는 향로 받침과 몸체를 연결시키기 위한 기둥이 이어져 있고, 이 기둥은 몸체의 둥근 안쪽 면으로 약간 솟아 올라 그 끝에 별도의 고리를 끼워 고정시켰습니다. [출처: 허웅]



백제 금동대향로 꼭대기에 앉은 상상 속의 새 봉황


뚜껑에 표현된 산의 꼭대기에는 머리깃털과 긴 꼬리 깃털이 유난히 두드러진 

봉황이 둥근 구슬 장식 위에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듯 서 있다.




봉황 아래 다섯 봉우리의 꼭대기에는 다섯 마리의 새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이들은 봉래산 남쪽에 있는 새의 이름을 들어 원앙(鴛鴦)이라 보기도 하고, 

백성의 상징을 기러기라 묘사한 삼국사기 기록을 들어 기러기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천상세계와 관계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5마리의 새들 사이로는 5명의 악사가 각기 

월금月琴(완함阮咸), 피리(종적縱笛), 배소(排簫), 거문고(금琴), 북(동발銅鈸) 등 

5개의 악기를 연주하며 앉아 있는데, 악기들은 그 기원을 서역, 고구려, 남방 등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어서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말해주고 있다. 


 

5마리의 새들 사이에 5명의 악사가 앉아 있다. (향로의 뚜껑을 펼쳐 놓은 모습이다)


뚜껑에는 이 밖에도 모두 74개의 봉우리가 3-4겹으로 첩첩이 표현되어 있으며, 

20군데의 바위, 산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등의 사이사이로 17명의 인물과 42마리의 짐승, 6종류의 식물 등이 등장하고 있다.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과 인물·생물들을 형상화한 뚜껑.

위로부터 완함을 연주하는 악사, 교묘하게 숨겨진 향 연기 구멍(오른쪽), 

사람 얼굴을 한 동물(인면수신)과 코끼리를 탄 인물상. 




몸체에서 핀 향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빠져 나가기 위해 봉황의 가슴 윗부분에 2개, 다섯 마리 새가 앉은 산봉우리 뒤쪽에 5개, 다섯 악사 앞에 솟은 산봉우리 뒤쪽에 5개씩 연기구멍을 돌아가며 뚫어 놓았다. (원래는 향로 뚜껑의 연기구멍이 하단 4개 상단 4개 총 8개 주조되어 있으나 연기가 잘 안빠져 나왔는지 정으로 내려찍어(...) 4개의 구멍을 더 확장했다고 한다?)


▶ 백제금동대향로 뚜껑 내부를 살펴보면 작은 연기구멍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봉황의 가슴에 뚫린 2개의 구멍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구멍들은 솟아오른 산악의 뒷편에 가려져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연꽃잎과 갖가지 생물을 돋을새김한 몸체


몸체에는 3단으로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는데, 꽃잎의 끝이 살짝 반전되고 

잎의 끝부분에 사선무늬를 음각하는 백제 특유의 연꽃 표현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꽃잎 사이의 표면에는 27마리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용틀임하는 듯한 용의 역동성을 표현한 받침


받침은 한쪽 발을 생동감 있게 치켜든 용이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만들어 안정감 있게 바닥면에 닿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승천하는 자세의 용은 구름모양의 길가와 정수리에 솟아 오른 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으며, 

향로 몸체의 하부 받침에 이어지는 짧은 기둥을 입안에 물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받침과 몸체, 뚜껑과 봉황장식을 각각 연결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어 붙인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뚜껑과 몸체는 정교하고 섬세한 무늬 표현이 

가능하도록 밀랍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석고나 부드러운 진흙을 부어 만든 거푸집에 

구리와 주석을 혼합하여 녹인 후 이를 부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문양의 섬세한 표현을 위해 아연을 의도적으로 첨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주조된 향로의 표면에는 수은아말감법을 이용하여 10-25 마이크로미터의 

일정한 두께로 정교하게 금으로 입혔다.


글출처: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 사진출처: 경향신문







현재(2020년) 전시중인 금동대향로인데 진품이라고.. [출처: 클리앙]



발견 이후 너무 아름답고 유명한 유물이라 어느 박물관이 소장할지 신경전이 거셌다. 심지어 연구단계에서 사진 한 장의 유출도 기를 쓰고 막았다고 한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다가 고향인 국립부여박물관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향로는 모조품이며,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이 진품이다. 부여군, 국립부여박물관의 상징과도 같기에 외부 전시품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그 극히 드문 예외 중 하나가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였던 '세밀가귀'전.



중국 漢代 유승의 무덤에서 발견된 박산로
백제금동대향로보다 약 6백년 정도 앞선다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일부 중국 사학자들은 '이것은 중국의 유물이다!' 하고 주장했다. 유물의 조형성이 수준 높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초기 연구단계 때는 중국에서 수입해온 유물로 추측했다고 한다. 백제는 철저한 불교 왕국이었는데, 대향로에서는 오히려 중국적 도교의 영향이 더 크게 보인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원형이 중국에서 유행하던 박산로(博山爐)라는 향로임은 분명하다. 


중국에서는 박산로가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에 나온 초기형태로부터 훗날 중세시기 완성형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른 박산로의 기술적 진화 모습이 모두 남아 전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대향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술적 발전계통이 전혀 보이지 않고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완성품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최소한 중국인이 중국의 기술을 토대로 한국에서 만들었거나 아예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라 본 것이다. 


이후 연구에서 백제가 제작한 유물로 판명되었다. 지금은 중국 학자 대다수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면 모를까, 대향로가 중국의 유물이라는 소리는 어불성설이라고 이전의 중국 유물설을 일축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세련미와 조형요소의 다양성은 지금까지 출토된 중국의 모든 박산로를 압도하고, 일단 60 cm을 넘는 크기부터가 넘사벽이다. [출처: 나무위키]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20주년을 맞아 문화유산연구소 지교에서 향로를 정밀 3D 레이저 스캔하여 

15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벗겨진 도금을 복원하여 만든 결과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하였다.






흙 속에서 발견한 금빛 국보 '백제금동대향로' [시니어매일]

백제 금동대향로 [경향신문]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TRIC 문화유산기술연구소의 디지탈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