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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i ser Pietro DA VINCI

known as Leonardo da Vinci (Vinci, 1452 - Amboise,1519)


▲ Self-portrait of Leonardo da Vinci, 1512-1515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4.15 - 1519.5.2)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고 한다.


다 빈치의 뜻은 '빈치'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며 

풀 네임은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빈치에서 ser Piero의 아들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나라로 치면 그냥 충주댁 이런 이름 정도(..-_-?)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삐에로 다 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466년 14세 때 그는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로 이주한다. 


15세부터 20대 초반까지 당시 유명했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밑에서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다 빈치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다 빈치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 인정했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그의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1481년(또는 1482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약 12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 〉(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이른바 환상적인 색감을 살리는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516년 프랑소와 1세(François I)가 있는 프랑스의 끌로 뤼세로, 그의 제자인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와 함께 이주한다. 그는 3점의 그림(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간다.


1519년 5월 2일 67세로 사망했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소와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랑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나왔다.

 

Old Man with Water Studies (c. 1513) is a drawing by Leonardo da Vinci. Some think it may be a selfportrait.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3 - 1574.6.27)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11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Arezzo)에서 태어났으며 1524년 피렌체로 가서 안드레아델 사르토(피렌체파 화가. 초상화에 뛰어나다)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고 미켈란 젤로의 제자로서, 메디치가(피렌체의 지배자)의 원조를 받으면서 회화, 조각, 건축에 종사한 예술가이다. 역사상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543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 명의 삶과 작품에 대한 기록 <미술가 열전>의 출판이다. 바사리는 그의 책에서 당시의 시대를 규정짓기 위해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사리는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이기도 했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직간접적으로 널리 교류했다. 그 덕택에 바사리는 좀 더 생생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 :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展> 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본의 중역으로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Leonardo's childhood home in Anchiano.


전성기 르네상스의 최초의 대가라는 영예를 차지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는 신동인양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여 그의 부친은 친구인 베로키오에게 사사토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다빈치는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 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선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완성하였고 더욱이 그것의 정신적인 깊이를 마련하여 가면서 주관적인 순화를 꾀하여 고전 예술에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 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사실상 15세기 초 이래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한 걸음씩 더듬어 노력하여 온 사실 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을 성공한 것이 다빈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지양하고 다음에 오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이미 15세기 말엽에 완성하였습니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활동 시기의 반이상이 15세기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Leonardo's earliest known drawing, the Arno Valley, (1473) - Uffizi





The Baptism of Christ (그리스도의 세례)


1469년 14살때 다빈치는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화가이자 금세공사, 조각가였던 안드레아 델 베르키오(Andrea del Verrocchio)에게 

다빈치를 제자로 들일것을 부탁했다. 보티첼리, 로렌쪼 등과 함께 화법에서 주조, 목공까지 다양하게 배우게 된다. 


작품의뢰가 많이 들어왔던 베로키오는 작품의 마무리를 제자들에게 맡기곤했다. 

베로키오의 제자가 된지 3년째에 다빈치는 스승의 그림을 완성하는 일을 맡았다.

다빈치가 처음 맡은 그림은 성 살비 교회에서 주문한 ' 그리스도의 세례 '였다.


The Baptism of Christ. 1472–1475. Oil on wood. 177 × 151cm. Uffizi Florence

 

스승이던 베로키오는 스케치만을 하고 대부분을 다빈치에게 맡겼던 이 작품으로 다빈치는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는 동료이던 보티첼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있는 천사를 직접 칠했다.


< 좌 : 레오나르도 다빈치 / 우 : 보티첼리 채색 >

 

일설에 의하면 베로키오가 다빈치가 그린 천사를 보고는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한다.

이 천사로 인해 다빈치의 이름은 당시 피렌체의 유력가문이던 메디치가에도 알려졌다. 다빈치의 천재성을 알아본 로렌초 메디치는 즉시 그를 고용하였다. 이 당시 다빈치의 초기작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 수태고지 '를 그렸다. 

[출처] [회화] 르네상스의 거장(2) / 레오나르도 다빈치|작성자 삼색냥이



이 그림은 현존하는 레오나르도의 가장 초기작 중의 하나로서 이 작품의 주문자는 성 사르빅 성당으로 전하며 

신약성서 마태복음 제3장 13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된 그리스도 세례의 장면이다.


여기 천사의 모습에서 등을 보이며 머리를 옆으로 묘사하는 수법은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또한 천사의 손에 들려진 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와 천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몸의 움직임과 더불어 

가운데 세례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풍경은 요단강의 연장이며 물 또한 정화의 상징이고...



The Annunciation  성모희보(聖母喜報), 수태고지(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by Leonardo da Vinci (1472-1475) Uffizi Gallery. (4,096x1,874 pixs)


하늘에서 사뿐 내려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에 의해 아기를 배었음을 알려주는 

천사의 모습을 나타낸 수태고지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자주 표현되는 주제이다.

천사의 모습은 오른 팔에 맨 리번의 움직임으로 동적인 반면 마리아의 모습은 딱딱한 느낌이다.

배경의 나무는 늘 푸른 향나무이다. 녹색이 가진 뜻은 희망과 더불어 긴 생명을 가진 나무이므로 영원한 희망의 상징이 된다. 


성모영보(聖母領報, 라틴어: Annunciation)는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에 쓰여 있는 일화 가운데 하나로, 

성모 마리아에게 대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성령에 의해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고 고하고, 

또 마리아가 그것에 순응하고 받아들인 사건을 말한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모희보(聖母喜報)라고 하며, 성공회에서는 수태고지(受胎告知)라고 한다.


