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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한국의 근 현대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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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한국의 정치.경제사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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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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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1840년 아편전쟁 - 청나라 영국에게 패함

1842   난징조약

     
1853   일본,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

     
     
1859   프랑스 1859년경 베트남을 침략

1860   영국이 북경을 함락,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 - 조선과 국경을 마주함

     
     

 

조선시대 수취제도 속의 비밀 : 왕과 사대부 간의 길고 긴 권력다툼

조선시대의 도로 : '오랑캐가 무서워 길도 못 뚫었던' 현실

조선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노비 : 그들은 과연 노예였을까 농노였을까?

농업만 중시하던 조선, 어떻게 망가졌나 : 백수와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붕당정치 : 무엇을 위해 싸웠나? + 조선이 발전을 못했던 이유

조선시대 서얼 : 서얼 차별 진짜 이유 + 잘못 알려진 서얼의 모습

조선시대 육식 문화 : 소고기 파티 '난로회' + 개고기 때문에 출세한 관료

조선시대 기근과 식인 : '똥구멍이 찢어졌던' 그 처참함

조선시대 무너져버린 중산층 : 인구가 늘어나도 국고는 바닥났다

망국의 소중화사상 : 영정조 시대 르네상스인가, 역주행인가?

조선시대 상인들의 모습 : 동아시아를 장악하던 인삼무역…정부는 외면했다

임진왜란, 임금과 백성은 조선을 버렸다 : 조선은 중국에 편입될 뻔

조선 건국 비화 : 이성계는 여진족인가? + 왜 정도전은 간신이 되었나?

조선 초기에 만연된 부정부패 : 황희정승은 탐관오리였나?

안타까운 역사 :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인조의 열폭

 

 

 

 

● 대원군 집권기

     
1863 고종 즉위
흥선 대원군 집권

 
1865 대전회통 편찬
경복궁 중건(~1872)

 
1866 병인박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입(외규장각의 문화재 탈취)

이항로, 척화주전론 전개(통상반대)

 
1868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

 
1871 신미양요 : 미군의 강화도 광성보 점령
대원군 척화비 전국 각지에 건립시작
조선은,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이긴 것이라 생각했다.

 
     

 

조선은 바다를 버려 나라를 잃었다 : 공도정책과 쇄국정책

조선 멸망의 결정타, 세도정치 : 흥선대원군의 실수

조선과 서양의 충돌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진실

 

 

 

● 조선 개화기의 혼란

1873 고종 친정 발표(12월)  
1875 윤요호 사건  
1876 강화도 조약 체결(4월)
조정, 일본에 1차 수신사 파견(김기수)
최양, 왜양 일체론 전개(개항반대)
조·일 무역규칙 체결(6월)
조·일 수호조규부록 체결(8월)
 
1879 지석영, 종두법 실시  
1880 김홍집, "조선책략" 유포
정부, 통리기구아문 설치(자주적개화 위해)
5군영 폐지 → 2영 설치(무위영,장어영)
 
1881 이만손, 영남 만인소 제기(개화 반대)
김홍집에 의해 조선책략이 정부의 계획으로 인해 일파만파 퍼지게 되면서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출신 유학자 '위정척사파' 1만 명이 정부를 향해 올린 상소.

조사시찰단, 영선사(領選使, 사절단) 파견
1881년(고종 18년) 청나라 근대식 병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하여 유학생을 파견키로 하고 그들을 인솔하는 사신을 영선사라 하여 김윤식을 정했다. 톈진에 파견된 유학생들은 각 병기 공장에서 제조법을 배우고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들이 섭취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삼청동에 한국 최초의 기기창을 설치하였다.

별기군 창설

 
1882 조 · 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3월)
조 · 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체결(8월)

울릉도 개척령(울릉군 승격, 독도 관할)

임오군란 발생 (6월, 결과 : 대원군 압송, 제물포 조약)

 
1883 전환국 설치(당오전 주조)
박문국 설치(한성 순보 발행)
기기창 설치(최초의 무기공장)
조 · 일, 통상장정 체결

한성 순보 발간
태극기 사용
덕원 유지, 원산학사 설립(원산)
정부, 동문학 설립(서울)

 
1884 우정총국 설치
갑신정변(결과 : 한성 조약)

한국 최초의 벽돌 양옥 주택 건설
덕상 · 세창 · 양평 상회, 인천에 건립

 
1885
거문도 사건(영국, 거문도 점령)
유길준 · 부들러, 한반도 중립화론 제기

미 북감리회, 배재 학당 설립(서울) 
경인전신, 경의전신 개통 
광혜원 설립


청 · 일, 톈진 조약 체결
양국 군대를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군시켰다

1886 정부, 육영 공원 설립(서울) 
미 북감리회, 이화 여학교 설립(서울)

 
1887 전등 설치 (경복궁 내 건청궁)

 
     
1892   러불동맹
1894 함경도에 방곡령 실시 → 바로 철회
고부농민봉기(1월)
제1차 농민봉기(3월, 황토현 전투)
청 · 일군 출병(5월)
전주화약 체결(5월 8일, 집강소 설치)
교정청 설치(6월 11일)
일본군, 경복궁 무단 점거(6월 21일)


갑오개혁(甲午改革, 甲午更張)
1894년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군국기무처의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조선의 서구화•근대화 개혁. 정치, 경제, 군사, 법률, 사회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넓은 범위의 개혁이었다. 총 3차례에 걸쳐 개혁이 이뤄졌다. - 노비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

제1차 갑오개혁(7월, 김홍집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 주도)
'개국' 기원 연호를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여 기존 조선의 6조체계를 8아문(八衙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제2차 농민봉기(9월, 우금치 전투)

제2차 갑오개혁(11월,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에 의해 추진)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그 아래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을 개편하고 월봉(월급)제도를 수립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없애고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을 부여했다. 또한 행정제도를 23부로 개편하였으며, 신분제도의 개혁을 통해 문무, 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고, 지방관에 의해서 집행되던 사법과 군사업무를 중앙에 예속시켜서 근대 관료체제를 구축하였다.


청 · 일 전쟁 발발(6.23)

1895 조정, 홍범 14조 반포(1월 7일) · 독립서고문 발표
2차 갑오개혁 시기에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다. 민법과 형법에 대한 조항을 적시하였다.

고종, 교육입국조서 반포(2월)

제3차 김홍집내각(친러 · 반일내각)

을미사변(8월) : 명성황후 살해

을미개혁(9월, 제4차 김홍집내각) : 친일세력들이 내각을 구성.
-. 태양력을 도입하며 이를 기념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변경
-. 단발령을 단행하였고, 정부 주도로 종두를 시행
-.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우체사를 설립

을미의병
을미개혁에서 단발령의 강압적 시행은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일반 백성들의 반일, 반정부 감정을 폭발시켜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격변기의 조선 말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자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이다. 후일 13도 창의군, 독립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유길준, 『서유 견문』지음
유길준이 미국 유학 중 경험한 것에 대해서 쓴 책이다. 목차는 20편이고 1편, 2편은 세계, 지구에 대한 설명 지리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1885년 집필을 시작, 1889년에 완성되었으며 1895년에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문학사적으로 근대 국문학이나 신소설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당파를 만드는 버릇, 어린이를 양육하는 방법, 친구를 사귀는 법, 여자를 대접하는 예절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조정, '한성 사범 학교 관제' 공포(4월)
조정, '소학교령' 공포(7월) 

민영환, 흥화 학교 설립(서울)


청·일 시모노세키 조약
:
청나라는 일본에게 만주지역에 있던 요동반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삼국간섭(4월, 프랑스,독일,러시아)으로 일본은 어쩔수 없이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으로 부터
러시아는 만주지역 철도부설권을
프랑스는 홍콩옆 광저우만을
독일은 산둥반도를 99년간 무상조차하게 된다.(칭따오맥주의 유래)



1896 아관 파천(2월)
1896년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 25일까지 조선의 대군주 고종과 왕태자였던 순종이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과 친일내각이 장악한 경복궁(건청궁)을 탈출해 어가를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겨 피신한 사건.
이 사건으로 조선의 정세가 바뀌었다. 수틀리면 경복궁에 칼들고 달려가던 일본이었지만, 러시아의 허가 없이는 건드릴 수 없는 러시아 외교공관에 머무는 고종을 일본은 더 이상 압박할 수 없어 을미사변으로 구성된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었고, 그 대신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된 뒤 대한제국이 건국되는 한국사에서 중요도가 높은 사건이다.

독립 신문 발간(4월)
독립 협회 창립(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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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탄핵 등으로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 세력의 위협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최익현 등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계 문제(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가 대두돼 다시금 척화파들이 여론을 등에 업으려던 찰나,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됐다.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는 관직에서 밀려나고 투옥되는 등, 고종 부부 측의 척족(戚族)(=성이 다른 일가)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온건개화파=시무개화파), 개화파(급진개화파=변법개화파)가 정치 전면에 나섰다. 민씨 정권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 통상조약을 연이어 맺었는데, 이는 척화파는 물론 민심의 반동을 불렀다. 삼정의 문란 때문에 가뜩이나 위태로운 조선에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증폭됐고, 흥선대원군 등 척화파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해 이재선 역모사건을 기도하는 등 끊임없이 정권 재창출을 노렸다.

