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舊韓末)은 대한제국을 뜻하는 구한국(舊韓國)이라는 말에 왕조의 말기라는 의미에서 말(末)자를 붙인 것으로, 원래는 대한제국 시대만 일컫는 단어이지만 그 뜻이 와전되어 국호를 바꾸기 전의 조선 말기까지 통틀어 일컫는데 쓰이는 경우가 많다. 개화기와도 상당 부분 겹친다. 통상 흥선대원군 시절~경술국치(1863~1910)까지를 지칭한다. 더 넓게는 철종~경술국치까지이다.
조선 말기를 언제부터 시작되느냐를 보느냐는 다양한 시선이 있는데 보통 구한말은 흥선대원군의 집권 (혹은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을 그 시점(始點)으로 본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려 하고 러시아도 참여하는 등 굉장한 혼란의 시기였다. 사회적으로도 일본이나 선교사 등을 통해 서양 문물이 도입되고 국가제도 등도 굉장한 변화를 겪게 된다.
갑오경장 때는 수천년을 내려온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초기에는 청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의 사건을 겪으며 영향력을 행세했으나 청일전쟁으로 퇴패하고 러시아와 일본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며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물러나고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 등을 거쳐 다른 열강들에게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걸 인정받고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한다. 그 후에 군대 해산과 정부 조직 개편 등을 거쳐 1910년에 경술국치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저항 또한 일어나 의병이 나타나나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강제합병 당시에는 거의 소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제대로 된 정책 입안에 실패하고 외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국권을 상실하여 일제강점기에 이르게 된다.
한편 근대화와 함께 다양한 서양의 신기술들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시기이기도 하다. 철도, 전신, 전보, 우체국, 전등, 전화, 사진, 수도 등 과학이나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와 사상, 이념, 풍속, 법규 등 모든 것이 획기적으로 변하던 시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화충격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전통을 지키자는 부류와 개화하자는 부류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단발령에 대한 격렬한 저항은 나라를 뒤흔들기도 했다.
또한 한반도에 서양의 식문화가 전래되면서 새로운 먹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밀을 기반으로 하는 식문화가 발달되어 이 영향으로 오늘날 쌀 재고량이 남아도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워낙에 많은 일이 일어나고 드라마틱하던 시대에 국권 상실이라는 고통이 섞여 많은 매체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이 시기를 거친 대부분의 조선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리는 편.
참고로 이 시기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홍콩 트램이 운행을 시작하고 빅토리아 문화가 꽃 피는 아시아 도시가 되었다. 같은 동아시아 지역이지만 너무 얄궂게 운명이 갈렸다. (나무위키)
○ 구한말 조선 실정을 생생히 전한 릴리어스 호튼 - 언더우드와 결혼…민비 시의로 구한말 조선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구한말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며 의료와 교육 분야를 개척한 미국인이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던 1888년 3월의 어느날 나는 제물포 항구에 내렸다. 나지막한 언덕의 헐벗고 뾰족한 능선을 배경으로 펼쳐진 돌 투성이의 해안으로 나는 눈길을 돌렸다. 모래밭 대신에 냄새 나고 끈적거리는 삭막한 개펄이 해안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
거칠고 검은 그들의 긴 머리털은 빗질을 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는데 더러는 한 가닥으로 땋아 내리기도 했으나 거의가 머리 꼭대기에 되는대로 매듭을 묶어 놓았다. 목과 얼굴 언저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은 흉측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생김새로 보아 그들은 몽고족이었고 입고 있는 옷 말고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 그다지 다를바 없었으나 […] 나는 바로 이 사람들과 함께 일하러 왔다. 내 사랑하는 조국의 ‘숲과 교회가 있는 언덕’ 대신에 내가 택한 곳이 바로 이 나라였다. […]
이 성문을 들어서면서 우리는 지붕을 짚으로 이거나 기와로 인 나지막한 흙집이 양 쪽으로 늘어선 좁고 지저분한 거리를 보았다. 흔히 이 도시는 마치 거대한 버섯 단지처럼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에는 일층보다 높이 지은 집이 한 채도 없기 때문이다.