성모 공경 사상을 배경으로 삼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예술 작품 중에서 반복적으로 이용되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중세 즈음에 서방 교회에 전해졌다. 

오늘날에도 동방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 등에서는 3월 25일을 이 사건의 축일로 지정하여 기념한다.


 

부분도와 수태고지를 위한 습작


이 장면에서 성모 마리아가 독서 중인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을 뽑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옆에는 순결의 상징인 하얀 백합이 놓여 있지만, 대천사 가브리엘이 손에 드는 경우도 있다. 

두 사람 위에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이나 비둘기로 형상화된 성령이 그려지는 것이 많아, 

성령에 의하여 잉태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Cestello Annunciation by Botticelli, 1490. (좌)

The Annunciation and Two Saints (1333), Simone Martini. Tempera on wood, 184 x 210 cm (우)


중세의 작품으로서는, 랭스 대성당의 조상이나 시모네 마티니의 제단화가 유명하다.

르네상스기에는 과연 천상과 지상의 해후라는 르네상스적인 성격이 선호되어 가장 인기가 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벽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회화 등이 걸작으로서 유명하다.

그 밖에도 산드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여러 명의 화가가 이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에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가 그린 벽화 (좌)

One of several versions of The Annunciation is located in St Mark's Convent. (우)


More Annunciation



다빈치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1475년~1480년까지 있으며 자유롭게 기술을 연마하고 그림을 그릴수 있었다


20살에는 길드에서 예술과 의약에 대해 마스터로 인정받고, 아버지로부터 공방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 공방을 가진 다음에도 델 베로키오와 공동 작업을 했다고 하니, 

'그리스도의 세례' 이후 델 베로키오가 다 빈치의 재능을 시샘하거나 하진 않았을 것 같다. 



Portrait of Ginevra de Benci


Porträt einer Edeldame (Ginevra Benci). 1474-1476. 42 × 37 cm. National Gallery of Art. USA


이 그림은 1474년경 그려진 것으로 당시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이었던 

지네브라 벤치(Ginevra Benci)가 1474년 1월 15일 17세 나이로 니콜리니와 결혼하였을 때 그 기념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뛰어난 미모와 직접 시를 쓸 정도로 교양이 풍부하여 로마 교황청에 까지도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미모가 소문이 났었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만년의 여성 그림에 나타난 미소가 보이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있으나,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의 필치에 의해서 대상 인물에 깊은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구도가 가슴부터 윗부분을 잡았기 때문에 약간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그림의 뒤에는 종려와 월계수,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아름다움은 덕을 장식한다.]라는 글씨가 작품 뒤쪽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네브라가 덕을 갖추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Benois Madonna

베누아의 마돈나(성모)


Benois Madonna. 1478, 49.5 × 31.8 cm. Oil on canvas (originally panel).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소유자 이름을 붙여 <베누아의 성모>로 불리며 현존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많지 않는 확실한 진품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 한 상인이 이탈리아인 유랑 음악가에게서 사들인 후 지금의 에르미타지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레오나르도의 비교적 초기 작품인 이 그림에는 15세기 이탈리아 회화가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주제 이외의 부차적 요소를 많이 도입하던 경향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이미 보여 주고 있다. 


성모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표현된 것은 그만두더라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위대한 화가가 이탈리아 회화에서 처음으로 모자(母子)의 심리적 일체감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이 작품으로 레오나르도는 15세기 리얼리즘의 성과를 마무리짓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꽃이나 고양이와 같은 매개물을 그려서 서로간의 애정 교류를 이룩하고, 회화적인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흰 꽃도 그와 같은 애정의 교류물로서 소녀와 같은 성모와, 

그의 동생과 같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기 예수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커서 

성모의 얼굴과 별로 다를 바 없을 정도이다. 두 사람은 모자 이기보다는 남매와 같은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나, 배경의 공허한 느낌이나 색채의 변화가 없는 것이 눈에 띈다. 



Madonna of the Carnation

카네이션의 성모


Madonna of the Carnation. 1478–1480. Oil on panel. 62 × 47.5 cm. Alte Pinakothek Munich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공방에 있을 때 제작되었던 것이라 추정된다. 

그 무렵 보티첼리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성모의 얼굴이나, 색채에 그의 영향이 엿보인다. 

구도가 장식적이고 만년의 깊이는 느낄 수 없으나, 대상을 레오나르도적인 방법으로 처리한 기술은 이미 싹트고 있다.

 

성모가 한 송이 빨간 카네이션을 가지고 있고 아기 예수가 이것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다. 

오른쪽에는 목이 가는 유리 꽃병이 놓여져 있고 화려한 백합꽃이 꽂혀 있다. 

이 카네이션은 그리스도교적인 순애의 상징이라고 생각된다. 

하느님, 즉 신이 있는 세계를 나타낸 배경의 산은 나중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나오는 산의 선구(先驅)를 보이고 있다.



위의 두 성모 그림은 베로키오공방에 있을 당시 다빈치가 그린 작품이다. 인물간의 신체적 가까움은 심리적 유대감과 똑같다.

두 그림에서 다빈치가 색의 조화에 대한 연구와 명암을 변화 시켜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이용한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그림에 깊이를 더한다.

 

다빈치는 28살이 되자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다.



