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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출처 : 사막을 건너는 방법
많은자료들이 있으니 꼭 가보시길..


2천년 전 존재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 학문의 중심지였다.
안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정원과 연구실, 의학 학교가 있었으며 최소 50만 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


현대 지식의 밑거름이 된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건립부터 6세기 동안 존재했지만 약 600년 전 사라져버렸다.
현재 남아있는 안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유적은 본관이 사람과 서적으로 가득 차서 2번째로 지은 세라피움뿐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상상도 / 세라피움 유적

 

오늘은 당시 최대 규모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어떤 곳이였고
왜 유명한지 그리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췄는지 알아보자.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210km 떨어진 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지중해와 파로스 섬이 있고 
나일강과 가깝기 때문에 해군기지로 적합하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위치와 지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항구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도시로 갈수 있는 통로였다.  
안렉산드리아는 지리적으로 볼 때 지중해를 접해있는 천연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교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위대한 정복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왜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에 도서관을 세웠던 것일까?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에 오기 전부터 철학을 깊이 탐구했다.

특히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철학의 중심지로 사람들 사이에 많은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철학자들은 연설을 통해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기원전 4~5세기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플라톤 / 소크라테스 / 아리스토텔레스

 

이들은 현대 철학의 토대가 된 유명한 인물들이다.  이중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감각은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에 
진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진리는 감각을 통해 이성으로 들어온다고 믿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런 가르침을 배웠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장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의 지배자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아들을 위한 최고의 스승을 원했고 알렉산드로스가 13살에 대왕이 된 후 마케도니아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지식은 권력의 도구라고 했다. 

 

23살에 세계정복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전장에 가지고 다닐 만큼 학문을 사랑했다. 아시아를 지나 서인도까지 진출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고대 세계를 자신의 손에 거머쥐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아리스토텔레스

 

 

마케도니아(초록색 화살표)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토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로 갔다.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후원자로 반겼다. 

 

이집트의 아몬신

그리스인이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환영 속에서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막으로 가서 위대한 이집트의 神인 
아몬의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신탁에 대한 대답은 꿈으로 나타났고 알렉산드로스가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 아닌 아몬의 아들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버지인 아몬신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고 아몬신은 파로스 섬이 있는 곳으로가 위대한 도시를 세우라고 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이 세운 도시가 세계 학문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도시 중심에는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교육기관을 세울 것이며 그 속에 학자들을 매혹시킬 책들로 가득 채우겠다고 했다. 

 


알렉산드리아 건설이 시작되고 6개월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를 떠나 다시 원정을 떠났다. 


기원전 323년, 거침없이 세상을 정복할 것 같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상처와 열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이집트는 그가 가장 신임했던 장군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넘겨졌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네 친구이자 부하장군이었던 톨레미(Ptolemy)에 의해 계획된다. BCE 305년 톨레미는 알렉산더대왕이 갑자기 바빌론에서 병사하자 재빨리 본국 마케도니아로 이송되던 시체를 훔쳐 이집트 멤피스에 도착, 지멋대로 이집트 통치를 시작한다.  출처: 작은 프린이의 노트북)

 

 

프톨레마이오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시했고 그의 후손들은 약 300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의 수도로 정하고 다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들과 권력과 재산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부와 권력외에도 문화도 경쟁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가 강력한 나라의 수도뿐만이 아닌 문명과 지식, 한문의 중심지가 되길 원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문학과 철학,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들을 언제나 자신의 주위에 두었다. 건축가인 데메트리오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도왔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어디에 세워졌을까? 

아쉽게도 그 위치와 형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인 세라피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내부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으로 볼 때 도서관 본관은 항구 근처 그리스 마을의 왕궁 내부나 옆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계획도시 알렉산드리아. 본문에 나오는 뮤지엄, 세라피움(7)의 위치가 보인다. 파로스 등대는 지도에 나오는 Pharus 섬에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학자들을 후원했고 가능한 많은 책들을 선별해 도서관에 비치했다.

 

도서관 방문객들은 유명한 책들을 가져왔다.

도서관을 더욱 많은 책들로 채우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어떠한 방문객이라도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올 수 있게 해줬고 항구에 들어온 방문객 중 책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일단 도서관으로 가져오게 했다. 