○ 구한말의 사진들
○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재일한인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재미한인
○ 대한제국 한성부, 19세기 워싱턴을 벤치마킹하다 -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워싱턴 견문기
○ 왕실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개항 직후 대한제국의 모습 보여줘
○ 대한제국, 조선과 뭐가 달랐나…"황제는 황색옷, 왕은 적색옷"
먼저 구한말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들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병인양요 (1866년)
조선 고종 3년(1866년), 천주교 신자 8,000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을 말한다. 병인년에 서양 또는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리델의 보고와 보복요청을 받은 주중 공사 벨로네는 "조선 국왕이 우리 불행한 동포에게 박해를 가한 그날은 조선 왕조의 최후의 날이다." 라고 단언하면서 로즈 제독에게 조선 침략을 명령했다.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년 8월 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다.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때 길잡이는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었다. 침략군은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 이용희· 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 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 싸움으로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문화콘텐츠진흥원]
</영조묘호도감의궤>
-. 나무위키의 병인양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도서 등 문화재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는데, 당시 프랑스 군의 방화로 귀중한 도서 4,700여 권과 왕실 귀중품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사라졌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유수부 동헌앞을 무력시위하는 프랑스 병사들. 로즈제독의 함대에 함께 따라온 쥐베르가 그린 기록화로, 전쟁 중에도 오히려 여유로움과 태평스러운 모습이 돋보이는 프랑스 군대의 표정이다. 이후 교만했던 프랑스 군대는 문수산성, 정족산성 전투의 연이은 패배로 퇴각을 결정한다. [프랑스함대와 조선의 병사들,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1866년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 교섭에 실패하자,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와 함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발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덕산 굴총(掘塚)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로인해 흥선대원권이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이양정책과 천주교 탄압이 가중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미국의 강화도 침공인 광성보 전투가 있은 지 9년이 지난 후, 남연군묘의 도굴사건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독일인 오페르트 (Ernest Oppert)는 "The Forbidden Land"(금단의 나라)라는 책을 1880년 영국과 미국에서 발간하게 된다. 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에 소개된 지 213년만의 일이다. 조선은 19세기말 서양인에게는 금단의 땅이었으며 미지의 세계였다.
신미양요 (1871년)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민간인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관민이 합심해서 배에 불을 질러 격침시킨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미국 정부가 자국민을 참살한 것에 대한 항의와 제국주의 시절 횡행하던 강제 개항을 시킬 의도로 1871년에 미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미국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흑선 사건을 통해 포함외교 (gunship diplomacy)로 재미를 좀 봤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개항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판단에는 조선군의 전투력이 별볼일 없을 것이라는 판단도 한몫했는데, 맞는 사실이었으나 순순히 문을 연 일본과는 달리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원정군을 이끄는 로저스 제독이 당황하기도 했다.
조선측 피해 / 전사자: 243명(조선측 집계: 53명 전사), 익사자: 100명, 포로: 20명
미국측 피해 / 전사자: 3명, 부상자: 12명
-. 나무위키의 신미양요
-. 사진으로 보는 신미양요
-. 1866년 8월 21일,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 미국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터 - 광성보의 아픔
-. 신미양요, 왜 미국은 전쟁에서 이기고도 물러갔을까?
쌍충비각(雙忠碑閣) -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광성보 경내에 2기가 있다.
그 중 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신미양요 때 광성포 전투 사망자들을 기려 1873년에 건립되었으며 그 때부터 제사를 지내 왔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순절비>인데 역시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 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했다.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 척사파는 위정 척사파대로 흥선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한다.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별다른 충돌 없이 개국해버렸다.
서구 열강은 신미양요 이후 일본에 군사적 지원을 해서 일본을 통해 조선 점령을 시도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은 운요호를 조선에 파견하게 되고 조선은 국력에 대한 아무런 속임수나 과장도 없이 운요호사건 이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심지어 일본에 우리나라의 군대양성을 맡기기에 이른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경도된 데에다 신미양요에서 겪은 조선의 심리적 패배감은 자신의 객관적 힘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크고도 깊었던 것이다.
강화도 조약 (1876년)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부른다.
1875년 조선 해안 탐측을 핑계로 강화도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인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해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고 일본의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 일본이 조선의 연안 측량을 자유롭게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조선은 통상 거부 정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미 근대화에 발을 담궈 질적 성장을 이뤄낸 주변국들에 비해 뒤늦은 시작이었고, 동아시아 세력 경쟁의 장으로 희생된다.
중요 내용은
①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1조)
② 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한다 (제2조)
③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해야 한다(제5조)
④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제7조)
⑤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제10조)
⑥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제11조)
특히, 제1조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되며, 제5조는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리고 제7조는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 지점을 정탐하게 하였으며, 제10조는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이었다 할 수 있다.