St. Jerome in the Wilderness

광야의 성(聖) 히에로니무스(성 제롤라모)


St. Jerome in the Wilderness. 1480. Tempera and oil on panel. 103 × 75 cm, Unfinished. Vatican Museums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미완성의 상태로서 아직 밑그림의 단계이지만,

모든 이가 이견 없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작품 의뢰인도, 

누구를 위해 그린 것인지도 모르는 예술사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그림 가운데 하나다.


우피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의 양식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초창기인 148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이름은 제롬 성인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최초의 사람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옷도 입지 않고, 추기경 모자는 땅에 내팽개쳐 놓았는데, 이는 세상 명예를 버렸음을 상징한다.

이 성인 곁에는 자주 사자가 등장하는데, 히에로니무스가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주었더니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늘 따라다녔다는 사자는 복종의 의미를 나타낸다.


광야 한가운데, 참회를 위해 돌로 가슴을 내리치기 직전의 순간을 잡아내어, 

성직자의 근엄한 모습보다는 인간적인 고뇌를 표현하고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처럼 극적인 순간을 가장 잘 포착해내는 순간 포착의 대가로,

이 작품은 그러한 다 빈치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이 그림은 아직 스케치 한 상태로 성인의 머리, 오른쪽 다리, 왼쪽의 바위만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고, 다른 부분들은 밑그림이거나 명암법에 따라 그린 다음 얇은 덧칠만 되어 있다.

배경에 사용된 선을 흐리게 해서 안개처럼 표현한 스푸마토 기법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선과 뚜렷한 명암의 대비로 어떤 작품보다 더 완성도 있는 느낌을 주는 

다 빈치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티칸 박물관전)



19세기 초반 스위스 화가 안젤리카 코프만의 유언장에 의해 처음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코프만이 죽은 후 그 추적이 불가능해지다가 우연히 나폴레옹의 삼촌인 추기경 조셉 페쉬가 이 그림을 구매하게 된다.

이 그림은 2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밑에 부분은 박스 커버로 사용되고 있었고 성자의 머릿부분은 딜러의 신발 제작자가 

그의 작업 의자 커버로 만들었었다고 합니다. 현재 그림을 보면 5부분으로 나뉜 자국이 있다고 하네요. 


추기경이 죽은 이후, 경매를 통해 여러번 주인이 바뀌다가 

1856년 교황으로 지낸 비우스 9세에 의해 현재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카에 오게 되었습니다. 

뭔가.. 그림 내용도 굉장히 고행을 하는거 같은데 그림 자체도 많은 고난을 겪었네요... (베지풋)



Adoration of the Magi

마기의 기도


Adoration of the Magi. 1481. Underpainting on panel. 240 × 250 cm, Unfinished. Uffizi Gallery, Florence 


자신의 공방을 가진 후 1478년까지 작품 활동도 하지 않다가, 성 버나드 채플에서 

'세 현자의 순례'를 소재로 한 종교화의 의뢰를 받고 '마기의 기도'의 작업을 시작한다. 


이 그림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대작이지만 제작중에 1482년에 밀라노로 이사를 가면서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그림의 소재는 탄생한 예수를 3명의 박사가 예배하러 방문한 정경이다.

마기의 예배 이후 다 빈치는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의뢰를 받아 '암굴의 성모'를 그리기 시작한다.



동방박사의 경배 (1481 ~ 1482)


1418년, 성 도나토 수도원에서 다빈치에게 전통적 기독교 주제를 다룬 그림을 주문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다빈치는 중심의 마리아와 아기예수, 그리고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강조점만 밝게 처리했다.

반원형으로 배치한 인물들의 얼굴 생김새를 보면 다빈치가 염세주의를 표현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다빈치는 밀라노로 가야했기 때문에 동방박사의 경배를 완성할수가 없었다. 

다빈치의 작품중에 유독 미완성이 많은 이유는 인기가 많은 화가인것도 있지만 평소 그의 그림작업 방식에도 있다.

다빈치는 하던 작품을 그만뒀다가 나중에 다시 흥미가 생기면 다시 그리곤했다. (삼색냥이)



Virgin of the Rocks 

암굴의 성모, 암굴의 마돈나


Virgin of the Rocks  1483-86, Oil on panel, 199 x 122 cm, Musee du Louvre, Paris (원본 그림)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의뢰를 받아 그린 그림으로

스푸마토 기법이 처음 제대로 쓰인 작품이라고 미술사적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암굴 속에서 청록색의 옷을 입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풀 위에 앉아 있는 아기예수에게 요한을 인사시키고 있다. 

좌측의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아기가 예수이다. 무성한 식물들에 담겨진 물의 존재는 청정(淸淨)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요한에 의한 세례를 암시하고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있던 것이 

1506년 이전에 팔려 1842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작품중 빛을 가장 잘 조절한 작품이라고 한다



성당에서 구체적으로 구도, 등장인물 등에 대한 지침을 받고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어쩃든 요구사항에 맞게는 그렸지만, 세부사항에 약간의 장난을 쳐놓았다고 평가된다.


1. 예수가 세례 요한을 축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나리오 인데, 여기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다.

2.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머리 위에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손을 올려놓고 있다. 

매의 발톱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듯 하다.

3. 천사 우리엘이 마리아가 움켜쥔 머리를 자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이런 이단적인 성격 때문에 '암굴의 마돈나'라고도 불린다.



이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성당의 의뢰를 받아 그려진 그림이지만 보수에서 서로 맞지 않아 

이 오리지날은 건네지지 않았다고 한다. 보수가 맞지 않아 이 그림을 넘기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결국 복제화를 그린 것은 공동작업을 한 프레디스 형제가 보수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다빈치는 스포르차에 의해 후원도 받고 있었고, 자기 공방이 있을 정도의 재력도 있었기에... 


