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꽃이 활짝 핀 낙원을 거니는 꿈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38.7cm x 106.5cm, 한국의 중요문화재, 덴리 대학 부속 덴리 도서관 소장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무릉도원을 노닐 던 꿈을 화가인 안견에게 말하자 안견이 단 3일만에 그려서 안평대군에게 바친 그림이다. 이에 안평대군이 직접 '몽유도원도'라는 제목과 함께 7언절구의 시를 쓰고, 안평대군과 함께 어울리던 신숙주, 성삼문, 김종서, 박팽년 등의 문사 20여 명이 그림을 칭찬하는 글과 시를 지어 완성된 작품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찬시)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어져 표구되어 있다.
이 그림의 화풍은 꿈속 도원을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으로, 기암절벽 위에 복사꽃이 만발하고, 띠풀로 엮은 초막과 폭포수 아래 빈 배도 보이는 꿈속의 낙원을 표현한 안견(安堅)의 걸작이다. (중국 화풍인 이곽파 화풍을 이용해 그렸는데, 부감법을 이용해 그림 공간처리나 높이에 따른 대조, 운두준법, 세형침수, 조광효과의 표현 등에서 이곽파 화풍의 영향이 잘 나타난다.)
그림 양쪽으로 안평대군의 제문(左)과 시문(右)이 적혀있고,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등의 당대 20여명의 찬문이 있는데 모두 친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는 물론 서예사로써 큰 가치가 있고, 이른바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이 어우러진 조선 전기의 보물급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이 그림은 왼편 하단부터 현실 세계가 전개되어 환상적인 도원 세계가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현실은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도원은 기이한 형태의 암산(巖山)으로 그려졌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점 높고 웅장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들은 보이지 않아 중국의 도원도(桃源圖)와는 차이가 있다. 마치 신선이 떠나고 없는 것처럼 다소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사진 왼쪽에 안평대군의 제문[서문序文]이 보인다. 그림의 오른쪽으로 安平大君의 시문[서시序詩]이 있다)
꿈 속을 거닐다
이 그림을 안견(安堅, 생몰년 미상)이 그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1447년 4월 20일 밤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무릉도원을 거닐고 있는 꿈을 꾸었다.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에 이르렀더니, 수 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갔다. 그러자 갈림길이 나왔다. 잠시 망설이고 있자니, 한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릅니다."
두 사람은 말을 몰아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러자 첩첩산중에 구름과 안개가 서려 있고,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노을이 일고 있었다. 또 대나무 숲에 있는 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렸는데, 사람도 가축도 없었다. 냇가에 빈배만이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녕 이곳이 무릉도원이다."
마침 최항(崔恒)과 신숙주(申叔舟)도 뒤따라와 함께 시를 지으며 내려왔고, 그러던 중 잠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은 곧 안견을 불러 꿈에서 본 도원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러자 안견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생각하며 꿈의 내용을 단 3일만에 그려 바쳤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이다. 그리고 안평대군이 「序文」을 작성했다. 그 서문을 요약하면
내가 정묘년 4월20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인수와 함께 산 아래 이르러 높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깊고 험준하고, 복숭아가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길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데 산관야복 차림의 행객을 만나니 정중하게 길을 가르쳐 주어
그 길로 인수와 함께 말을 몰아, 깍아 지른 절벽과 수풀을 헤쳐 그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곳에 마을이 나타났고 사방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가려진 사이로 복숭아 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비치었다.
또 대나무 사이로 초막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섬돌은 무너져 가축도 없으며
앞 냇가에 빈 조각배가 물결 따라 흔들거려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인기척에 뒤를 보니 정보. 범용도 동행 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 하였는데,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바쁜데 어째서 그때 꾼 꿈이 도원에 이르렀는가?”
뒷날 이 그림을 구해서 나의 꿈을 상상한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말이 있으리라.
꿈을 말한 후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완성되었고,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라고 되어있다. 비해당은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하사받은 당호(집)이며, 매죽헌은 인왕산 아래 누상동 수성계곡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정자이다.
안평대군의 서문「序文」
그림이 완성되고 3년이 지난 1450년 정월 초하룻날 밤이었다. 치지정(致知亭)에 오른 안평대군은 그림을 다시 펼쳐 놓고는 첫머리에 '夢遊桃源圖'라 제첨(題簽)을 쓰고, 이어 칠언절구의 시를 감색(紺色) 바탕의 비단에 빨간 글씨로 썼다.