-. 나무위키의 강화도조약
-. 1876년 2월 27일, 강화 연무당에서 조일수호조규 체결
1876년 2월 27일, 강화산성 연무당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판중추부사 신헌(申櫶, 1811~1884)과 일본의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 1840~1900, 2대 내각 총리대신)는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흔히들 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규 등으로 불리는 이 통상조약은 조선이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시 강화도조약을 처음 맺은 것은 1976년 2월이였고, 같은 해 8월달에 조일통사장정이라는 조약을 추가로 맺어
일본의 수,출입 상품 무관세 / 곡물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게 된다.
-. 운요호 사건
1875년 조선 왕조 후기 때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인 운요호(雲揚號, 운양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양민 학살과 주변 방화 등의 만행을 저지른 후 물러간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의 시초격인 사건이기도 하다.
봉건적인 막부 체제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이 선포되면서 일본에서는 이를 계기로 근대화 분위기가 장식됨과 동시에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 침략에 대한 노골적인 망상이 고개를 들면서 이에 힘입어 정한론(정한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이다.)까지 가세하게 되자 침략목적으로 조선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이미 1854년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문호 개방을 선포했던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함께 조선에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운운하면서 상호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반양(反洋) 정서로 인하여 실패만 거듭했다가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하야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이를 계기로 조선의 침략을 위해 군선(軍船)인 운요호를 부산으로 밀파한다. 그것도 자신들이 쿠로후네 사건 때 당했던 방식 그대로 차용해서 거의 똑같이 늑약(勒約)이라 할 정도로 근대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게끔 하였다.
임오군란 (1882년)
조선왕조가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또한, 한반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살고 있는 궁궐이 군대와 백성들에게 직접 습격을 당한 사례다. 1882년(고종 19년) 7월 23일, (음력 6월 9일) 구식 군대가 별기군(근대식 신식 군대)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 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軍亂). 조선판 군납비리, 열정페이가 국가 단위로 발생된 최악의 사례다.
이후로 벌어지는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스펙타클한 사건이 워낙 많이 일어난지라 임팩트가 크지 않아보이지만, 사실 조선왕조는 이 날을 기점으로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유능한 군 지휘부에 의해 일어난 반란도 아니고, 조선이 돈도 제대로 안 줘서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폭동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재정 상태와 부정부패가 막장으로 치달았음이 만천하에 까발렸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 군대, 특히 청군과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제물포 조약, 조일수호조규 속약, 조일통상장정 등이 체결되고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청과 일본 상인이 내륙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무위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불량쌀으로써 지급하여 일어난 난이다. 10년 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중전과 외척 민씨 제거 및 비리 척결, 그리고 일본과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시켰고, 전임 선혜청 당상 김보현, 당시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 선혜청 창고지기인 민겸호 수하의 착복 비리와 부정 축재 사실까지 드러나며 관련자들이 살해됐다. 성공하는 듯했던 난은, 중전 민씨를 놓친 데다가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진압됐다. 흥선대원군은 톈진으로 끌려가고 척화파들은 제거됐으며, 청나라와 결탁한 중전 민씨가 충주에서 환궁하면서 민씨 외척들이 조정을 완전 장악했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도 조정의 중책을 맡게 됐으며, 난의 진압을 축하하기 위해 과거 시험이 열리며 이완용, 서재필 등이 출사하는 계기가 됐다.
일개 군 해직자 소요 사건으로 시작돼 척화파 쿠데타로 발전한 이 사건의 결과, 대내적으로는 척화파가 완전히 물러나고 다수파이자 외척인 온건개화파(사대당,수구당)가 정권을 잡아 청나라 양무 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됐으며 소수 급진개화파(개화당)들이 근대화에 채찍을 가하는 형태가 됐다. 이는 또다른 불씨를 낳게 돼 결국 갑신정변으로 이어졌고 정변 실패 후 민씨 척족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 궁궐은 사대당 일색이 된다. 별기군은 해체된 채 개화파들의 주청으로 병조 산하에 훈련원을 둬 다시 신식 군대를 양성하려 했으나, 故 민겸호의 아들인 민영환을 위시한 민씨 외척들은 1884년 해방영(海防營)을 통해 다시 군권을 장악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청과 결탁한 민씨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더욱 청에 의존하면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됐다. 청나라는 원세개의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키고 군사 고문을 보내 조선 군대를 감시하고, 마젠창(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내정 및 재정 고문으로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섭했다. 특히 청나라 조정의 사주를 받은 묄렌도르프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시켜 조선 경제를 교란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한 8월 23일〈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로 청국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청의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을 동격으로 놓는 등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문화했다(속방조관). 거기에 영약삼단(另約三端)이란 족쇄를 조선 조정에 채워 마음대로 외교 활동도 할 수 없게 했다.