그리고 일설에는 위의 이단적인 내용 때문에 성당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설도 있는데, 

복제작에서 수정된 것을 보면 이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지 않다. 


원 그림은 프랑스 왕실로 갔고,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차린 성당의 누군가가 반환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복제화는 스케치만 다 빈치가 하고, 채색은 프레디스 형제가 거의 다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된 그림이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이 물탄 그림(-_-;) 이라고 표현한 '암굴의 성모' 이다.



Virgin of the Rocks, National Gallery (London),  1495-1508, 189.5 cm × 120 cm (다시 그린 그림)


이 그림의 이단적인 내용때문에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Angel side panel, executed by the De Predis brothers. 

Center's is Virgin of the Rocks, The Louvre.



출처

http://kr.blog.yahoo.com/orioribebe/279

http://blog.naver.com/helmut_lang?Redirect=Log&logNo=150037391194

http://en.wikipedia.org/wiki/Virgin_of_the_Rocks




Lady with an Ermine

흰 족제비를 안고 있는 여인


Lady with an Ermine by Leonardo da Vinci, 1489-1490, oil on board, 40 x 55 cm. 

The Czartoryscy's Collection, National Museum in Kraków, Poland


이 그림의 모델은 체칠리아 갈레라니(Cecilia Gallerani)로 "로도비코 일 모로"라는 별명을 지닌 밀라노 공작 

로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의 애인이었는데, 젊고 아름다운 17세의 그녀는 음악을 연주했고 시를 썼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성채인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1488년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만났다. 그녀는 재능과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회화에서의 인간 형태의 전문성을 잘 보여준다. 체칠리아의 쭉 뻗은 손은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다빈치는 각각의 손톱의 윤곽선, 손가락 관절 각각의 주름, 

또한 구부러진 손가락 힘줄의 수축까지 그려내었다. 다빈치는 자기가 그리는 초상화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일기장에 사람과 동물의 초상 드로잉을 연습했다.


얼굴의 부분과 껴안고 있는 동물의 상반신과 손 부분 등에서 레오나르도적인 감각이 농후하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거의 나중에 덧칠을 하고 배경도 뭉개 버렸다. 

그것은 보존 상태가 나빠서 수리하면서 이렇듯 평범한 톤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인물의 윤곽이 수정되고, 얼굴의 왼쪽이 다시 그려지고, 두발도 다시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오직 네 점의 여성 초상화 중 하나이다.

(다른 세 점은 모나리자,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과 라 벨 페로니에르(La Belle Ferronière)이다.) 

18세기 말 폴란드의 아담 찰르레스키 황태자가 사들여 그의 처 이사벨라의 콜렉션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녀의 초상화에서 흰 족제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애완용 흰족제비는 귀족정치와 연관되었고 흰족제비는 본래 갖고 있던 털가죽을 

흙으로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순수성의 상징이었다. 


또한 흰족제비는 1488년 흰족제비 기사단을 만든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개인적인 문장이었다. 

그래서 체칠리아와 흰족제비의 관계는 다양하게 의도되었다. 

다르게는 체칠리아의 이름의 말장난이었다.(그리스어로 흰족제비는 "galay"이다.) 


엄밀히 보면, 이 그림에 있는 동물은 흰족제비라기보다는 

통통하고 덜 자란 흰 동물을 보는 것을 즐긴 중세 사람들이 좋아했던 페럿으로 보인다.



Madonna Litta

리타의 성모


Madonna Litta(Madonna and the Child). 1490-1491, 42 × 33 cm, Hermitage Museum in Saint Petersburg


구도가 단순, 명쾌해서 보는 사람의 주의가 자연히 주제인 모자상에 집중되게 되는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 모성(母性)의 이상적 형태의 창조에 집착하고 있다. 


1543년 무렵 베네치아의 피에트로 칸타리니 컬렉션 속에 성모 그림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이었던 것 같다.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것이 레오나르도의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1784년에 이르러 어느 공작(公爵)이 이 그림을 사들인 사실이 알려졌고, 

1813년에는 다시 리타공(公)에게로 넘어갔다. <리타의 성모>라는 명제는 리타공의 소유라는 데에서 붙여진 것이다. 

현재는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그 경위는 확실치 않다. 



이것은 엄격히 따지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굳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그의 목록에 첨가한 것은 

이 그림과 같은 레오나르도 자신의 작품의 존재가 다른 데생을 통해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작 연대는 1490년경으로서 <암굴의 성모>와 같은 시대 작품일 것이다.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의 주제는 12세기말부터 되풀이하여 그려지고 있다. 


주목할 것은 아기 예수가 왼손에 갖고 있는 작은 새로서, 그것은 '영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Portrait of a Musician

음악가의 초상


Portrait of a Musician. 1490. Oil on wood panel. 45 × 32 cm. Disputed. Pinacoteca Ambrosiana in Milan 


The man in the painting was at one time thought to be Franchino Gaffurio, who was the maestro di cappella of the Milanese Cathedral. Although some believe it to be a portrait of Gaffurio, others think the man is anonymous. 

The piece of paper he holds is at least one part of a musical score; it has notes written on it. 

The painting was greatly restored and repainted, and Leonardo probably left the portrait unfinished but close to completion.