世間何處夢桃源,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野服山冠尙宛然.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著畫看來定好事,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自多千載擬相傳.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 직하지 않은가.
後三年正月一夜, 삼년 뒤 정월 초하룻날 밤,
在致知亭因披閱有作. 치지정(致知亭)에서 다시 이를 펼쳐 보고서 짓노라.
淸之. 청지. (안평대군의 자)
안평대군이 친필로 쓴 '몽유도원도' 제목과 그 왼쪽으로 붉은 글씨의 시문이 보인다.
안평대군이 시를 짓자, 그를 따르던 집현전의 학자와 문사 20여명, 그리고 고승 한 명이 그림을 칭찬하는 글과 시를 지어, 모두 23편의 그림을 찬양하는 글들[撰文]이 곁들여졌다. 문사로는 신숙주·이개·정인지·박영·김종서·서거정·성삼문·김수온 등으로 모두 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은 현재 두 개의 두루말이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박연의 시문까지가 첫 번째 두루마기에(8.57m), 김종서의 찬시부터 최수의 찬시까지가 두 번째 두루말이에(11.12m) 실려 있다. 이들의 시문은 모두 자필로 쓰여져 문학성은 물론 서예 분야에서도 큰 가치를 지닌다. 이로서 몽유도원도는 그림과 시와 글씨가 함께 어울러진 조선 초기의 기념비적인 걸작이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안평대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안견만은 살아 남은 일화가 「백호 전서(白湖全書)」에 전한다.
안견은 충남 서산의 지곡(地谷) 사람으로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으며 산수화를 열심히 그렸다. 안평대군은 시문을 몹시 좋아해 당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고, 특히 안견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가 잠시도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견도 자기를 알아주는 대군을 위해 몽유도원도를 비롯하여 많은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 와중에 안견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정란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목숨을 건지고자 대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안견을 끈질기게 곁에다 두고 싶어했다. 생각다 못한 안견이 꾀를 내었다. 중국에서 용매먹(龍煤墨)을 구해 오자, 안평대군은 안견을 불러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안견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잠시 안채로 들어갔다가 돌아 온 대군은 깜짝 놀랐다. 귀하게 여기던 용매먹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안평대군은 즉시 종과 여종을 꾸짖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사코 모른다고 하며 안견에게 혐의를 돌렸다. 그러자 안견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 보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용매먹이 그의 품속에서 떨어졌다. 화가 난 안평대군은 안견을 내쫓고는 다시는 출입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안견은 아무 말도 안하고 물러 나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이 일어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다음 사약을 내려 죽였다. 또 그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모두 모반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안견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비로소 안견의 예지에 감탄했다. 어떤 사람은 덕을 품고서도 더러운 행실을 저질러 화를 모면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높은 식견과 멀리 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살았다고 말했다. [출처 : 고제희의 풍수칼럼]
<몽유도원도> 왼쪽 부분
<몽유도원도> 오른쪽 부분
2009년 13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모습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덴리 대학 부속 덴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어떤 경로로, 어떻게 반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제4진으로 조선에 출병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경기도 고양현에 있는 절 대자암(大慈庵)에서 이 그림을 약탈해 일본의 손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추정만 할 뿐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몽유도원도를 소장했던 일본소장가 중에서 도진구징(島津久徵)의 생애나 활동을 미루어 볼 때,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에 있었다는 사실이 추정되고 있으며, 1955년경부터 덴리 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학계에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이 작품의 가치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사실상 약탈당한 문화재라고 추정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증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출처: 위키백과)
● 몽유도원도가 현재의 일본 덴리대학으로 흘러가기 까지의 비화
몽유도원도가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고증이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비화는 이 그림이 일본 학계에 알려진 뒤 현재의 덴리대학(天理大學)으로 들어가기까지이다. 이 비화는 1977년 덴리대학의 스즈끼 나오루(鈴木治)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몽유도원도를 가장 오래 전에 소장한 사람은 구주(九州)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의 시마즈 히사시루시이(島津久徵)이다. 이 기록은 몽유도원도의 부속 문서인 '감사증(鑑査證)에 나와 있다. 이 증서는 1893년 11월에 발부된 것으로 당시 소장자가 시마즈로 되어 있고, 또 '미술상의 참고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함.'이라 쓰여 있다. 따라서 몽유도원도는 최소한 '감사증'이 발부된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다만 시마즈가 어떤 경우로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시마즈의 아들인 시마즈 시게오(島津繁雄)은 3,000엔을 담보로 이 그림을 가고시마에 거주하는 후지다 사쯔미(藤田禎三)에게 맡겼고, 후지다는 1920년 후반에 소노다 사이지(園田才治)에게 팔았다. 소노다는 오사카에서 전화 소독기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로오카 쇼우카이(浪花商會)의 사장이었다.
