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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 作,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1495~1497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당시 밀라노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스포르차 가문. 조카의 권력을 찬탈한 야심만만한 로도비코 일 모로는 피렌체에서 온 한 예술가로부터 자기추천서를 받습니다. 그곳에는 교량·하천 건설과 같은 토목 기술부터 탄약·투석기·전차 등의 무기 제조 기술은 물론이고 궁전 건축과 조각·회화 등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내용이 담겨있었죠. 자기추천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습니다.

 

일 모로는 이 당돌한 예술가에게 자신의 애인 초상화를 제작하게 합니다. 흔히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으로 알려진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폴란드 크라쿠프의 차르토리스키 미술관에 소장)이죠. 이후 다빈치는 자신이 개발한 명암법 '키아로스쿠로'와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하여 '암굴의 성모'(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를 제작하고, 비록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스포르차의 기마상을 의뢰받는 등 일 모로의 총애 속에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 무렵 브라만테에게 명하여 도미니크 수도회 성당,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을 완공한 일 모로는 성당의 부속 식당 건물을 장식하기 위해 다빈치에게 프레스코화를 주문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입니다.

 

 

최후의 만찬(最後의晚餐)은 기독교의 신약성서에 기술된 장면 가운데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성력 1월14일 저녁),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저녁 식사 또는 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한다.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460 x 880cm의 거대한 작품이다. 레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몇 안되는 완성된 작품의 하나이지만,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1999년에 복원되었지만 다빈치가 그린 것은 20% 정도만 남아서 원본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The Last Supper. 1495~1498 . 460 x 880 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Italy (1498)

 

 

 

● 성서 이야기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 내용을 조형화한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를 그리고 있다.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게 될것이다'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포함하여 모두가 이 만찬 장소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전해듣는다. 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였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찬미를 기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들어서 각각 이를 ‘자신의 몸’과 ‘자신의 피’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 예식을 영원히 기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적혀있다. 성체성사 즉, 성찬례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 그림의 구도

 

<최후의 만찬>에는 총 13명이 그려져 있다. 예수를 가운데 두고 제자들이 양쪽으로 6명씩 자리 잡고 있다. 그림을 보면 제자들은 3명씩 모여서 4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최후의 만찬'은 예수를 한가운데 그리고 제자들은 식탁 양쪽에, 예수를 판 가롯 유다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화가)의 '최후의 만찬'에서 처럼 따로 식탁 건너편에 외롭게 앉혀서 표현 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유다를 다른제자와 같이 앉히는 관용을 베풀었고, 돈주머니를 움켜쥐고있는 가룟 유다는 유일하게 어두운 그늘에 앉혀 빛 가운데 앉은 다른 제자들과 구분시켜 표현하고 있다.

 

사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제목만 같을 뿐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다. 

 

레오나르도는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폭탄 선언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이 배신감과 자책감에 심리적으로 동요되는 극적인 순간을 택했다. 예수가 빵을 들어 축도하는 종래의 평범한 장면을 택하지 않았고, 또 드라마틱한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제자들을 세 사람씩 한 그룹으로 결속시키고, 또 좌우 여섯 명에 연대시키고 12사도 전체를 연관시켜 감정의 회오리바람을 그림에 도입했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가 갖는 모든 표정, 동작, 제스처(Gesture)가 이러한 극적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의 위치도 실은 레오나르도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배치한 것이다. 

 

괴테가 지적했듯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람 몸 전체가 생동감있게 표현되고 정서와 열정과 생각이 신체의 동작에 예민하게 나타나, 손의 제스처는 이탈리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표현 동작이며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 위치도 그가 치밀하게 계획해 배치한 것이다.

 

예수 뒤로 또 다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원근법을 강조했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를 그릴때 따로 모델을 찾지 않았다.

 

 

 

최후의 만찬 테이블의 세부 사항, 접시와 빵과 포도주 병 등이 원근감 있게 표시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 스케치

 

 

 

● 제작 기법

 

다 빈치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벽을 약간 뜯어낸 뒤, 얇게 축축한 회반죽을 발라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리는 프레스코화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매우 이례적이게도 다 빈치는 가능한 한 매끄럽게 만든 벽에 칼슘액(계란)을 입히고 그 위에 유화를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활용했다. 이는 프레스코화가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리는 다빈치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것이라고 한다. (이 기법 때문에 오히려 벽화가 더 빨리 훼손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또 하나 대단한 점은 다 빈치는 엄청나게 큰 벽에 그리는 동안 비례가 어긋날 것을 고려해 종이에 미리 스케치한 후, 선을 벽에 따서 칠하는 세심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일러스트를 그리는 데에도 쓰이는 방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꽤 과감한 선택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다빈치는 창문 밖과 식당 조명을 고려해 그림자를 매우 능동적으로 이용해서 인물 한 명 한 명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 원본이 막 완성되었을때 보았다면 거의 실물 묘사에 가까웠을것이라고 하며, 원근법을 잘 살려 그림 상단에 성당 벽 무늬를 이어 그려서 방이 훨씬 넓어보이도록 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를 해치지 않았다. 다 빈치의 천재성과 함께,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는지를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

 

 

이 그림을 그리는데 2년 9개월이 걸렸는데 사람들을 그리는 데는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고 나머지 기간은 다 빈치가 요리사답게 그림에 그릴 메뉴를 고르는데 걸린 시간이었다고 한다. (나무위키)

 

 

 

● 그림의 복구

 

 

 

 

1975년에 촬영한 복구 전의 모습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 이 벽화는 다 빈치가 그림을 완성한 뒤 그림은 계속 망가지기 시작했고, 500년이 흐르는 동안 원래 그림이 많이 훼손되어 이탈리아 정부는 그림을 복원하기로 결정, 1978년부터 시작된 21년간의 복원작업 후 1999년 5월 28일 복원된 그림이 공개된다. 

 

진짜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20%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는 수십명의 다른 화가가 그려 넣은 것이다. 

구도, 공간 처리, 각 인물의 배치, 색채 등에서 레오나르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록 복원되었긴 했지만 원래 그림은 거의 사라져있는 상태이다.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지 겨우 20년이 지났을때 원래의 색감이 거의 다 벗겨져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이렇게 금방 훼손된 원인은 다빈치가 새로운 채색 기법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기존의 방식은 젖은 회벽위에 안료로 채색한 다음 건조시키는 방법이었는데 다빈치는 밑그림을 이중으로 그린후 템페라와 유화물감을 섞어 썼다. 훨씬 더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했지만 지속성은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약했다.

 

현재 보는 최후의 만찬 그림이 오리지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1977년 복원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최후의 만찬은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고, 이 그림은 22년에 걸쳐서 복원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의 언론이나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원작이 아니라 화가들이 덧칠한 수준이라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논란이 된 부분은 예수의 얼굴로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해버린 배경이 되었던 드로잉이 다빈치의 작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복원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원본과 변경점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나무위키)

 

 

 

 

1999년 복원된 그림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에도 무사히 살아 남았다.

 

1943년 8월 15일 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이 교회와 수도원을 폭격하였고, 

이로 인해 식당의 많은 부분들이 부셔졌으나 다행히도 이 최후의 만찬은 살아남았다. 

 

 

 

 

1943년 폭격후의 사진과 살아남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을 보호하기 위해 구조물을 설치한 모습이다.

 

 

 

 

The painting as it appears on the refectory wall

 

 

수도원 성당 식당 안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과 최후의 만찬이 전시된 성당 부속 건물

 

 

 

The Last Supper, Jacopo Tintoretto(틴토레토), 1594, 365cm x 568cm,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 틴토레토의 작품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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