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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Gilt-bronze Pensive Maitreya Bodhisattva


반가사유상은 불전(佛典)의 내용 중에서 석가가 태자였을 때 궁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날 궁전 밖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고통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중생들은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된 도상이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부르게 된 것은 일본 야쮸지(野中寺)에 있는 666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에 '미륵상'이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반가사유상이 대부분 '태자사유상'으로 기록되어 있고 간혹 '용화수사유상(龍華樹思惟像)'이라는 명문도 발견되고 있다. 이 용화수란 석가불(釋迦佛)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언약을 받고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있는 미륵불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남아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 밑에서 세 번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하생(下生)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주 근교에 있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에 반가사유상이 '미륵석상'이라는 명문을 가지고 있으며 또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 이라고 불렀다. 특히 삼국 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신라 중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다. (위키백과)



 

금동반가사유상 국보 78호(왼쪽)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란 반가부좌를 틀고(半跏)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思惟) 미륵보살을 표현한 모든 형태의 불교공예품을 가리키며 우리나라에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국보 78·83·118호, 보물 331·643호 등 여러 점이 있다.




▲ 평온함과 함께 신비감을 자아내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


불교 조각의 최고봉이라는 78호에 굴욕을 안긴 83호는 '우리 국보의 대표 얼굴'로 얘기될 만큼 한국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조화로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신체와 선명한 이목구비, 자연스럽고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표현은 신라인의 놀라운 주조 기술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은은하게 퍼지는 고졸한 미소는 종교적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는 이 미소에 대해 "슬픈 얼굴인가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지 않고, 미소 짓고 있는가 하면 준엄한 기운이 누르는,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이라고 묘사했다. [매일경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을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의 불교조각실 (301호)에 국보 반가사유상 전용전시실이 마련되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와 함께 번갈아 전시된다. 2017년 6월에는 표면 부식을 막고 균열 부위를 보강하는 보존처리를 마쳤으며, 안정화 처리 과정에서 표면을 덮은 이물질이 제거돼 불상의 새김문양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냈다. 오른쪽 어깨 부근 옷자락 일부와 보관 솟음장식의 균열부도 보강하였다. (위키백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78호


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보살상으로 높이는 80㎝이다. 1912년에 일본인이 입수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를 나오게 하고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 띤 얼굴을 만들었다. 


상체는 당당하면서도 곧고 늘씬한 모습이며, 하체에서는 우아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율동적이어서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목 뒤로 돌아 양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교차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하체에 입은 치마는 다소 두툼해 보이는데 U자형 주름이 능숙하게 새겨져 있다.


왼발을 올려 놓은 타원형의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재질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주름, 명상에 잠긴 듯한 오묘한 얼굴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국가문화유산포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일제 때 밀반출되어 출토지가 불분명하여 그 제작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삼국 시대 불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서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의 태자 시절에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형(太子思惟形)에서 유래한 것이나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간 세상에 나타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생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겠다는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6~7세기 동양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이 있으며 일본 교토시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해 한일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 큰 주목을 받아 왔다. (위키백과에서 더보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무게 112.2㎏에 높이가 93.5㎝이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근거가 없으며,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얼굴은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고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고, 목에 2줄의 목걸이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꽃무늬 대좌(臺座)를 밟고 있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왼손으로는 오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하반신을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얇게 표현하여 신체 굴곡이 잘 드러나며, 연꽃무늬 대좌를 덮은 옷자락은 깊고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왼쪽으로 옥을 꿴 치마의 띠가 내려가고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는 긴 촉이 달려 있어 광배(光背)를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준다.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다 연대가 내려와 삼국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제작시기


미륵보살반가상 (일본 고류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보이는 균형잡힌 신체 비례나 생동감있고 안정감 있는 불신(佛身)의 모습 등은 중국 동위에서 북제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체로 7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상 전체에 나타나는 둥근 맛이나 단순한 조형감 등은 백제적인 요소로 백제 무왕대(武王代; 602년-641년)에 조성된 반가사유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에서 모두 조성된 것으로 보아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서 다수 제작되고 예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연관되어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미륵의 화신으로서 반가사유상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많이 조성되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도 양식상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나 침울한 얼굴 표정이나 입체감이 적은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된 상태로 변형되어 있으나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얼굴 표현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욱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秦何勝)이 신라계의 도래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한국에 많은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통해서 볼 때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목조상으로 서로 재질은 다르나 형태상으로나 양식상으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 반가사유상의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 (위키백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118호)