그림을 소장한 소노다는 교토에 있는 학자들에게 두루 보여주었다. 그러자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란 사람이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논문을 1929년에 발표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수 차례에 걸쳐 이 그림을 조선으로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마쯔타 코우(松田甲)는 「조선」이란 잡지에 '안견의 몽유도원도'란 논문을 발표했다. 나이토 코난에 이어 두 번째 논문이다. 하지만 마쓰타의 논문은 나이토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이나바 군잔(稻葉君山)에 증정한 사진을 보고 쓴 것이다. 그 후 몽유도원도는 1933년에 일본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되고,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간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도 실렸다. 이때의 소장가는 역시 소노다 사이지(園田才治)였다.
1939년에는 그 아들인 소노다 쥰(園田淳)을 소장자로 '몽유도원도'는 일본 국보로 지정 받았다. 그후 전쟁에서 패하자, 생활이 몹시 어려워 진 소노다 쥰은 1947년에 동경의 용천당(龍泉堂)에 이 그림을 팔았다. 용천당에서 구입할 당시 몽유도원도는 편액(扁額)으로 되어 있고, 시문(詩文)은 별도의 두루마기에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곧 하라씨(原氏)에 의해 현재의 상태로 표구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표구를 하다 보니, 그림보다 3년이나 늦게 쓰여진 안평대군의 시가 그림 맨 앞쪽에 배치되었다. 그는 그림을 상하 2개의 두루마기로 표구하되, 바깥은 녹색 바탕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있는 비단을 사용하였다.
1947년경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김재원(金載元)이 일본에 갔을 때다. 일본의 미술사가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가 '몽유도원도'를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국내 사정으로 수 천 달러에 이르는 걸작을 무슨 돈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이 천하의 명품이 덴리대학에 들어 간 것은 대략 1950년 대 초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림을 산 대학 측이 대금을 완불한 것이 195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일이 있다. 사실 이 그림은 1950년에 장석구(張錫九)가 한국으로 가지고 와 판로를 찾은 일이 있었다.
장석구, 그는 이 나라 골동사를 얘기할 때 약방의 감초 격으로 꼭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해방 후 일본인들이 돌아가며 헐값으로 내놓은 국보급 문화재를 산더미처럼 수집하여 호사를 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초등 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는, 17∼18세 때 대판옥호상점(大阪屋號商店)의 점원으로 있으면서 나이토 지로(內藤次郞)에게서 상술을 배웠다. 머리가 비상하여 심부름을 하면서 어느새 골동에 대해서도 눈을 떴다. 크지 않은 키에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코 아래에는 짧은 수염을 뭉툭하게 길렀다.
그는 먼저 야스오까(安岡)와 손을 잡고서 곡물 거래로 돈을 벌더니, 곧 서울 근교의 땅을 사 부동산업자가 되었다. 특히 일제 때 흑석동에 있던 이왕가(李王家) 토지를 평당 이원 오십 전에 샀는데, 경전(京電:현 한국전력)에 평당 이십 원에 넘겨 그 당시 칠십 만 원이라는 거액을 남겼다. 그는 이 돈으로 골동계에 발을 들여 나 일약 나이토 지로의 소장품과 일본인의 명품들을 모조리 사들여 하루아침에 대수장가의 반열에 올랐다.
돈에 욕심이 생기자, 그는 부여수리조합공사를 추진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자 1948년에는 남산에서 대전시회를 열어 소장했던 다수의 고미술품을 처분했고, 그것도 모자라 다량의 고서화와 불상 등을 미국으로 밀반출해 팔았다. 몇 백 년을 귀중히 내려온 우리의 문화재가 한 개인의 욕심 때문에 해외로 마구 흩어져 나갔다. [출처 : 고제희의 풍수칼럼]
● 도연명의 <도화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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