민씨 정권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자기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네외로 자기 척족들과 개화파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는 한편,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총책임자는 민영환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었다.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을 무위영, 장어영 2영으로 축소하면서 대량 해고 시키고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민씨 척족들의 사병과 다름없는 별기군과 달리 차별했다. 훈련도감 출신 구식 군인들은 당시 일본군을 모델로 신설된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낮춰 부르며 증오했는데 특히 봉급 연체를 초래한 정부 재정 위기의 원인이 민씨들의 탐욕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와 선혜청 전임 당상이자 전 호조판서 김보현(당시 경기 관찰사)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명성황후를 지지하여 문호개방에도 지지하고 있는 흥인군 이최응도 구식군대의 표적이 되었다.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동생과는 사이도 좋지 않았고 명성황후를 지지하며 동생의 쇄국정책에도 반대하면서 대립과 갈등관계를 맺었다.

 

1882년 7월 19일(음력 6월 5일) 전라도에서 세곡(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선이 쌀을 싣고 도착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정부 예산을 집행해온 선혜청은 도봉소(都捧所)에서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밀린 봉급(13개월) 중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지불했다. 그나마도 썩은 쌀에다 모래하고 겨를 잔뜩 섞어 지급하자 병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정당한 그들의 항의에 지급 담당관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만 믿고 적반하장 식의 강압적으로 나오자, 격분한 병졸들이 마침내 소요를 일으켰다. 옛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필두로 한 군병들은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른바 도봉소 사건(都捧所事件)이었다.

폭행 사건을 일으킨 김춘영, 유복만과 군인들은 잡혀가서 뭇매질을 당하고 갇히게 됐는데, 그들이 사형을 당한다거나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 고종에게 군란(軍亂) 진압을 요청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게다가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죽을 것이란 소문에 구식 군인들은 분노가 제대로 폭발했다.

이에 구식 계통 군인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의 주도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한성의 백성들과 합세하여 마침내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하여 약탈하고선 운현궁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흥선대원군은 사태를 휘어잡기 위해 일단 그들을 달래주고는 성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며, 그 다음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인으로 위장시키고 비밀리에 김장손, 유춘만과 함께 구식 군인들의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음력 6월 9일, 허욱, 김장손, 유춘만의 지휘하에 구식(옛 훈련도감) 군인 300명이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수고 병장기들을 탈취하여 무장했으며 포도청과 관가(의금부)를 습격하여 잡혀간 김춘영, 유복만, 그외 군인들과 위정척사파 및 흥선대원군 지지파 인물들을 비롯한 모든 죄수들을 전원 석방시키고 일부는 중전 민씨의 오빠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 일가 친척과 개화파 인물들의 자택을 습격하고 파괴하였다. 모두 다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다음 이들은 경기 감영을 장악하여 감영의 무기고를 부순 후, 그들과 합세한 1만명의 일반 백성들까지 무장시키고 개화파 인물에 이어 원흉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주(駐) 조선 일본 공사관과 하도감까지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소위를 비롯한 별기군 조교들을 습격해서 살해했으며, 별기군 부대까지 급습하여 별기군 일부를 살해하는 등으로 사태가 끝나는 듯 싶었다.

 

그러나 구식 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았고, 그 다음날인 6월 10일, 대원군의 지원하에 폭동을 일으킨 백성들과 합세한 뒤 민씨 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궁궐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들은 우선 대원군의 형이었지만 고종과 중전(명성황후)을 지지하였던 전 영의정 흥인군(이최응)과 이조참의 겸 호군인 민창식의 집을 습격해서, 현장에서 이들을 살해했다. 이때 백성들이 임오군란에 합류했던 것은 민씨 세력과 명성황후가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그들과 똑같은 만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 또한 구식 군인들처럼 민씨 일파에 대한 증오감과 원한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나서 단숨에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이닥쳤는데, 궁성과 궁궐에서는 이를 막아서거나 저지하려는 병사들은 그 누구도 없었다.

궁성으로 들어선 군인들과 백성들은 더 이상의 거칠 것 따위는 없었으며, 궁궐 안까지 들어와 그 원흉이었던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붙잡아서 살해했으며, 사실상 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작자인 중전 민씨를 찾아내서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궁녀 옷을 입고서 궁녀로 변장하여 궁궐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구식 군인과 마주치게 되어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무예 별감으로 있던 홍계훈이 자신의 누이 동생인 홍 상궁이라고 속이면서 그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충주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자택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결국 흥선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호위 하에 부대부인 민씨, 장남 이재면과 함께 입궐하게 되었으며, 고종을 알현하여 사태에 대해 논의한다. 고종은 대원군의 요구대로 이재면을 무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음으로서 다시 흥선대원군의 섭정 통치가 시작되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대원군이 입궐했을때 만세를 불렀고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어 해산하여 귀가시킨다.

대원군은 섭정 통치를 하면서 중전 민씨 지지자들을 모두 파면하면서 그들을 귀양보내거나 처벌했고, 군인들의 밀린 급료 역시 전부 지급했으며 구식 군대에 대한 우대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전에 자신을 지지했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여 조정 관료로 격상시키는 등 고종이 시행했던 부분을 전면 개정하게 되었다. 영의정 홍순목은 원래부터 대원군의 핵심 인사였으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부 구식 군인들이 중전의 시신을 공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자 대원군은 중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중전에 대한 국상(國喪)을 선포하였다.

 

여기까지만 했어도 좀 컸던 민란 수준에서 사건이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종 혹은 중전 민씨가(누가 청병했는지는 후술)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자국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이 청군의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서 그를 톈진(天津)으로 납치 감금한다. 대원군은 청군이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청군은 대원군을 잡은 그 날에 톈진으로 보내버렸다(...)

이에 따라 섭정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중전 민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3일 뒤인 음력 7월 16일, 청군은 또한 구식 군인들이 많이 사는 왕십리와 이태원동을 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였다. 그 뒤 반란을 주도한 11명이 처형당한다. 

한편 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된 일본은 조선에 즉각적인 배상 책임과 보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켜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구식 군대의 반란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등 청과 일본의 이중 외압의 심화를 불러왔으므로 본격적인 조선의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對)백성 사과문과 함께 개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 사건을 끝으로 기존의 개화 반대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림들은 이후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느꼈는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고종도 유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문묘 종사를 받아들여 김집, 조헌 등이 문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후로 벌어지는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스펙타클한 사건이 워낙 많이 일어난지라 임팩트가 크지 않아보이지만, 사실 조선왕조는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회생불가의 상태임이 입증되었다. 유능한 군 지휘부나 왕족에 의해 일어난 정변도 아니고, 정부가 봉급도 제대로 안 줘서 중앙의 하급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들고 일어난 '민란'에 정권이 뒤바뀔 정도로 중앙 정부가 막장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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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7월 23일 정계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을 재기의 기회로 삼으려다 청나라에 막혀 실패하자,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재편된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양무 운동을 본받아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 한다. 정부 주도의 근대 개혁은 큰 재정을 필요로 했는데, 조선의 재정은 삼정의 문란으로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으며 대일 무역 역조, 대청 무역 역조, 그리고 열강들의 각종 이권 침탈로 악화 일로였다. 심지어 정부 재정과 왕실 재정이 분리조차 돼있지 않았고, 양반 면세, 국가 전매 사업의 종친 독점 등 모순은 그대로였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가 파견한 묄렌도르프 등은 당오전을 발행시켜 가뜩이나 어려운 조선 경제를 파탄 직전까지 몰았다. 환율이 올라 무역 역조는 더욱 심화됐고, 지방관들은 원래 유통 화폐인 상평통보로 조세를 거둬 중앙 정부에는 그 오분의 일 가치밖에 되지 않던 당오전의 액면대로 조세를 대납해 그 차액을 착복하는 등 그 난맥상은 극에 달했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들은 일본식 서구화를 부르짖었다가 민씨 척족들의 원한을 샀다. 그들의 개혁 노력은 고종을 감동시켜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 때마다 민씨 척족 등의 수구파들은 개화파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개화파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과 일본의 철수, 그리고 고종의 지지가 개화파를 떠나 난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개화파들은 죽거나 혹 살아 남은 자들은 일본 배 치토세마루 호(千歲丸)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서재필을 제외한 대부분은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갔으며, 망명객들의 존재와 한반도 헤게모니를 두고 청나라와 일본은 늘 외교 문제에 갈등을 빚었다. 일단 청일 양국은 이듬해인 1885년 톈진 조약에 합의해 양국 군대를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군시켰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삼남 지방의 농민 소요가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이미 청나라와 결탁된 민씨 척족들은 청에 원군을 요청하고, 이에 호응해 청나라가 만주에 진주 중이던 군대를 남하시켰다. 동학농민군은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이후 중앙에는 교정청을 지방에는 중요한 재판을 할때 농민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농민자치기구 집강소가 설치되어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전주화약으로 남하하던 청군은 군사를 물렸고 톈진 조약으로 군사파견에 명분이 없어졌지만 일본군은 한반도에 군을 상륙시켜 경복궁을 습격해(갑오왜란) 조선중앙정부기구를 차지한다. 그리고 바로 친일내각을 만들어 교정청을 폐지 군국기무처을 만들어 전주화약으로 만들어놓은 갑오개혁을 간섭하였다. 이후 경쟁하듯 농민군을 학살했다.