 

만약 그 책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없는 책이면 돈을 주고 사들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역사상 존재했던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소유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목표는 그리스 세계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책을 갖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었던 것일까? 

책이 몇 권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50만 권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수많은 고대 필사본을 보관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부 중요한 책들은 다른 책들과 교환하기 위해 필사본을 만들어 거래했다.  
필사본들은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와 참고 자료로도 쓰였다.

 

매일 엄청난 양의 책들이 밀려들어왔기 때문에 사서들은 책을 쉽게 찾기 위해 분류하고 배치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책이 늘면 늘어날수록 방문객도 자연히 늘어났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가장 많은 서적들을 보유했음과 동시에  
세계적인 석학들이 지식을 나누고 연구를 하던 최고의 연구 센터이기도 했다. 

그리스의 의학자였던 헤로필로스는 도서관 내부에 의학교를 세웠다. 
그리스에서는 인체 해부가 금지되어있었지만 미라를 만들던 이집트에서는 고대부터 인체를 해부해왔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수도였기 때문에 헤로필로스는 처음으로 인체를 해부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내과의사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연구하길 원할 정도로 의학 분야에서 알렉산드리아는 자유로운 곳이었다. 

의학과 과학 이외에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가장 좋아하는 수학을 연구했다. 
기하학의 창시자 유클리드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연구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저서를 편찬했으며 학교도 세웠다.

 

 

유클리드 / 유클리드의 저서


유클리드는 다른 수학자의 기본 원리들을 증명해냈다. 
이것들은 현대 기하학의 기초들이며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기원전 283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파라오가 됐다. 
프톨레마오스 왕조는 약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다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마지막으로 그 시대가 끝났다. 
그렇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아버지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꿈을 이루어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를 통치하던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전성기를 맞았다. 

도서관과 박물관을 발전시키는 것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 섬 위의 거대한 등대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는 높이 120m가 넘는 파로스섬의 등대가 알렉산드리아 방문객들을 처음 맞이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포스트 참고)

 

 

파로스섬의 등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을 말하며 모든 등대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 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이집트 해안선은 매우 단조로워서 항구를 찾는 것이 어려웠는데 이 파로스의 등대는 항해의 편의를 위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이자 헬레니즘-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에 의해 건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여 자신을 소테르(구원자 라는 뜻)로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항구 부근의 파로스 섬에 등대를 건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등대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이르러 완공되었다. 정확한 완공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에 그리스인 소스트라투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되었다고 하나, 해당 불가사의를 맨 처음 선정한 안티파트로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살다보니 매일 보는 이 등대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아서 이게 아니라 바빌론 성벽을 선정했다고 한다.

 

 

오늘날 파로스 등대의 토대 위에는 카이트베이 요새가 세워져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어와 그리스어를 동시에 썼지만 서적 대부분은 그리스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자체가 그리스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모든 서적들은 파피루스에 쓰였다. 종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파피루스는 원래 두루마리 종이를 만드는 식물로 나일 강둑을 따라 재배되었다. 고대인들은 파피루스 줄기를 물에 적신 다음 얇게 이어붙이고 압축시켰다. 이렇게 압축시킨 파피루스가 마르면 그 위에 먹물로 글을 써넣었다.

 

 

파피루스의 제작 과정

파피루스를 이용해 책 한 권을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지만 그들은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리스타르코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전성기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인기가 높은 과학이었다. 고대인들은 별과 행성들이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은 땅도 하늘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상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점성술도 그들에겐 과학의 일부였던 것이다. 천문학자가 점성술사였고 점성술사가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스타르코스가 최초로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 히파르코스가 천 개가 넘는 별을 최초로 분류해냈다. 그는 태양력의 길이를 계산하기도 했는데 그 오차는 현재와 7분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학자들의 연구를 아무런 대가 없이 오로지 학문만을 위한 연구로써 아낌없이 지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이 우주의 신비를 연구하고 있을 때 로마인들은 동쪽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

기원전 246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이집트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기원전 235년, 에라토스테네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40살의 에라토스테네스는 왕족들의 스승이었으며 유명한 학자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원주를 측정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 
그는 문학,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 
에라토스테네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아르키메데스도 알렉산드리아를 찾았다. ​ 