삼국 시대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1964년 3월 3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병기창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작은 보살상으로 높이 17.5cm이다.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랫동안 흙속에서 침식된 흔적이 뚜렷하며, 불에 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반가상은 오직 백제와 신라에서만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 보살상으로 새롭게 고구려의 예를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된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여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네모난 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난다. 상체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잘록한 허리가 그대로 드러나며, 하체에는 치마를 걸치고 있다. 치마에는 무릎 위쪽으로 선으로 새긴 주름의 형태만 간략히 묘사하다가 대좌(臺座)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늘어져 여러 겹의 수직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연꽃무늬 대좌 위에 왼발을 내려 놓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채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대고 있는데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불상은 광배가 있었던 흔적은 있으나 광배가 남아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큰 편이나 가냘픈 몸매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생각에 잠긴 보살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동위(東魏)나 북제(北齊) 초기의 반가사유상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만든 연대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출토지가 확실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삼성가의 보물창고] 이건희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출처 : 아트인포 2017.12.27


이건희 삼성 회장 소유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높이가 17.5cm로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랜 기간 침식된 흔적과 불에 탄 자국마저 남아 있지만 드물게 고구려시대 반가사유상인데다 출토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1964년 3월 30일 국보로 지정됐다.


국보 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지고 표면 손상이 심한 편이며, 사유(思惟)의 자세를 나타내는 오른팔의 아랫부분이 빠져 없어졌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네모난 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난다.


보관(보석으로 꾸민 관)에는 별도의 장식을 부착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신체는 가냘프게 표현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대좌 밑으로 내려갈수록 비대해져 육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은 구리의 두께도 두껍고 치맛자락과 옆구리에서 늘어뜨린 요패장식도 깊게 조각돼 있다.


연화대좌와 족좌가 함께 조각된 점은 금동제 반가사유상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형식이며, 이 반가상의 경우 족좌 앞쪽이 심하게 돌출됐다. 원을 사등분한 보관의 형태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전 황룡사지 출토 반가사유상 머리 등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옛 신라지역 반가사유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체를 하나로 주조했는데, 상반신은 내부가 동으로 꽉 차있으며 대좌 아랫부분은 비어있다. 네모진 얼굴과 가늘고 긴 신체, 원통형의 팔, 도식적인 옷 주름 등에서 중국 수(隋) 양식이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고재식 한국미술품감정센터 대표는 “리움 소장의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분명하고 보기 드문 고구려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제작 당시 한국인의 심상과 염원을 담은 부처의 모습 새롭게 창조했다는 점, 민중을 구제하고 내세의 희망과 염원을 담은 미래불을 제작했다는 점 그리고 국보 제78호와 제83호, 신라인이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일본 광륭사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보듯 형식미와 예술미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중략... (더보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보물 제331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삼국시대의 보살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31호로 지정되었다.


왼다리를 내리고 걸터 앉아서 오른손을 들어 두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륵보살상이다. 긴 얼굴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미소가 없는 정적인 표정이다. 머리는 평평하게 표현되었고 그 위에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다. 가늘고 긴 몸은 양 어깨와 양 팔에만 옷을 살짝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은 단순하면서 매우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목 둘레의 2중으로 된 구슬 장식은 무거워 보이는데 가슴 앞으로 내려와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다.