어느 쪽의 우위를 쉽게 점칠 수 없을 줄 알았던 청일전쟁은 일본군으로 금세 기울었고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곧 축출됐으며, 황해 해전의 패배로 제해권을 잃은 즉시 요동의 여순 항, 산동 반도의 웨이하이웨이, 대만 등 동중국해의 주요 지점이 모두 일본 손에 떨어졌다. 전황을 계속 끌어 서구 열강들의 중재로 전쟁을 덜 불리하게 마무리하려 했던 청나라의 시도는 너무나 빠른 일본의 진공 속도에 눌려 금세 무산됐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에 망명 중이던 개화파가 모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일본식 개혁을 조선에 이식하려 했는데 이것이 갑오개혁이다.

 

 

근대 일본인들이 본 조선 : 모든 이들이 조선정벌을 원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세계 일주 : 조선인들이 본 서양 세계란?

 

조선과 서양의 만남 : 선교사들이 본 조선, 조선인들이 본 서양문물

독일 여행가가 본 120년 전 조선(1894) : 청일전쟁 전야, 1600만명의 로빈슨크루소

스웨덴 기자가 본 110년 전 조선(1905) : 을사조약 전야, 황당한 의술, 끔찍한 감옥

서양인들이 본 조선의 문제점 : 이래서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온돌의 역사 : 언제부터 온돌을 사용했나? + 헐벗은 민둥산

조선시대 주막 : 주막은 언제부터 생겨났나? + 주막의 이모저모

조선시대 노름 : 왜 조선은 도박에 빠졌나 + 투전의 열풍, 화투의 등장

조선시대 위생수준 : "한양의 길거리는 똥 천지였다."

 

 

 

● 대한제국

1897 대한 제국 선포

조선 자본의 동화 약방, 활명수 출시
서울에 가로등 등장

 
1898 만민 공동회 개최
목포 부두 노동자 투쟁

한성 전기회사 설립 (콜브란과 황실의 합작)
황국중앙총상회 조직

 
1899 대한국 국제 반포
대한국 · 대청국 통상조약

경인선 개통
활빈당 조직(~1905)

 
1900 만국 우편 연합 가입 
종로에 전기 가로등 설치 
대한 제국 정부, 한성 중학교 설립 
한강 철교 준공

 
1902 대한제국 정부, 간도관리사 파견(이범윤)

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 개통

제1차 영 · 일 동맹 : 아시아에 손을 뻗치는 러시아에 대항하고자 동맹을 결성
1904 대한 제국 정부, 엄정중립 선언(1월 23일)

[러 · 일 전쟁의 배경]
러시아는 1890년대에는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을 흡수하면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폴란드에서 동쪽으로는 캄차카반도까지 뻗어 있었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과 존재를 굳건하게 하려 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러시아는 중국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조선과 독자적으로 수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는 영국과 충돌하였으며, 발칸 반도 및 근동에서는 크림 전쟁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양국은 충돌하기에 이른다. 극동 방면에서는 조선과 러시아의 수교를 러시아의 남하로 간주한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였다.

한편,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사상, 기술적인 진보, 풍습 등을 받아들이려 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짧은 시간 내에 고립에서 벗어나 근대화된 산업 국가로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1895년에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에서의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얻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를 견제해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소유하던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되돌려줬고(삼국 간섭), 이리하여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


한 · 일 의정서 체결(2월 23일)

제1차 한 · 일 협약(8월, 고문정치)

보안회 설립(7월)
일진회 설립(8월 20일)

영·불협상 : 영·불 vs 독일 서부전선형성

러 · 일 전쟁(2월 8일) 
1904년 2월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 충돌이었다. 러일 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 최초의 세계대전, 러일전쟁(유튜브)

일본으로서는 1894년에 치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10년 만에 대국(大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식민지배의 기반을 마련하고 사할린을 획득하는 등 큰 이익을 보았다.

-. 러일전쟁 후에 일본인들이 폭동 일으킨 이유


1905 화폐정리사업(6월, 재정고문 메가타 주도)
가쓰라-태프트 조약(7월)
제2차 영 · 일 동맹(8월) 
포츠머스 강화조약(9월)
을사조약(11월, 외교권 박탈 · 통감정치)
을사의병(평민 의병장 등장)

경부선 개통
이용익, 보성 학교 설립(서울) 
동학, 천도교로 개칭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게재


 
1906 통감부 설치 (초대 통감 : 이토 히로부미)

경의선 개통
대한자강회 발족 
이상설, 서전서숙 건설(북간도 용정)

 
1907 고종, 헤이그 특사 파견
한 · 일 신협약(7월, 정미 7조약 - 차관정치)
고종 황제 퇴위, 군대 해산
정미의병 
국채 보상 운동 전개

호서학회, 호남학회 설립
보안법, 신문지법 제정 
신민회 설립
지석영 · 주시경, 국문연구소 설립

삼국협상: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독일에 대항하고자 협상
1908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 작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기호흥학회, 서북학회, 관동학회 설립 
사립학교령 발표 
신채호, 『독사신론』펴냄

 
1909 기유각서(사법권 박탈, 감옥사무 이관)

일본, 청과 「간도 협약」 맺음(9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10월)
 → 사라진 이토 히로부미 저격영상을 찾아라

이승만, 대한인국민회 창설(하와이) 

나철, 대종교 창시

 

 

 

● 일제 식민지배기

1910 한국 경찰권 위탁각서(6월, 경찰권 박탈)

국권 피탈(한일합방, 8월29일)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강제적인 한일병합조약을 통과시키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조선인의 반발을 염려해 29일에 조약 내용을 공시하면서 햇수로 36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광무군 중 일부, 숭무학교 건설(멕시코) 
이상설 유인석, 성명회 창립(블라디보스톡)

문고판의 효시인 육전 소설 등장
주시경, 국어문법 간행

 
1911 105인 사건 발생(9월) 
신민회, 경학사 건설(서간도 삼원보) 
원호인, 블라디보스톡에서 전로한족중앙회 창설

제1차 조선 교육령 발표
사찰령 발표. 회사령, 산림령, 어업령 제정
→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 지배했었나?


청, 신해혁명 발발 
→ 중화민국 수립
1912 토지 조사 사업(~1918)
독립 의군부 조직 
→ 이종덕, 권업회 창립(블라디보스톡)

 
1913 안창호, 흥사단 조직(샌프란시스코)

 
1914 박용만, 조선국민군단 창설(하와이)
이상설 · 이동휘,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권업회가 모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918) : 사라예보사건

마른전투: 1차대전의 지옥같은 서부전선(참호전)이 마른전투를 기점으로 형성됨.
→ 탱크와 전투기, 잠수함(유보트)의 등장
베르딩전투: 독일의 몰빵작전에서 패배

1차세계대전 요약

1915 조선 국권 회복단 조직(임병찬)
대한광복회 조직(박상진, 김좌진)

광업령 제정 
사립 학교 규칙 발표 
포교 규칙 제정
박중빈, 원불교 창시

 
1917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대동 단결 선언

러시아 10월 혁명(볼세비키혁명) -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과 러시아의 동부전선이 사라짐.
→ 레닌에 의한 러시아의 공산화

4월 미국의 참전

1918 임야 조사 사업 시작
대한(무오)독립선언서 발표 (11월, 대종교)
김규식 여운형 등, 신한청년단 창립(상하이)

서당 규칙 제정

독일 군항 반란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 '독일의 11월혁명'으로 바이마르공화국탄생
→ 독일 항복 → 칭타오가 일본에 넘어감

미국 대통령 윌슨, 14개조 평화 원칙 발표

1919 2 · 8 독립 선언
3 · 1 운동

대한 애국 부인회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상해, 4월 13일)

김원봉, 의열단 조직(만주 길림)
보합단 조직(평북)
최시흥, 천마산대 조직 (평북, 유격전 전개, 대한통의부에 편입)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 체결
중국, 5 · 4 운동 
1920 봉오동 전투(6월) : 중국 왕청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
-. 홍범도 장군 등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
-. 장군(홍범도)의 귀환(2021.8.16), 청와대 유튜브 
-. 홍범도 장군에게 경례하는 마지막 광복군 김영관 애국지사