La belle ferronnière

밀라노 왕궁 여인의 초상


La belle ferronnière, 1490-1496. Louvre Paris, Paris. 62×44cm. Disputed 


레오나르도가 그리기 시작했던 작품을 제자들이 그림으로 팔기 위해서 손쉽게 정리하였던 경향이 있었지만, 

이 그림은 그와 같은 경향이 한층 짙다. 얼굴이나 어깨등에 레오나르도적인 감각은 남아 있으나, 

그곳에 다시 칠한 흔적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가라 앉은 인상을 준다. 

특히 앞 쪽 난간의 부분에는 아름다운 손이 그려졌어야 할텐데 난잡하게 잘리어져 있다. 


확실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90년대 밀라노 궁정 시대에 공방에서 제작한 초상화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1642년 컨템플로 궁에 작품이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름다운 머리띠를 한 여인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이탈리아 최고의 미녀였던 루크레치아의 초상화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강인함과 신중함이 엿보인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명암의 대비가 훨씬 자연스럽고 묘사 방법이 더욱 세련되진 것을 알려준다.

 

다빈치는 화가로써의 능력뿐만아니라 과학과 기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요새 설계안, 투석기, 포탄에 대한 성벽의 방어방법 또한 연구하고 노트에 기록했다. 다빈치는 젊은 시절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을 연구했으며 50세가 되던해 친구였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한테서 기하학을 배웠다. [출처] 삼색냥이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루브르판 '암굴의 성모' 이후 여러 작품을 그리다 1495년부터 후원귀족 스포르차를 위해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한다. 

요한복음의 예수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그림은 무수한 소문들을 동반하고 있으며, 

1999년에 복원되었지만 다빈치가 그린 것은 20% 정도만 남아서 원본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The Last Supper. 1495~1498 . 460 x 880 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Italy (1498)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 내용을 조형화한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를 그리고 있다.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게 될것이다'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포함하여 모두가 이 만찬 장소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전해듣는다. 

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였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찬미를 기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들어서 각각 이를 ‘자신의 몸’과 ‘자신의 피’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 예식을 영원히 기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적혀있다. 

성체성사 즉, 성찬례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최후의 만찬'은 예수를 한가운데 그리고 제자들은 식탁 양쪽에, 예수를 판 가롯 유다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화가)의 '최후의 만찬'에서 처럼 따로 식탁 건너편에 외롭게 앉혀서 표현 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유다를 다른제자와 같이 앉히는 관용을 베풀었고, 돈주머니를 움켜쥐고있는 가룟 유다는 

유일하게 어두운 그늘에 앉혀 빛 가운데 앉은 다른 제자들과 구분시켜 표현하고 있다.


사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제목만 같을 뿐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다. 

레오나르도는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폭탄 선언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이 배신감과 자책감에 

심리적으로 동요되는 극적인 순간을 택했다. 예수가 빵을 들어 축도하는 종래의 평범한 장면을 택하지 않았고, 

또 드라마틱한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제자들을 세 사람씩 한 그룹으로 결속시키고, 

또 좌우 여섯 명에 연대시키고 12사도 전체를 연관시켜 감정의 회오리바람을 그림에 도입했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가 갖는 모든 표정, 동작, 제스처(Gesture)가 

이러한 극적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의 위치도 

실은 레오나르도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배치한 것이다. 괴테가 지적했듯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람 몸 전체가 생동감있게 표현되고 정서와 열정과 생각이 신체의 동작에 예민하게 나타나, 

손의 제스처는 이탈리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표현 동작이며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 위치도 그가 치밀하게 계획해 배치한 것이다.


예수 뒤로 또 다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원근법을 강조했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를 그릴때 따로 모델을 찾지 않았다.


최후의 만찬 스케치

 

1449년, 프랑스의 국왕이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공작을 몰아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다빈치는 만토바로 도망쳤다 다시 베니스로 향했다. 그리고 1500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명성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다.

 

1503년, 수천명의 군중들이 다빈치의 새로운 작품을 보기위해 피렌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1975년에 촬영한 복구 전의 모습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 이 벽화는

다 빈치가 그림을 완성한 뒤 그림은 계속 망가지기 시작했고, 500년이 흐르는 동안 원래 그림이 많이 훼손되어 

이탈리아 정부는 그림을 복원하기로 결정, 1978년부터 시작된 21년간의 복원작업 후 1999년 5월 28일 복원된 그림이 공개된다. 


진짜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20%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는 수십명의 다른 화가가 그려 넣은 것이다. 

구도, 공간 처리, 각 인물의 배치, 색채 등에서 레오나르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록 복원되었긴 했지만 원래 그림은 거의 사라져있는 상태이다.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지 겨우 20년이 지났을때 원래의 색감이 거의 다 벗겨져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이렇게 금방 훼손된 원인은 다빈치가 새로운 채색 기법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기존의 방식은 젖은 회벽위에 안료로 채색한 다음 건조시키는 방법이었는데 다빈치는 밑그림을 이중으로 그린후 템페라와 유화물감을 섞어 썼다. 훨씬 더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했지만 지속성은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약했다.


1999년 복원된 그림 (5381 X 2926)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1943년 8월 15일 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이 교회와 수도원을 폭격하였고, 

이로 인해 식당의 많은 부분들이 부셔졌으나 다행히도 이 최후의 만찬은 살아남았다.


 

1943년 폭격후의 사진과 살아남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을 보호하기 위해 구조물을 설치한 모습이다.