이어서 임오군란 때 일본인 사상자 및 공사관 등 일본 재산에 대한 손해배상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이 체결돼 조선 반도는 청일 양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위키백과]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일본이 군함을 이끌고 인천의 제물포항에 상륙해 조선의 사죄를 요구하고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제물포조약은 조선이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공사관 보호를 위한 약간(200여명)의 일본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한편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청은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군사 3천명을 한양에 주둔하게 하였고, 마건상과 묄렌도르프 등이 고문으로 와서 정치와 외교 문제에 깊이 간섭하였다.
-. 역사여행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EBS방송 요약)
갑신정변 (1884년)
1884년(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고종 부부의 신변도 확보했고 과단성 있는 숙청에 비해 허무하게도 삼일천하로 끝났다. 실패한 주요이유는 민중의 지지가 없었고, 일본제국이라는 외세를 이용하려 했지만 빠른 손절로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현재 조계사 자리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한국 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정열적으로 중세 국가 체제를 청산하고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첫 번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부산과 원산항도 차례로 개항되었다. 이에 위정척사파들의 시위는 격화됐고, 1877년 흥선대원군의 쇄국을 반대하고 강화도 조약을 지지하였던 박규수가 별세,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1884년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청나라가 마침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자 한반도 주둔 3천명 중 절반이 동남아 전선에 투입된다.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들은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거사를 서두른다.
그해 7월부터 계획을 세워 그해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민씨 정권 측은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이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넓은 곳을 지키기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12월 6일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시 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투입해 들어옴으로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현재 전하는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한다,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한다, 조정 대신들은 직접 회의를 개최하고 안건을 결정한다, 순사를 설치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김옥균의 《갑신일록》에는 그 중 일부인 14개 조항의 내용만이 현재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1894년)
1894년 전라도 고부의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 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했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 의병 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갑오개혁 (1894년 ~ 1896년)
약 19개월간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 을미사변을 계기로 추진된 제3차 개혁을 따로 분리하여 ‘을미개혁’이라고 부른다.
을사늑약
'일본이 한황(한국황제)를 위협하여 조약을 늑정 (강제로 정함)
을사늑약 직후 `코리안 페이퍼`에 실린 풍자화
왼쪽의 다섯 원조 토왜, 우측의 진왜
우측 바닥 작은 푯말에 "왜적 Japanese Envoy from Japan (일본에서 온 사절단.)"
왼쪽 상단에 "왜병 : 일본 군인"
1905년 11월 17일 오후 3시 경에 덕수궁에서 열린 어전회의 중 이토가 다시 고종에게 결심을 받아내기 위해 알현을 청하나
고종은 인후염이 있다고 하며 거절하고 자리를 피한다.
이어진 각료회의에서 일본공사 하야시가 대신들을 협박했으나 찬성하는 이 한명없이 부결되고 일본 측 요구를 거절한다는 합의도 보았다.
그러자 일본은 덕수궁 내부에도 일본군을 진입시켜 건물 구석구석에 배치시킨다.
한편 각료회의를 연기하라는 고종의 어명을 받고 이토에게 전달하러 가던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잡아 가두어 회의연기를 무마시킨다.
또한 외부에 대기 중인 일본군이 포를 덕수궁으로 조준시킨다.
오후 8시가 되자 이토는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일본군을 회의장 안까지 진입시킨 뒤 자신이 각료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고종이 각료회의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말을 했다며 대신들을 회유한 뒤 결정은 다수결로 하자고 하며 각료 개개인의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참정 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반대한다.
(하지만 한규설 제외한 나머지 두명도 결국은 친일파의 길로...)
그러나 일본의 강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학부대신 이완용이 처음으로 찬성의 뜻을 말한다
'일본의 요구는 대세상 부득이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감정이 충돌하기 전에 원만히 타협하는 한편 한국의 지위를 보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라고 찬성하자 내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이근택도 여기에 동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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