청산리 대첩(10월) : 북로군정서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하여 대규모 승전을 거둠

간도참변(10월~)

조선 총독부, 산미 증식계획 수립(~1934)

이명서, 구월산대 조직
대한독립군단 조직 (소만국경 밀산부) → 자유시 이동

조선 · 동아 일보 창간

 
1921 자유시 참변 발생 : 1921년 6월 27일에 극동 공화국 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 인근인 수라세프카에서 독립군 무장 병력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을 당한 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 정세 오판과 사욕이 빚은 비극. ‘자유시 참변’의 진실
-. '자유시 참변'처럼 참변 당한 기록 없을 것
-. 간도참변, 자유시참변 과 홍범도장군 (유투브)

조선어연구회 설립

중국, 공산당 창당
1922 물산 장려 운동
조선 물산 장려회 결성(평양, 조만식)
제2차 조선교육령 발표 
어린이날 제정(천도교)


 
1923 상하이에서 국민 대표 회의 개최
일본, 조선 내의 관세철폐
암태도 소작쟁의 발생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완성 
민립 대학 설립 운동
형평사 창립

관동 대학살

중국, 제1차 국공 합작 (for 군벌타도)
1924 조선 청년 총동맹 결성
육군주만참의부 결성(임정 직할)
정의부 결성(남만주 일대)
총독부, 경성제국대학 설립

 
1925 치안 유지법 공포

조선 공산당 창립

임정,'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 (4월 7일, 2차 개헌 - 내각중심의 국무령체제)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 청구학회 결성

미쓰야 협정 (만주 군벌 장쭤린 -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1926 6 · 10 만세 운동
김구,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나석주 의거

대중가요 시작 (윤심덕 '사의 찬미' 발표)
나운규 감독, 아리랑 상영

 
1927 신간회 창립(2월, ~1931)
조선 농민 총동맹 조직(9월 6일)

중국의 장 제스, 난징 정부 수립
1929 원산 노동자 총파업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조선일보, 문자보급 운동 시작

세계 경제 공황
1930 혁신의회 조직(한국독립군 결성)
의열단, 레닌주의정치학교 설립

 
1931 만보산 사건(7월)
만주 사변(9월), 만주국 수립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 시작
최현배 · 이윤재, 조선어 학회 결성





1932 김구, 한인 애국단 조직(12월)

이봉창 의거(1월)
윤봉길 의거(4월 29일) 

조선혁명군(양세봉), 영릉가 전투(3월)
한국독립군(지청천), 쌍성보 전투(9월)

조선 소작 조정령 제정

제1차 상하이사변(3월)
1933 농촌 진흥 운동(~1940)

조선어 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한국독립군, 대전자령 · 동경성 전투(7월)
항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결성(+ 중국 공산당 유격대)

 
1934 조선 농지령 공포
진단 학회 조직

 
1935 총독부, 각 학교에 신사 참배 강요

민족혁명당 결성(7월)
조소앙, 한국독립당 조직(9월)
김구 · 이동녕, 한국국민당 조직(11월)

첫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상영

 
1936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사회주의계열, 조국광복회 조직 (좌우합작의 성격, 국내와의 연결망 구축)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

중국 공산당 대장정 (~1936)
1937 총독부, 황국 신민 서사 제정
스탈린, 블라디보스톡의 한국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지청천, 조선혁명당 조직(2월)
김일성, 보천보 전투(6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조선민족전선연맹 확대 결성

최현배, 『우리 말본』 완간

중 · 일 전쟁

제2차 국공 합작 (for 일제타도)
1938 총독부, 국가총동원령 발령
일제, 조선어 교육 금지
제3차 조선 교육령 발표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 창설
(10월 한커우에서, 국민당 정부 지원)

 
1939 국민 징용령 실시

전국연합진선협회 성립과 김구 · 김원봉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 발표

제2차 세계대전(~1945)

2차세계대전 요약(유튜브)


1940 일제, 일본식 성명 강요 (창씨개명)

임정, 한국 광복군 창설 
임정, '대한민국 임시약헌' 선포 (10월 9일, 4차 개헌 - 주석중심제, 주석 : 김구)

 
1941 대한민국 건국 강령 발표(11월) 
임정, 대일 선전 포고(12월 9일) 

대서양 헌장 발표

태평양 전쟁(1941~1945)

태평양전쟁 요약(유튜브)
태평양전쟁 분석(국방TV) - <1>, <2>, <3>


1942 김두봉, 조선독립동맹 조직 · 조선의용군 창설(8월 15일)

조선어 학회 사건

 
1943 한국 광복군, 인도 · 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공동 작전 전개 카이로 회담(11월)
한국의 독립 최초확인(미.영.중)

1944 미곡 강제 공출제 실시(6월)
여자 정신대 근로령 공포(8월 23일)

임정,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 (4월22일)
임정,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발표(8월)
여운형, 건국 동맹 결성(8월 11일)


 

 

식민지 근대화론 vs 식민지 수탈론 : 일제에 의해 조선은 근대화됐는가?
100년 전 이 땅에 들어온 신기한 물건들 : 조미료, 초콜릿, 비누, 치약
일제강점기 히트 상품 '고무신'

조선을 떠나며 : 해방 이후 조선 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 미 ·  소 군정기

1945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조직(8월, 여운형 안재홍 중심)
: 건국치안대 조직, 식량확보 등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 민주주의 정권 수립, 대중 생활의 확보)


8 · 15 광복 
8.15 해방일의 진실 + 미국은 한국을 패전국 대하듯 했다
→ 전후 미국은, 일본은 간접통치를 한국은 직접통치를 했다.
한반도는 왜 분할 됐을까? : 원자폭탄이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다
광복 사진 모음


-. 어이 없는 일왕의 1945년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


-. 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38도선 분할 (8월 - 소련군 진주, 9월 - 미군 진주)
조선인민공화국 선포(9월 6일) 

미 군정 실시(9월) : 한국의 모든 정치단체 부정.

모스코바 3상회의(12월) : 임시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신탁통치 결정
최악의 신탁통치 오보사건(동아일보) : 이승만과 김구 때문에 조국이 분단되다


얄타 회담(2월, 미.영.소)
→ 소련참전, 38선 논의

포츠담 선언(7월 26일)
한국의 독립 재확인, 미.영.중.소

UN 창립(10월 24일)

모스크바 3상회의(12월)
(미.영.소 외상)
1946 비상국민회의(2월, 민족주의 계열) : 반탁운동
→ 이승만, 김구, 김규식, 한민당 등 당시 우익들이 결성하고 미군정의 지지를 얻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2월, 위원장 김일성) : 모스코바 3상회의 지지
북한, 토지개혁 단행(3월)

제1차 미 · 소 공동 위원회 개최(4월) : 정부수립 논의 (참여단체 문제로 대립, 결렬)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한 반발로 9월 총파업, 10.1 대구봉기
해방후 민중들의 처참한 삶 + 그많던 좌익들은 어떻게 소탕되었나?

미군정의 귀속재산분배(미군정에 의해 접수된 일본인들의 재산 분배 : 적산(敵産)분배)
귀속재산불하 : 친일파들이 부자가 된 이유 + 우리나라 재벌의 출발점

이승만, 정읍 발언(6월) : 남한 단독정부 수립

김규식 · 여운형, 좌우합작위원회 결성(7월) : 좌우합작 7원칙 발표
  -.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 토지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
  -.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상의, 결정, 실시 할 것.

한반도 분단의 진짜 원인 : 백범 김구는 과연 민족을 생각했을까?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구성(12월)

 
1947 제2차 미 · 소 공동 위원회 개최 (5월, 서울 평양) : 결렬
미군정,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 (6월 3일)

미국, 한반도 문제 UN 상정 (9월)
2차 UN 총회, 한국문제 결의안 (11월) :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 결정

여운형 암살(1947.07.19) 나무위키 : 비장(悲壯)!_거목은_쓰러지다
-.
미군정, 여운형 피살 위험 알고도 나몰라라


트루먼 독트린 발표
앞으로 미국은 반공을 표방한 정부에 대해서는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 → 마샬플랜
: 냉전의 성립 (대 소련 봉쇄정책)

 

 

● 제 1 공화국

1948 UN 선거위원단 입국 : 북한은 거부
-. “조선 건국, UN이 나설 테니 미·소군 나가라”...유엔 첫 상정과 결의·첫 내한

2 · 7 구국투쟁
: 남조선 노동당 남조선 단독정부수립 반대
-. 2 · 7 투쟁, 그건 구국투쟁이었어

UN 소총회, 남한만의 총선거 결정(2월)
김구·김규식 남북협상 제의(2월) - 김구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제주도 4 · 3 사건 발생
-. 제주 4.3 학살 사건을 아시나요?  -. 클리앙

8·15광복 직후에는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었다. 귀환한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고,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 극심한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로 인한 식량난 등이 겹쳐 민심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였으며, 민생이 피폐한 상황에서도 군정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처럼 복합적 요인이 혼재한 상황에서 1947년 이른바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여 제주 4·3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주 4·3 사건 [濟州四三事件] (두산백과)

남북지도자회의(4월, 남북연석회의) : 김구 김규식 - 단독 선거 반대 투쟁

5 · 10 총선거 실시(남한)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제헌헌법 공포(7월 17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당선(7월 20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8월 15일)

북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9월 9일) : 민족 분단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9월 22일)

여수 · 순천 10 · 19 사건 발생
제주 4.3 사건 + 여순사건 : 이승만은 왜 학살을 명령했는가? 