“다빈치 ‘최후의 만찬’, 4006년 ‘인류 종말’ 예언” ... [서울신문] 2010년 03월 16일(화)




Sala delle Asse ceiling frescoes

아쎄의 방


the ceiling of the Sala delle Asse, Castello Sforzesco, Milan. Painted by Leonardo da Vinci, c. 1498-99


'아쎄의 방' 벽이나 천장에 회반죽 위에 물감으로 장식한 것으로 식물의 줄기와 나뭇잎 등이 얽히고 설켜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1498 년경의 작품으로 밀라노의 카스텔로 스포르 체스코 (Castello Sforzesco) 성에 있다.


스포르체스꼬 성은 두오모의 성모마리아상과 비스콘티 가문 문장의 뱀과 함께 밀라노를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이 성의 많은 방들 중 꼬르떼 두깔레(Corte Ducale)방의 프레스코 화들은 볼만하며 까스텔로 디 로까비안까(Castello di Roccabianca)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성 안쪽에 위치한 그리젤라의 방(Camera di Griselda)이나 아쎄 디 레오나르도의 방(Sala delle Asse di Leonardo)도 볼 가치가 있다.



Little remains today of the Leonardo’s decorative paintings in a suite of rooms in the north-east tower of the Castello Sforzesco. Although nothing survives of the paintings of the Sala Negra, in the Sala delle Asse (“Room of the wooden panels”) fragments of trees are visibly portrayed on the upper sections of the lateral walls. 

Leonardo worked on this mural with his assistants.


The branches of the trees are interwoven with golden braids to form a dense canopy that stretches across the ceiling and around the arms of Ludovico Sforza and Beatrice d’Este positioned in the centre. Other tablets on the ceiling with inscriptions refer to the marriage of Ludovico’s niece to the Emperor Maximilian in 1493, and to the Sforza’s claim to the Dukedom of Milan after the death of Filippo Maria Visconti, as proclaimed by Maximilian in 1495. A third tablet proclaims Ludovico’s victory over the French at the Battle of Fornovo, and his journey to Germany to cement an anti-French alliance with Maximilian in 1496.


The trees appear to be mulberry trees and as such are a reference to Ludovico Sforza, who was known as “il Moro”. 

Surviving documents thought to relate to the decoration of the rooms imply a completion date of 1498 for the work.



the Sala delle Asse Detailes


   

   


One of less known, yet possibly among the most imaginative works of Leonardo da Vinci are his paintings in Salle Delle Asse in Sforza castle in Milan. Leonardo has very skillfully used the geometry of the hall so to achive impression that the observer stands in the middle of some dense forest (this work of Leonardo could probably be categorized as Trompe-l'œil, that was quite common later, in the baroque era). But the pattern Leonardo creates is a complex "knottiness" of leaves, branches and ropes that tie together in hundreds of different and very mathematical ways. 


위의 마디에서 착안하여 그린 그래픽들 Leonardo's knottiness


   


출처 : http://asiber.ifs.hr/leonardo_uzorak_en.html




Young Girl in Profile in Renaissance Dress

Profile of a Young Fiancée


Profile of a Young Fiancée. late 15th century. 33 x 22cm. Chalk, pen, ink and wash tint on vellum, Private collection in Swiss


이 작품은 사랑스러운 초상화이지만 그 묘사의 안이함이 날카로운 레오나르도의 맛을 없애고 있다. 

1490년경의 작품으로서 일설에는 앙브로지오 디 프래디스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나, 

프래디스의 화풍이 일정하지 않아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주제가 된 여성이 누구인지 오늘날에는 알 길이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음악가의 초상이 밀라노 공의 초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의 짝으로서 밀라노 공 부인 베아트리 체 데스테의 상이라고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상들이 짝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델의 문제는 여러가지 억측을 낳고 있다.




▲ 다빈치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왕녀(La Bella Principessa)'


19세기 작품인 줄 알고 ‘헐값’에 넘긴 그림이 알고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었다고?


19세기 독일의 무명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그림이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문제는 12년 전 크리스티 경매회사가 2만2000 달러(약 2500만원)에 이 그림을 팔았다는 사실. 만약 이 그림이 다빈치의 작품이라면 적어도 1억 달러(1100억)는 나갈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6일 이 그림의 원 소유주였던 진 마칭(Jeanne Marching)이 크리스티를 상대로 엉터리 감정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이 그림은 1998년 경매에 나올 당시 ‘19세기 독일파(派)’라는 카탈로그에 분류된 작품이었다. 2만2000 달러를 주고 이 그림을 산 것은 뉴욕의 한 미술품 거래상. 그는 2007년 이 그림을 캐나타의 미술 애호가인 피터 실버맨에게 다시 팔았다. 


이후 이 작품이 다빈치의 지문이 찍힌 희귀한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전문가들이 탄소 연대측정과 적외선 분석까지 동원한 결과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는 19세기가 아니라 1440~165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나타났다. 다빈치가 활동한 시대다. 그림 상단에 찍힌 지문은 로마 바티칸 성당의 ‘성 예로니모’에 찍힌 다빈치의 지문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옥스퍼드 대학 예술사 전문가인 마틴 켐프 교수는 이 작품이 당시 이탈리아의 세도가였던 스포르자 집안의 비앙카 스포르자를 모델로 한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켐프 교수는 이 그림의 제목을 ‘아름다운 왕녀(La Bella Principessa)’로 붙였다. 