대좌(臺座)는 4각형의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연꽃이 새겨진 대좌가 놓여있는 모습인데, 보살상보다 크게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4각형의 대좌에는 마름모꼴 문양이 1면에 2개씩 뚫려 있는데 대좌의 이런 모양은 한국의 금동불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조각수법이 선과 면의 구분이 분명하고 잘 다듬어져 세련된 모습이며,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2중의 구슬장식과 가운데가 솟아오른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보아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보물 제64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현재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높이 11.1cm의 작은 금동불이다. 1978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643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머리에는 산봉우리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데, 봉우리가 거의 동일선상에 있어서 주목된다. 머리카락은 2가닥으로 길게 늘어져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얼굴은 몸에 비해 큰 편으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 부분이 표현되지 않아 약간은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고 있지 않으며 치마가 가슴 부근까지 올라와 있다. 옷자락은 굵은 주름으로 표현되어 대좌(臺座) 아래까지 넓게 퍼져 있으며 앞면은 물론 불상의 뒷면에까지 표현되어 있다. 일반적인 반가상(半跏像)의 형식대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포개고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대어 오른손을 볼에 가볍게 대고 있는 모습이다. 두 팔목에는 두꺼운 팔찌가 있고 늘어뜨린 왼발 밑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발받침대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조각수법이 뛰어나지 않고 표현기법도 그다지 세련되지 않았으나 고식(古式)의 반가상 양식을 지니고 있다. 작은 몸에 비해 얼굴이 크고 허리가 굵으며 상체를 강조한 점 등은 중국의 제나라, 주나라의 양식과 통하므로, 6세기 후반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상남도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고지식한 청년을 닮은, 신라금동미륵반가사유상

[출처 : 고제희의 풍수칼럼] 이 보물이 거래될때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이 불상은 금속 전문가 마치하라의 애환을 담은 채 1978년 12월 7일에 보물 제643호로 지정되고, 1982년 이병철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국보 3점, 보물 4점과 함께 다수의 금속 유물을 7억 원에 양도할 때에 호암 미술관으로 넘겨졌다. 현재는 호암 미술관에 진열되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참고: 김동현씨 증언)...





반가사유상 관련 기사 모음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과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보 78호를 언급할 때면 83호가 빠지지 않고, 국보 83호를 언급할 때도 78호가 빠지지 않는다. ‘쌍벽(雙璧)’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2004년과 2015년 두 불상이 국립중앙박물관의 한자리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한쪽 발을 올려놓았다고 해서 ‘반가’,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사유’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포즈가 똑같다. 한쪽 다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사색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오른뺨에 살짝 갖다 댄 손에서 사유의 분위기가 깊이 전해 온다. 두 반가사유상은 사색에 빠진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하고 56억7000만 년이 흐른 뒤 이 세상에 찾아와 부처가 되고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을 말한다. 그렇다 보니 책임감이 막중하다. 도솔천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위해 고뇌하고 사유하는 까닭이다. 어떻게 하면 이 땅의 중생을 불교의 가르침으로 이끌 것인지.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높이 80㎝)은 태양과 초승달이 결합된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다. 몸에 걸친 천의는 경쾌하다. 전체적으로 여성적이면서 장식이 화려하다. 미소는 신비롭고 그윽해 여운이 깊다. 보관에 등장하는 태양과 초승달, 새의 날개, 꽃잎 등에서 페르시아 분위기가 풍긴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높이 93.5㎝)은 봉우리가 셋인 산의 형상을 한 보관을 쓰고 있다. 목에 두 줄의 목걸이만 있을 뿐 78호 반가사유상에 비해 별다른 장식이 없다. 단순해서 더 부드러운 힘을 보여준다. 치마 주름이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 중략...


출처 : 신동아의 금동반가사유상 ‘라이벌’ 국보의 양보 없는 대결 (2020.06.05)



 

(좌측)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왼쪽).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우측) 2004년 7월 경복궁 중앙박물관 마지막 특별전에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함께 나왔다. 

두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선보인 것은 1986년 8월 박물관의 중앙청 이관 기념전 이후 처음이었다. [동아DB]



● 일본국보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상)는 신라에서 건너간 것이다.

    조선풍이었던 얼굴 모습, 수리시에 일본풍으로 바꿔


 

▲ (우측)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예술품"이라고 극찬했던 불상이다. 신라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좌측에 있는 사진이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고, 우측의 사진은 일본 고류사에 있는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우리 것은 금동으로 만들었고 일본 것은 나무로 만들었다는 것 외에는, 마치 쌍둥이 불상을 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