국가보안법 제정(11월)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이후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단체를 구성하는 등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각종의 행위를 처벌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3차 UN총회(12월) : 남한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
-. 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1948년 파리 유엔 총회

 
1949 농지 개혁법 공포(6월 21일) : 3정보 기준, 유상 매입, 유상 분배
농지개혁 : 대한민국이 평등해진 이유 + 학구열이 나타나게 된 원인

미군 완전 철수(6월)

6 · 6 사건(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 습격 당한 ‘친일 청산’…6월 6일은 ‘국치일’

국회프락치사건 발생 (9월, 김약수)

김구 암살 : 김구 암살 사건 정리 <1>, <2>
-. 안두희, 곽태영이 안두희를 응징, 박기서씨의 '정의봉' 
-. 김구 암살한 안두희, 무기징역 1년 뒤 거리 활보한 배경은
-. 미국 자료를 통해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진상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쟁 발발 1년 전 : 친일청산을 못한 이유 + 공갈포의 비극

1949년 초부터 주한미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이승만은 몹시 불안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에 위기감을 조성하고자 "전쟁만 발생하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같은 공갈포를 남발하는가 하면 38선 부근에서 군을 동원하여 북한군 초소를 공격하는 등 지엽적인 도발을 지속적으로 일으켰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개의치 않고 6월에 철수를 완료하자 절망적인 이승만은 더욱더 극단적이 되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반민특위 해산, 국회프락치사건, 보도연맹 조직, 학도호국단 조직, 김구 암살 등을 벌이지만 미국은 이승만에 실망한 나머지 계속 냉담하고 말썽꾼이란 이미지만 가지게 된다. 

그러자 이승만은 위기감을 더욱더 극대화하기 위해 38선에서 연대급 병력까지 동원하며 도발을 감행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남한 내 비밀조직과 빨치산 활동을 통한 내부 붕괴 방식에 더 초점을 두고 있던 김일성을 자극하여 남침을 기획 실천하게 만들게 된다.


중화 인민 공화국 선포

쏘련 핵실험 성공(8월)
1950 한국 전쟁 발발(1950.6.25~1953.7.27) : 

인천 상륙 작전 (9월)
중공군 개입 (11월)

한국전쟁의 원인 : 소련 비밀문서(일명 옐친문서)로 확인된 사실들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2화 : 심리전, 3화 : 판문점

1948년 2월 인민군을 창설한 북한은
1949년 봄부터 중국 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의용군 2만 여명을 흡수 전투력 급상승.
1949년 6월 소련으로부터 야포 장갑차 전투기 함선 등의 무기를 대량으로 공수 받는다. 게다가 병력도 20만에 가깝게 증원하고 있었으니, 이때부터 화력면에서 북한은 남한의 10배, 병력면에서 2배를 웃돌고 있었다.

1950년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5월 베이징을 방문해 쏘련과 중국의 전쟁 승인을 받은 후 모든 남침 준비를 끝내고 6월 7일 김일성은 남한에 연막작전을 펼쳤다. 평화통일과 8월 총선거를 제안한 것이다. 이는 스탈린의 코치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군이 방심해진 틈을 타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이 3일만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장담하며 전면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하게 된다. 이후 한반도는 약 3년간의 길고도 잔혹한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난감했지만 쏘련과 중국은 미국의 참전이 나쁘지만 않았다. 미국을 한반도에 붙잡아두고 쏘련은 동유럽을, 중국은 티벳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6.25로 이득을 본 건 쏘련과 중국 일본이고 남북은 쪽박만 찬 꼴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 1호 피난민' 이승만 + 인공치하의 서울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전쟁과 학살 : 노근리 사건 + 보도연맹 사건 + 함정학살
낙동강 전투 : 청년들은 피를 흘리고, 부유층은 나 몰라라
인천상륙작전 + 서울수복 : 피비린내 나는 '부역자 색출'
한국의 북한점령 50일 : 깡패들이 북한을 통치했다, 신천 학살사건
사상 최악의 동계전투 '장진호 전투' + 전쟁의 기적 '흥남철수'

애치슨 라인 발표(1월)

UN, 한국 파병 결의
1951 1월 : 중공군 개입, 유엔군 후퇴(1.4후퇴) : 말리크 휴전 제의(6월)
1.4 후퇴와 국민방위군 사건 : 50만명 '해골의 행렬'

한국전쟁 원자폭탄 투하 계획 + 맥아더를 물먹인 '지평리 전투'
한국전쟁 최대굴욕 '현리전투' + 정전협상의 신경전
지리산 빨치산 토벌 : '골로 간 사람들' 거창양민학살 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1952
이승만의 친위쿠데타 '부산정치파동' + 미국의 이승만 제거 계획
한국전쟁 미국의 세균전 + 융단폭격으로 '가루가 된 북한'
이승만라인과 독도밀약 : 독도는 과연 우리땅인가? 왜 우리땅인가?
한국전쟁과 숭미사상 : 꿀꿀이죽, 양공주, 기브 미 초콜릿

1차 개헌(발췌개헌, 7월 4일) : 대통령 직선제 - 5.26 부산 정치파동
이승만, 제2대 대통령 당선(8월 5일)

 
1953 제1차 화폐 개혁 실시(2월 15일)
이승만정권 반공포로 석방(6월)

휴전 협정 조인(7월 27일)
한 · 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10월)

전쟁포로 :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 + 북한의 국군포로
이승만의 최대도박 : 반공포로 석방 +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 최후의 전투 '금성전투' + 포로송환 '벌거벗었던 포로들'
한국전쟁의 양면성 : 한국인 1/8이 죽었던 전쟁 + 일본의 경제를 살린 전쟁
한국전쟁 이후 달라진 한국인 : 교육열, 대충대충, 빨리빨리
전후 국민들의 삶 : 통화개혁, 연좌제, 농촌의 몰락
50년대 한국의 대외관계 : 3차 대전을 부르짖던 이승만 + 약소국의 비애


 
1954 2차 개헌(사사오입 개헌, 11월 29일) :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
이승만의 영구집권 정치쇼 : 사사오입 개헌

정부, 교육열에 찬물을 끼얹다 : 한글간소화 파동 + 학생의 정치도구화
50년대 성개방 풍조 : 자유부인 사건, 박인수 사건, 씨받이 면회
군수품을 훔쳐먹던 50년대 사회 : 사바사바, 얌생이, 정치자금 비리
이승만의 우상화 정치 : 이승만 왕조, 80회 탄신일, 인의 장막
북한의 전후 복구 : 빠른 경제회복 + 집단농장으로의 전환
원조경제의 그늘 + 50년대에 재벌이 될 수 있는 방법
50년대 종교 세태 : 불교정화사건 '할복한 승려' + 기독교는 국교인가?
이승만 반공독재 : 국가종교 '반공' + 반일은 곧 반공 + 4대 강국론


 
1956 이승만, 제3대 대통령 당선(5월 15일)

이승만의 3번째 집권 : 우의마의 소동, 혈서 탄원서, 신익희 사망
이승만과 군부의 갈등 : 쿠데타 계획 + 김창룡 저격 사건
'폭력정치'와 야당탄압 : 장면 저격 사건 + 장충단 집회방해 사건
50년대 언론 세태 : 괴뢰 이승만, 견(犬)통령, 경향신문 폐간

 
1957 북한, 천리마 운동 :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우리말 큰사전 완간

50년대 주한미군 : 핵무기 배치, 미군 범죄의 기승, 인종차별


 
1958 진보당 사건(1월 13일) : 조봉암 제거
진보당 사건 : 조봉암은 간첩인가, 정권의 희생양인가? 