이에 진 마칭은 크리스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크리스티가 감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최소 1억 달러는 하는 그림을 헐값에 넘겨 손해를 보았다는 것. 그는 크리스티에 상당 금액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크리스티는 “이 그림이 다빈치의 그림이라는 주장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며 “경매 당시 감정 절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전문가들도 이 그림이 진짜 다빈치의 작품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양피지에 그려져 있는데 다빈치는 양피지에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한 전문가는 심지어 “20세기에 그려진 가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10-05-07 조선일보




Mona Lisa or La Gioconda (French: La Joconde)

Portrait of Lisa Gherardini, wife of Francesco del Giocondo


다빈치 최고의 작품이라는 '모나리자' 

제2차 피렌체시대(1500~1506)의 작품이라고 하나 완성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피렌체의 상류 시민 프란체스코 지오콘다의 3번째 처의 초상이라고 전해진다. 


눈썹, 코, 입, 의복 등 모든 것이 가장 델리케이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모사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묘사력 때문에 후대 모든 화가들의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모나리자가 띠고 있는 신비스런 미소는 일설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이 작품을 그릴 때 

모델의 주위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유쾌한 담소를 하게 하여 

모델이 항상 상쾌한 기분을 갖게 해 주고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Between 1503 and 1506 / Oil on poplar wood / 77 cm × 53 cm. Louvre Museum, Paris

Purchased by Francois I in 1518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모나리자의 다른 명칭인 "라 조콘다"는 한국어로 "조콘도(Giocondo)의 부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 작품은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으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조 바사리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 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란 정신적인 것이라고 늘 말해왔고 모나리자에는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150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작품의 의뢰를 수락한 것은 돈이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몇 달 뒤 베키오 궁을 장식할 프레스코 주문이 들어와서 이 그림은 주문자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졌고 레오나르도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초상화를 완성을 했고 사람이 흔적이 보이지 않는 태곳적 풍경은 훨씬 뒤에 천천히 구상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등받이 없는 1인용 안락의자에 독특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나리자와 이 풍경이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


모나리자 그림에는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에 대해서는 그 당시 눈썹을 추하게 여겨 눈썹을 뽑는 것이 우아한 품위를 가진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는 것이 당시 시대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는 설과 (루브르박물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나리자 작품이 눈썹을 그리지 않은 미완성작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군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조르지오 바사리에 의하면 그림의 모델은 1479년 피렌체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의류 상인인 

프란체스코 디 바르토로메오 델 지오콘도(Francesco di Bartolomeo del Giocondo)와 결혼한 

리사 마리아 게라르디니(Lisa Maria Gherardini 1479-1542)이다. 

이런 연유로 모나리자(Mona Lisa) 또는 라 조콘다(La Gioconda, La Joconde)로도 불리운다.    




다빈치는 몇년간 이 그림에 매달려 인물을 남성적인 동시에 여성적으로 보이게 하는 특성과 명암을 연구했다.

이 그림은 부드러운 색조와 명암대조법을 사용해서 잔잔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또한 인물과 배경간의 경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녹아들어있다.


다빈치가 남긴 최고의 유산은 바로 모나리자일것이다. 

현재까지도 모나리자의 미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며 연구대상이 되고있다.

그리고 모나리자는 무성한 추측을 낳은 신비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사막을 건너는 방법)



An emblematic smile


The Mona Lisa's famous smile represents the sitter in the same way that the juniper branches represent Ginevra Benci 

and the ermine represents Cecilia Gallerani in their portraits, in Washington and Krakow respectively. It is a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idea of happiness suggested by the word "gioconda" in Italian. Leonardo made this notion of happiness the central motif of the portrait: it is this notion which makes the work such an ideal. 


The nature of the landscape also plays a role. The middle distance, on the same level as the sitter's chest, is in warm colors. 

Men live in this space: there is a winding road and a bridge. This space represents the transition between the space of 

the sitter and the far distance, where the landscape becomes a wild and uninhabited space of rocks and water 

which stretches to the horizon, which Leonardo has cleverly drawn at the level of the sitter's eyes. 


 


오른쪽 사진을 보면 오른손을 왼손에 포개고 있는데 이모습이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것 보다 

더 도덕적인 부인의 모습을, 더욱 신뢰성있는 아내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보고 레오나르도는 이 모양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림에서 후경을 잘 관찰해보면 비논리적인 점이 보인다 관람자의 시점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높은 산과 거울처럼 평평한 수평선이 왼쪽에 비해 다소 올라와있는 호수가 보인다 반면에 왼쪽 풍경은 오른쪽보다 낮다 다시 말해 두 부분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상 거기에 인물 자체와 모나리자의 미소에 의해 감춰지고 변형된 간격인 단절이 있다 모나리자의 입술은 오른쪽으로 약간 올라가 있다 (좀 더 높게 그려진 오른쪽 풍경 쪽으로) 양쪽 두 풍경 사이의 불가능한 이행이 인물 속에서 바로 인물의 미소를 통해 실현되었다. (위키백)



History


Leonardo da Vinci began painting the Mona Lisa in 1503, during the Italian Renaissance and, according to Vasari, "after he had lingered over it four years, left it unfinished...." He is thought to have continued to work on it for three years after he moved to France and to have finished it shortly before he died in 1519. 


Leonardo took the painting from Italy to France in 1516 when King François I invited the painter to work at the Clos Lucé near the king's castle in Amboise. Most likely through the heirs of Leonardo's assistant Salai, the king bought the painting for 4,000 écus and kept it at Château Fontainebleau, where it remained until given to Louis XIV. Louis XIV moved the painting to the Palace of Versailles. After the French Revolution, 

it was moved to the Louvre. Napoleon I had it moved to his bedroom in the Tuileries Palace; later it was returned to the Louvre. During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 it was moved from the Louvre to a hiding place elsewhere in France.