가장 유명한 고대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현재 우리가 물리학이라고 부르는 무게와 수치를 연구했다. 물의 부력을 알아내는 실험에서 알아냈다란 뜻의 "유레카" 를 외쳤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

 

 

아르키메데스 / 아르키메데스의 실험

아르키메데스는 안렉산드리아를 떠나 고향에 돌아가서도 연구와 발명을 계속했다. 
기원전 212년, 로마 병사들에게 고향이 점령당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다고 한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큰 발전을 이루었던 기원전 250년경, 다른 나라들 역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는 마야의 달력이 완성되었고 로마에서는 최초의 검투사 시합이 진행됐다.   

그리고 로도스 섬에서는 또 다른 7대 불가사의인 높이 36m의 로도스 거상이 완성됐다. ​
( 고대 7대 불가사의 포스트 참고 )

 

 

알렉산드리아에는 수많은 학자들이 몰려들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명성은 줄어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왕으로 등극하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세계 학문의 중심지도 에게해 근처에 있는 페르가몬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페르가몬 도서관. 문화와 화려함에 있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라이벌 관계였다.



로마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시 로마의 위협을 받았다.


기원전 48년, 로마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왔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중 가장 유명한 여왕인 19살의 클레오파트라를 만났다.

클레오파트라는 위대한 로마 장군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첫 대면

​​
클레오파트라는 여성적 매력뿐만 아니라 상당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이집트를 통치했던 그리스 혈통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중 그녀만이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 

클레오파트라가 공동 지배자인 동생 프톨마이오스 13세와 이집트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울 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편을 들었고 알렉산드리아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카이사르의 해군이 항구에서 포위 당하자 카이사르는 적의 배에 불을 붙였다.  
불은 바다와 항구에 있던 모든 배들을 다 태우고 급기야 항구 근처의 마을까지 태워버렸다.

 

 

 

 

고대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의하면  
카이사르가 낸 불이 항구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번졌다고 한다. ​ 
​현대 역사가들은 이때 불로 인해 문서가 보관된 일부 창고만이 탔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안토니우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죽은 후 후계자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에게 페르가몬 도서관에서 사들인 수천 권의 책을 선물했다. 

어쩌면 이 책은 카이사르가 불태워버린 책들에 대한 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  
안토니우스 역시 클레오파트라 편에 서서 정적들과 맞서 싸웠다. ​

 

​그러나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안티니우스는 자살을 했고 연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역시 죽음을 택했다. ​ 

전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뱀에게 일부러 물려 그 독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 얼굴 포스트 참고 )

 

그렇게 이집트를 통치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내전과 왕조의 몰락에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그대로 있었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왜 사라진 것일까?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

기원전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끝나면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었으며 도서관의 지원금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때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예전만큼은 아니라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꾸준히 학자들을 배출해냈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1세기 말경에 태어난 그리스계의 로마인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교육을 받았고 히파르코스의 연구를 이용해 점성술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책을 써냈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 알려진 것인데 16세기까지 통용되었다. ​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서기 200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여러 번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없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들이 있다.  
그 주장들 중 설득력을 얻고 있는 주장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서기 400년이 되자 이교도는 금지되었고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됐다. 
이교도 학자들은 거리에 내몰려서 죽임을 당했고 다른 종교의 상징물과 사원들은 파괴되었다. 

616년,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를 점령한 페르시아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랍 민족이 이슬람 제국의 종교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당한 시기를

이슬람 군대들이 쳐들어온 시기로 보고 있다. 아랍인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이

이슬람 종교에 위배된다고 여겨 모두 없애버려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랍의 왕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불태워버리라고 명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어떻게 자취를 감췄는지에 대한 정확한 증거는 없다.

어쩌면 카이사르가 일으킨 화재에 지원금도 줄어들게 된데다 기독교 혁명과 함께 

이슬람의 침략까지 합쳐져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남은 책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대단한 이유는 그 규모와 보유 서적의 양도 있지만

아무 대가 없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학자들에게 최고의 연구시설을 제공한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모여 연구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최대 유산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기초일 것이다.  

 


참고자료 출처 : 히스토리채널, 네이버지식백과,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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