경향신문 폐간사건(4월 30일)
국가보안법 개정안 통과(일명 '보안법 파동',12월)

김일성 독재 체제의 확립 : 8월 종파 사건, 천리마운동, 로력영웅 

무상원조를 유상차관으로 바뀜 → 경제 불안정


 
1959 재일교포 북송 사업 : 50년대 재일교포들은 북한을 택했다
정치깡패의 시대 '주먹들의 전성기' + 부정선거의 서막 


 

•  농지 개혁 by 제헌헌법
-  유상매입: 3정보 이상의 토지 매입, 현금 대신 지가 증권을 지급
-  유상분배: 1년 생산량의 150%를 5년 분할 상환
-  식민지 지주제 청산, 자작농 증가

•  귀속재산 처분
: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  원조 경제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원조 – 면화, 설탕, 밀가루 → 삼백산업의 발달
1958년 무상원조를 유상차관으로 바뀜 → 경제 불안정

 

 

 

 

  2 공화국

1960 이승만, 제4대 대통령 당선(3월 15일)
3.15 부정선거 → 4.19혁명 → 과도내각 수립(수반 - 허정)
3.15 부정선거와 3.15 마산의거 : "총은 쏘라고 준 것이다"

4 · 19 혁명 : 국가재건최고회의 구성
4.19 혁명 : '사진 한 장'의 힘 +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압박
이승만의 하야 + 4.19의 평가 : 4.19는 과연 혁명이었나?
가짜 이강석 사건 + 이기붕 일가 집단자살 사건

허정 과도정부 : 무임승차한 민주당, 미국의 내정간섭, 우쭐대는 대학생
민주당의 진흙탕 싸움 : 집단 난투극, 모시기 경쟁, 분당

3차 개헌 (내각책임제 ·양원제, 6월 15일)

장면 내각 설립(제2공화국, 8월)

4차 개헌 : 소급특별법(3.15 부정선거자)




 

 

쿠데타는 필연적이었나? : 장면 정부의 무능한 軍정책 + 콜론보고서
진퇴양난의 장면 정부 : 소급입법 개헌, 경찰의 태업, 민주당의 부패
장면 정부의 경제 제일주의 : 왜 장면은 박정희가 되지 못했나?
'2대 악법('반공법'과 '데모저지법')' 반대시위 : 불공정한 한미경제협정으로 반미 감정의 고조 + '김일성 만세'까지 외치다
쿠데타 이전까지 박정희는 무엇을 했었나 : 일본군 장교, 남로당 군책, 쿠데타 음모

 

 

● 박정희 군정기

1961 2공화국의 끝자락 : 2공화국을 망친 주범, 허탕친 4.19 1주년 쿠데타

5 · 16 쿠데타

군사혁명위원회,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

5.16 쿠데타 : 역사가 바뀐 날 + 어떻게 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나?
5.16 쿠데타와 미국 : 미국이 유도한 쿠데타? 사주한 쿠데타?
군사정부의 혁명은 포퓰리즘인가? : 깡패 소탕, 거지 소탕, 병영국가 만들기
중앙정보부의 출범 : "중정을 모르면 박정희 정권을 알 수 없다"
토사구팽 당한 바지사장 '장도영' + 박정희가 '재벌(부정축재자)'을 살려준 사연
박정희의 좌익 콤플렉스 :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과거 세탁, 반공법 제정
황태성 사건 : 왜 밀사를 간첩으로 조작했나? 최초의 남북 비밀회담
박정희의 일본 '비밀방문' + 미국 방문 '현대판 조공책봉'


 
1962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6)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진실 : 박정희가 과연 우리 경제를 성장시켰나?

제2차 화폐 개혁 실시(6월 20일)

군인들이 망친 경제 : 우리나라는 어떻게 수출위주 성장으로 전환했을까?
박정희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 워커힐·새나라 자동차·빠징고 사건(4대 사건)

김종필 - 오히라 메모(11월 12일)



단기법 대신 서기법을 사용

5차 개헌(대통령중심제 단원제 복원, 12월)

북한, 4대 군사노선 채택 :
전 인민의 무장화, 전 국토의 요새화, 전 군의 간부화, 전 군의 현대화

 

 

60년대의 대중 문화 ① : TV 방송의 시작과 라디오의 대중화

최초의 라디오(진공관)

TV 방송의 시작 : (61.12.31) 당시 TV보급대수는 5천 대 밖에 안되었으며 전국민의 0.1%만이 가지고 있었다. 
1966년 처음으로 국산 TV가 생산되면서 TV 보급률은 빠르게 증가하게 된다.


라디오의 대중화 : 1959년 금성사에서 라디오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라디오 보급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국내업체의 보호를 위해 장면정권은 외국산 라디오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60년대의 대중 문화 ② : 한국 영화의 황금기 + 문예영화와 반공영화의 시대
신상옥감독은 자신의 아내인 톱스타 최은희를 춘향으로 내세워 컬러영화 '성춘향'으로 전대미문의 히트를 치면서 군사정권에 호응(반공영화)도 잘하여 60년대를 주름잡았다.

 

 

60년대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한 비결 + '이촌향도'의 심화
당시 세계는 연평균 5.5%라는 놀라운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류 최고의 황금기에 우리나라는 농촌을 떠나온 풍부한 노동력까지 있었으나 기업들은 사업을 할 자금이 없었다. 이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이었다. 이 행운을 잡고 기업들은 내수 보다는 수출에 중점을 두고(선진국의 호황) 날개를 달자 근로자 추가 고용 등으로 실업률이 낮아지자 내수도 동반 성장을 하게 된다. → 외자도입에 기업이 사활을 걸게 되자 정경유착이 생겨나게 된다.

60년대 북한 : 북한의 고도성장은 어떻게 무너졌나 + 주체사상의 등장

 

60년대 교육 현실 : 무즙파동, 국6병, 각성제(타이밍)를 먹던 학생들
60년대의 교육열 : 일류병, 우골탑, 치맛바람
무즙파동(1964년 중학교 입시) → 무즙 덤으로 부정입학(덤입학, 뒷문입학)
창칼파동(1967년 중학교 입시), KS(경기고-서울대)병, 국6병(중학입시)

 

수출제일주의 : 한국을 성장시킨 '수출' + 한국을 골병 들게한 '인플레이션' → 변동환율제도 도입, 수출 유인책
박정희와 삼성의 애증관계 : 삼분 폭리 사건, 사카린 밀수사건, 김두한 똥물투척
산림녹화사업 : 우리나라는 어떻게 민둥산에서 벗어났나? + 인간 송충이 사건

 

 

 

● 제 3 공화국

1963 공화당 창당, 군정 연장 파동, 대통령선거

박정희, 제5대 대통령 당선(10월 15일)
가장 치열했던 63년 대선 : '좌익'의 지지를 받고 당선된 박정희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 : 경제성장은 과연 누구의 공인가?


 
1964 6 · 3 항쟁 : 한일협정 반대 시위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사건, 8월) :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국가전복을 도모한 혐의로 탄압 받음.



 
1965 한 · 일 기본조약 체결(일명 '한일협정')
한일협정의 진실 : 한일 협정은 무엇이 문제였나? 왜 졸속·굴욕 외교였나?

6개의 일본기업들이 61~65년 사이 당시 민주공화당 예산의 2/3 수준인 6천6백만달러를 제공했다.
-. 日기업 6곳, '朴 대선자금' 제공후 한일협정 체결돼
-. [CIA 기밀보고 해제] 박정희, 한일협정때 6600만불 뇌물 받음


베트남 파병
'월남 파병'의 실체 : 가짜 지원병, 미군의 용병, 월남특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 한국군은 왜 그토록 잔인했을까?


 
1966 브라운 각서 체결(3월)
  -.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경제발전과 한국군의 현대화에 필요한 지원을 약속

한 · 미 행정 협정 조인(SOFA협정, 7월 9일) 
60년대 '미군의 범죄'와 SOFA + 닉슨을 문전박대했던 박정희

박정희의 국가주의 : '개발독재'의 완성 과정 + 일제 군국주의 잔재인가?



중국 문화혁명
십년 동란(十年動亂)
(1966~1976)
: 모택동은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가 공산당과 중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생들이 홍위병이 되어 대규모 파괴운동을 벌였다. 1969년 등소평의 인민해방군이 질서를 회복하기 전까지 온 나라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1967 박정희, 제6대 대통령 당선(5월 3일)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1)

반공독재와 체제경쟁 : 신금단 부녀상봉 + '위장간첩 이수근'의 실체
박정희와 지역주의 : 영호남 지역감정의 시작

6.8부정선거와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 국가 테러리즘 + 부정선거 물타기

당포함 사건: NLL을 넘어 조업하던 우리측 어선들을 보호하던 군함(당포함)을 북한 경비함이 유인하여 북한 해안포로 격침시켰다. 이후 북한의 도발이 과감해졌다.

