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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황진이(黃眞伊)





16세기 낙파 이경윤(駱坡 李慶胤)이라는 화가가 실제 황진이를 앞에 두고 그린 초상화를 모사해서 그린 조선시대 그림. 




아래 글은 야촌 이재훈이라는 분의 블로그 글에서 일부 발췌해 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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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도 다음과 같은 황진이 초상화를 발견했다.

그림 오른쪽에 송도명기 황진이(松都名妓 黃眞伊)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지 않은가


그림의 보존상태는 썩 좋지 않다. 그림 여기저기 반사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리 액자에 들어있는 그림을 실내에서 플래쉬를 사용하여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의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


제목 다음 줄의 설명을 보자

옥당전랑노촌탁낙파이경윤화모사(玉堂銓郞老村託駱坡李慶胤畵模寫)

뜻은 아마 옥당전랑 노촌의 부탁으로 낙파 이경윤의 그림을 모사했다는 것 같다.


낙파 이경윤은 이름 있는 화가였으며 그것도 지체 높은 신분이었다. 성종의 후손으로 왕족이었다. 처음에는 학림수(鶴林守)를 제수받았다가 나중에 학림정(鶴林正)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학림수는 벽계수와 같은 등급이다.


이경윤은 1545년생이다. 1520년경 태어난 황진이보다 25년 가량 연하다. 황진이가 40 무렵에 세상을 떴으므로 나이 어리고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인 이경윤이 황진이를 실제로 봤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지만 그가 황진이 초상화를 남겼다는 것이 만일 사실로 입증된다면 황진이가 그만큼 유명한 인사였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림에 나타난 황진이의 옷차림은 당시 기생의 복색을 고증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그림을 모사해 주기를 부탁한 옥당전랑노촌(玉堂銓郞老村)이 누구인지 알아볼 차례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그 역시 유명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노촌은 숙종 때 대사간을 지낸 임상덕(林象德)이란 분의 호다. 이 분은 숙종 9년(1683년)에 태어나 23세 때인 1705년(숙종 31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임상덕은 주로 홍문관(弘文館)과 이조(吏曹)에서 근무를 했다. 알다시피 옥당(玉堂)은 홍문관의 별칭이다. 그리고 그가 이조에서 여러 번 맡았던 직책이 이조정랑이었다. 전랑(銓郞)은 이조정랑 또는 병조정랑의 별칭이다. 그러므로 옥당전랑노촌(玉堂銓郞老村)이 노촌(老村) 임상덕 선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촌(老村)은 학문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서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으나 불행히도 37세에 병사하고 말았다. 39세로 요절한 백호 임제(林悌) 선생과 같은 나주 임씨이니 백호의 직계 후손은 아닌 듯하나 방계 후손인 것 같다.


내 추측이지만 임백호 선생의 방계 후손인 노촌 선생이 황진이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은 분명하다. 임백호 선생이 황진이 무덤에 가서 시조 한 수 읊었다가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좌천된 사실은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낙파 이경윤 선생이 그린 황진이의 초상화가 남아있다는 말을 듣고 당대의 실력있는 화가에게 부탁해서 그 그림을 모사해 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