서울 도심 개발 : 전세계에 생중계된 서울 '판자촌' + 모래톱 '여의도'의 변신


 
1968 1 · 21 사태(일명 '김신조 사건') :
청와대 앞 500m까지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68년 1월 17일 개성을 출발한 북한 무장공비(124부대) 31명은 국군 복장으로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무장을하고 침투 4일만에 청와대 앞까지 왔으나 자하문검문소에서 들통나 총격전이 벌어지자 공비들은 북한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들 공비를 소탕하기 위한 군경 합동작전이 열흘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그 결과 29명의 공비가 사살되고 1명(김신조)이 생포되고 나머지 1명만이 무사히 북한으로 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군인들과 귀갓길 시민 등, 32명이 목숨을 잃었고 52명이 부상을 입고 주한미군 4명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을 빌미로 박정희는 북침을 할려고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무산된다. 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6.8부정선거, 동백림사건 등이 잠재워 지게 되며 이후 '반공'은 지상명제가 되면서 박정희의 권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야당의 입지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일로 향토예비군주민등록증 제도가 생겼으며 교련교육이 시작되었고 전경 창설, 군복무 6개월 연장, 팀스피리트훈련 등 우리사회 전체를 바꾸게하는 기점이 되게 된다.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
왜 북한은 미군 군함을 나포하고 비행기를 격추시켰나?
1월 23일 해양 조사선으로 위장한 미군의 첩보 함선 '푸에블로'호가 원산앞바다에서 나포되어 1명 사망 82명이 포로가 된다. 1.21사태 이틀후의 일이다. 이에 미국은 항모를 원산에 파견하는 등 북한을 겁박하였으나 1주일 뒤 베트남에 구정대공세가 벌어져 미국대사관이 습격당하는 등 전쟁이 격화되자 미국내 반전여론이 급등하게된다. 그러자 미국은 자존심을 구겨가며 북한과 1:1 협상을 하게 된다. 협상 1년만에 미국은 사과문에 사인을 하고 포로들을 돌려 받았다.

통일혁명단 사건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 
반공영웅이 된 '이승복의 진실'
68년 8월, 남한에서 활동 중인 북한의 지하비밀 조직, 통혁당(수괴 김종태)이 발각되어 남한에 구축하려던 지하당 조직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군부 강경파들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북한에서는 '군사적 모험주의'가 새롭게 득세하게 된다. 이에 김일성은 그해 10월말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삼아 남한내에 제2전선을 구축하기로 하고 인근 주민들을 포섭하여 세를 확산하고 남한의 후방을 교란하고자 120명에 달하는 공비들을 강원도와 경북 산간지대로 침투시켰다.

공비가 침투한 지 사흘 만에 군 당국에 신고되었고 대책 본부는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전면적인 소탕작전에 나서게 된다. 군은 작전 개시 4주 만인 11월 말에서야 총 58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게 되었고 12월 말까지 110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하고 2명이 자수를 하게 된다. 살아서 돌아간 공비는 3명뿐이었다. 반면에 11월까지 남한 측 희생은 군인 33명, 민간 16명 사망, 부상 37명이었다. 하지만 12월 경 대량 희생이 발생해 이후의 아군 피해는 비밀로 해버렸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공비 소탕 작전이 연일 펼쳐지던 12월 9일 밤. 쫓기던 무장공비들이 강원도 평창의 한 민가에 침입했다. 바로 이승복 어린이의 집이었다. 여기서 학살을 저지르고 공비들은 산으로 도망쳤지만 다음날 대책본부는 시체들을 치우고 현장을 기자들에게 공개를 하게 된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승복 어린이는 공비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크게 외쳤고, "그러자 공비들은 승복의 입을 칼로 찢어 살해했다." 고 괴이한 기사를 내었다. 이 기사는 조작 보도의 혐의가 짙었지만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후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북파공작원 특수부대 '설악개발단 창설'
북파공작원 : 혹독한 훈련과 죽음의 침투 + '국가'로부터의 배신

국민 교육 헌장 선포

 
1969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1969.4.15)
북한이 미 정찰기(EC-121)의 경로를 미리 파악하고 당시 최고속의 미그21을 동원해 미군기를 격추시켜 탑승자 31명 전원이 전사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수그러들고 화해 무드가 조성되어가고 있던 때 였고 또한 전쟁의 종식과 사회 안정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집권한 닉슨이었기에 처음에는 강력한 무력 시위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여론이 식자 슬그머니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후 한미군사동맹이 강화 되어 팀스피리트훈련, 예비군 제도 등이 생겨났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F-4 팬텀기가 남한에 도입되게 된다. 따라서 북한은 국방비에 대한 엄청난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닉슨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점차 한미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미국은 69년 5월 '닉슨독트린'을 주창하면서 지긋지긋한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때려고 했으며 아시아 국가들의 문제는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바랬다. 또한 소련과 중국은 서로 미국과 관계개선(데탕트)을 모색하려 함에 따라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도 점차 줄여 나가자 한국 역시 국방비에 대한 부담을 점점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한국은 북한의 초소를 박살내는 등 시도때도 없이 '보여주기식 도발'을 감행해 한반도의 위기를 부각시키려고 했지만 덕분에 우리 북파공작원이 7천명이나 전사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70년대의 남북한을 두고 '적대적 공존관계'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남북한이 번갈아가며 서로를 도발하여 일면 싸우는듯 보였어도 실제로는 서로를 돕고 사는 관계였다는 것이다. 서로의 권력독재를 위해서.

주문진 무장공비 사건(4월)
흑산도 간첩 침투사건(6월12일)
북한의 무장공비 남파는 계속되었지만 침투작전은 번번이 실패했고 소련과 중국은 이런 북한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국제적으로 부정적인 인상만 심어주고 있었다. 결국 69년 5월 김일성은 다시 예전의 '평화공세 노선'으로 복귀하게 된다.


6차 개헌(3선개헌, 9월) : 중임제한 폐지
박정희의 3선 개헌 과정 : 박정희는 어떻게 '장기독재'를 할 수 있었나?

KAL기 납북 사건(12월)

강남 개발의 시작 : 강남 개발의 목적과 검은 비밀


닉슨 독트린 발표
 -. 냉전의 완화
 -. 자주국방 계기
1970 8.15선언 : 평화통일 구상 선언

새마을 운동 시작 

경부고속국도 개통세계에서 가장 싸게, 가장 빨리 그리고 부실 시공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 희대의 날림공사와 군사작전식 개발의 비극
정인숙 살해사건 → 범인은? 밤의 정치 '요정정치'
전태일열사 분신사망(11월 13일) → '선성장 후분배'가 가져온 참상
  -. 근로기준법 준수 요구

 
1971 박정희, 제7대 대통령 당선(4월 27일)
박정희 vs 김대중 : '40대 기수론'과 '71년 대통령선거'

광주 대단지 사건 - <1><2><3>

실미도 사건(8월)
남북 적십자 회담 첫 개최(8월 20일)

사법파동(7월)과 10.2 항명파동 그리고 교련반대운동(10월)과 국가비상사태



중국의 UN 가입
대만 축출
 
60년대 후반에 연달아 일어났던 북한의 도발



 

 

기적의 쌀 '통일벼' 왜 농촌은 더 힘들어졌나? + 70년대 '쌀 덜 먹기 운동'

 

 

 

● 제 4 공화국

1972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6)

7·4 남북공동성명 (자주,평화,민족대단결) → 남북조절위원회 설치
남북 적십자 회담 개최

8.3 사채동결 조치 : 사채를 쓴 기업에 특혜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

7차 개헌(유신헌법, 10월) →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이유

박정희, 제8대 대통령 당선(12월 23일)

닉슨, 중국 방문
1973 6 · 23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선언, 남북한 UN 동시가입 촉구)

긴급조치 1호 발표
김대중 납치 사건(8월)
유신반대운동 '100만인 서명운동'
윤필용 사건, 꼭두각시 국회 '유정회'

1차 오일쇼크 : '중동특수' 세계는 울고 한국은 웃다 - 50~60년대의 기나긴 세계 호황기의 마침표를 찍었으며, 평균 9%의 고도성장을 만끽하던 일본은 오일쇼크를 계기로 성장이 폭싹 꺼져버렸다.

미군 '기지촌'과 일본인 '기생관광'


1차 오일쇼크
1974 민청학련 사건(4월): 인민혁명당 재건사건
유신정권 최악의 '용공조작'과 '사법살인'

긴급조치 선포

박정희정권의 대표적인 공안조작 사건
 


육영수여사 저격 사건(8월)
영수 저격 사건의 진실과 정치적 효과

동아일보 백지광고(12월)

남북 상호 불가침 협정 제의
평화통일 3대원칙 제의

 
1975 대통령 긴급 조치 9호 발표
장준하 의문사와 입을 닫은 김영삼
'월남의 패망'이 가져온 뜻밖의 행운
월남전 철수: 장교들의 착복, 국군 포로들

북한의 남침용 땅굴 발견

'7공자' 박동명 사건과 '무등산 타잔
유신 정권 '가요 금지곡' 발표
장발·미니스커트 단속 
학도호국단 부활, 반상회 부활


베트남 패망(1975.4.30)
크메르(캄보디아) 공산화
1976 판문점 도끼만행 - 북한 땅굴 발견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3 ·1 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과 신민당 각목 난동 사건 (ft. 김태촌)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김형욱 실종사건

 
1977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81)
수출 100억 불 달성

 
1978 박정희, 제9대 대통령 당선(7월 6일)
10대 총선 : 유신종말국회

동일방직 사건 : 근대화과정 여공들의 처절한 투쟁

미 · 중 국교 정상화
1979 '4.17 조치' 발표 : 성장 일변도에서 탈피, 중공업에서 경공업 위주로 육성, 수출 일변도에서 벗어나 내수 진작, 금리인상으로 물가 안정을 도모, 부동산 투기 억제.
(두 차례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해마다 물가는 두 자리 숫자로 치솟고 선진국의 경기 침체로 수출은 점점 악화일로에 서있고 과잉투자와 중복투자로 말썽이 많았던 중화학공업단지는 가동률이 30%대로 폭락하자 대책을 발표.)
→ 하지만 경기는 더욱 침체했고 물가는 더욱 높아졌다.
→ 신자유주의 채택 : 김재익의 등장과 시장 중심 경제체제로의 변화

김재익과 신자유주의 : 한국 경제가 180도 바뀌다, 컬러 TV 특수, 자동차공업 통합

YH무역 사건
(8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국회제명 사건

부 · 마 민주항쟁(10월) - 왜 부산 시민들은 폭발했나
김영삼 제명과 부마민중항쟁, 1979년 부산 사진

10 · 26 사태 : 박정희 사망

박정희의 최후 + 김재규는 왜 총을 쏘았나?
10.26 이후 : 전두환은 어떻게 실세가 되었나?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최규하, 제10대 대통령 당선(12월 6일)

12 · 12 쿠데타 : 신군부의 군사권 장악
신군부는 어떻게 '하극상'에 성공했나? + 치밀한 작전의 승리
3김(金)시대의 도래 : '3김'의 동상이몽 + 왜 신군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는가?

제2차 오일 쇼크
 
72년 10월 유신을 발표하고 어언 30개월 동안 정권은 
반 유신 여론을 통제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왔다.



유신 정권이 무너진 단초 : 2차 오일쇼크 + YH 사건


한국 현대사 정리 (1945 ~ 1949년) : 해방과 건국
한국 현대사 정리 (1950 ~ 1953년) : 한국전쟁
한국 현대사 정리 (1954 ~ 1960년) : 독재와 혁명
한국 현대사 정리 (1960 ~ 1966년) : 쿠데타와 한일협정
한국 현대사 정리 (1967 ~ 1972년) : 개발독재와 3선개헌 
한국 현대사 정리 (1973 ~ 1979년) : 겨울공화국
한국 현대사 정리 (1979 ~ 1983년) : K-공작과 3S 정책


 

 

 

● 헌정중단

1980 서울의 봄 : 유신헌법 폐지,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폐지 요구

신군부, 계엄령 전국으로 확대(5월 17일)

K-공작 계획 :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 사북탄광 광부들의 절규
5.17 쿠데타 : 실패한 '서울의 봄' + 신군부는 왜 또다시 쿠데타를 행했나?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
공수부대의 잔혹한 활약상 +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나? 

정부, 계엄령 하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5월 31일)
국보위 발족, 광주사태의 주범으로 사형선고받은 김대중, 전두환 대통령이 되다.
삼청교육대 : 어떤 사람들이 끌려갔나? + 끔찍한 생활과 퇴소 이후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당선(8월 27일)
8차 개헌(10월) : 대통령 간선제, 7년 단임제

컬러TV 방영 : 컬러 방송 송출은 북한보다 6년 느렸다.

북한,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 창립 방안' 발표 (10월) :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
노동당 6차 전당대회 : 김정일 공식 후계자로 공인

80년 11월, 대대적인 '언론통폐합'을 단행

10.27 법난 ‘짓밟힌 불교계’ + 언론통폐합 ‘땡전 뉴스의 등장’


 

 

 

5 공화국

1981 남북한 최고책임자 상호방문 제의 (1.12제의)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당선(2.25)

희대의 관제야당 '2중대 3소대' + 전두환의 굴욕적인 미국 방문

전두환 정권, '국풍81' 개최 : 주제 - '전국 대학생 민속 국악 큰 잔치'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 : 국풍 81, 통금 해제, 애마부인, 교복자율화
핏자국을 문화로 씻어내라. 

수출 2백억 달러 달성(12월)

 
1982 정부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발표 (1.22)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문부식) : 80년대 이후 왜 반미시위가 확산됐나?

프로야구 출범

정권이 만든 프로야구 열기 + 야구로 한(恨)을 풀려던 호남인들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 단군이래 최대 사기사건

 
1983 KAL기 피격 참사
왜 소련은 민항기를 격추했나? + 레이건과 전두환의 뜻밖의 이익

아웅산 사건

→ 전두환이 버마로 간 이유 + 사소한 '우연'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 이웅평 귀순 사건

정부, 북에 '남북 경제회담' 제의
 (1984~1985)

이산 가족 찾기 TV 생방송 :
88.8%가 울었던 453시간의 생방송 + 왜 30년만에 가능했나?

강제징집과 녹화사업(1983~1985)
김영삼 단식 농성 : '군부 독재' 몰락의 단초를 제공

 
1984 합영법 제정 : 외국 기업과의 합작 관련 조항  
1985 남북 이산가족 공동 방문단, 예술단 교류
핵확산 금지조약(NPT) 가입

국제그룹 해체 사건 : 
'왕자표 고무신'의 신화, '괘씸죄'로 한순간에 무너지다 

 
1986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제10회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1987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전두환, 4 · 13 호헌 조치 발표 : 대통령 간접선거 헌법 유지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 발족(5월 27일)

이한열 사망사건(6월 9일)
6월 민주 항쟁 : 직선제 요구

노태우, 6 · 29 선언(대통령 직선제 실시 약속)
9차 개헌(직선제 · 5년 단임 · 최초의 여야 합의, 10월)
노태우, 제13대 대통령 당선(12월 16일)


 

 

 

노태우 정부

1988 노태우 정부 수립(제6공화국)

'7 · 7 선언' 발표 :
(모든 분야에서의 남북한 교류) → 월북 예술인들의 작품 해금 (임꺽정, 정지용)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 개최
88 서울올림픽의 비화 : 올림픽은 왜 개최했고, 어떻게 유치할 수 있었나?

 
1989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와 수교

정부,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 자주, 평화, 민주통일

베를린 장벽 붕괴
몰타 정상 회담
1990 소련과 국교 수립

남북 고위급 회담 시작
남북 협력 기금 설치

독일 통일
1991 남 · 북한 UN 동시 가입 : 남북이 상대방을 상호 인정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 상호 화해, 불가침, 교류 · 협력 방안
→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1992)
북한, 나진 · 선봉 자유 무역 지대 설치

소련 해체
독립국가연합(CIS)탄생

1992 중국과 국교 수립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 선언' 채택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당선(12월 18일)

 

 

 

문민 정부

1993 김영삼 정부 출범(문민정부)
금융 실명제 실시
쌀 시장 개방

쓰레기 종량제 실시 
대학 수학 능력 시험 시작

북한, NPT 탈퇴(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취임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1994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 이 전의 통일 방안 · 정책을 수렴, 종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결성
(약칭 '민주노총', 11월)

북한, 신합영법 제정(1월 20일)
북한, 김일성 사망

 
1995 한국, UN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피선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설립(3.9) : 한국 · 미국 · 일본 · EU 등 16개국

지방 자치제 전면 실시

세계 무역 기구(WTO) 출범
1997 김정일, 북한 권력 승계 공식화
케도(KEDO), 북한 신포지역에 경수로 착공

한국, IMF 구제 금융 신청 : 국제 신인도 하락, 물가 하락, 환율과 금리 상승

 

 

 

● 국민의 정부

1998 김대중 정부 출범(국민의 정부) : 적극적 대북정책(햇볕정책) 표방
노사정위원회 설치(1.15), 금강산 관광사업 시작

북한, 헌법개정(김일성 헌법) : 주석직 폐지, 국방위원장 권한 강화

 
2000 남북 정상 회담 실현
6 · 15 남북 공동 선언

 
2001 남북 분단 사상 첫 이산 가족 서신 교환 9 · 11 테러
미국, 아프가니스탄 참전(10월 7일)
2002 북한, 신의주 경제 특구 설치

한일 월드컵 개막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당선(12월 16일)

 

 

 

참여 정부

2003 노무현 정부 출범(참여정부)
개성공단 조성 시작

미국, 이라크 참전(3.20)
2004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3월 12일)
17대 총선을 통해 처음으로 진보정당 원내 진출 성공 (민주노동당 9석 확보)

 
2006 한-미FTA 협상단 출범(2월)

도하개발어젠다(DDA)협상 중단
2007 미국산 쇠고기, 2003년 수입 중단 → 이후 4년 만에 수입재개 (7월)

10.4 남북 공동선언 : 평화정착, 공동번영, 화해·통일에 관한 제반 현안을 협의하고 '종전선언 추진'에 합의 

 

 

 

실용 정부

2008 이명박 정부 출범(실용정부)

숭례문, 방화범에 의해 전소 (2.10)

한-미 양국 간, 수입위생조건 개정안 타결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전면 개방 실시(4월 16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 시작(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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