Mona Lisa was not well known until the mid-19th century when artists of the emerging Symbolist movement began to appreciate it, and associated it with their ideas about feminine mystique. Critic Walter Pater, in his 1867 essay on Leonardo, 

expressed this view by describing the figure in the painting as a kind of mythic embodiment of eternal femininity, who is "older than the rocks among which she sits" and who "has been dead many times and learned the secrets of the grave."



The Mona Lisa painting now hangs in the Musée du Louvre in Paris, France. 


The painting's increasing fame was further emphasized when it was stolen on August 21, 1911. 

At the time, the painting was believed to be lost forever, and it would be two years before the real thief was discovered. 

Louvre employee Vincenzo Peruggia stole it. Peruggia was an Italian patriot who believed Leonardo's painting should be returned to Italy for display in an Italian museum. 


He was caught when he attempted to sell it to the directors of the Uffizi Gallery in Florence; it was exhibited all over Italy and returned to the Louvre in 1913. Peruggia was hailed for his patriotism in Italy and only served a few months in jail for the crime.



모나리자의 초안 500여년만에 공개



1965년 이탈리아의 한 부유한 상인으로부터 루브르 박물관이 기증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 초안은 미술계에서 진위논란 대상이 되어 오랫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박물관측과 복원연구팀이 첨단 스캐닝과 3D프로그램을 통해 검증한 결과 정식으로 진품 판정을 내렸고 2001년 이후 본격적인 복원작업에 착수해 세상에 공개하게 됐다.

검증결과에 따르면 이 초안은 1504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는 모나리자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1503년~1506년 시기에 속한다. 


또 왼손으로 스케치 된 점과 왼쪽 윗부분에 위치한 서명등이 대다수 다빈치 작품의 흔적 및 습관들과 일치한다. 


이외에도 왼쪽하단에 다빈치의 작품 초안을 다수 소유하고 있는 수집가의 인장이 찍혀있어 그 신빙성을 더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원래 모나리자 그림에는 기둥이 있었다?


모나리자의 초상을 모티브로 그린 라파엘의 스케치를 보면 기둥이 있었지만 다빈치의 그림에는 기둥이 없는 이유에 대해 '액자 제작자가 그림을 액자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기둥 부분을 잘라내버렸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Copy of the "Mona Lisa" (Walters gallery, 볼티모어)
두 개의 기둥이 그려져있다. 






앙기아리 전투


1504년, 피렌체 시장인 피에르 소델리니가 시청사 회의식 벽에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의로했다.

다빈치와 함께 이 의뢰를 받은 사람은 미켈렌젤로였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 벽화를 그렸고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 벽화를 그렸다.

르네상스의 두 거장이 같은 곳에서 벽화를 그린것은 참으로 대단한일이였다.

 

앙기아리 전투는 피렌체와 교황령 연합군이 밀라노군을 무찌른 전투였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빈치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았다. 최후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대실패였다. [출처] 삼색냥이


앙기아리 전투 / 17세기경


실제로 다빈치가 그린 앙기아리 전투 벽화는 남아있지 않다. 

대신 익명의 작가가 모사한 밑그림과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후에 루벤스가 모사한 그림이 남아있다.

 


St Anne and the Virgin

성 안나와 성 모자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1510. Oil on panel.  Louvre, Paris. 168 × 112 cm 


모나리자의 미소를 성 안나와 성모 마리아로 옮겼다는 '성 안나와 성 모자'


성 안나의 무릎에 마리아가가 앉아서 어린 예수를 안으려하고 있다.

안나는 마리아의 어머니이지만 여기서는 마리아와 동년배의 연령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이 그림을 다 빈치의 동성애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로 보기도 했다. 


 

Detail of the heads of St Anne and the Virgin(left) & Study of the head of St Anne(right)



St. Anne cartoon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and St. John the Baptist). National Gallery, London

1499–1500, Charcoal, black and white chalk on tinted paper, 142 × 105cm


비록 밑그림이었지만 이 작품은 많은 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미켈란젤로도 이 그림을 연구했다.

그리고 밑그림을 그린지 10년이 지난 1513년 다빈치는 프랑스로 가서 이 그림에 채색을 했다.


그는 채색을 할때 아기 세례 요한을 빼고 대신 양을 그려넣었다. 양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채색을 했을뿐 완성작이진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각과 회화가 완벽히 조화된 작품이라고한다. 


평소에도 다빈치는 섬세한 스케치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인체뿐만아니라 옷의 주름에 관련된 스케치도 다수 있으며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생동감 넘치는 의상들을 그려냈다.



[출처] [회화] 르네상스의 거장(2) / 레오나르도 다빈치|작성자 삼색냥이



   

Detail of Child Jesus, Virgin Mary, st John the Baptist



John the Baptist

세례자 요한


다빈치는 여생을 로마와 밀라노를 오가며 보내다 프랑스에 정착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1519년 봄에 프랑수와 1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빈치의 세례자 요한 그림은 관능적이면서도 양성적인 느낌을 가득 담고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다빈치가 남긴 마지막 인물화이기도 하다. [출처] 삼색냥이


St. John the Baptist 1513–1516. Oil on walnut wood. 69 × 57cm. Louvre Paris 


중성적인 매력을 표현한 '세례자 요한'

이 그림에서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느니라'라는 말을 표현 하듯이 위를 손으로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신비한 미소를 띄고 있다.



Bacchus


Bacchus 1510–1515. Oil on walnut panel transferred to canvas. 177 × 115cm. Louvre Paris 


세례자 요한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포도의 관, 호피 가죽, 지팡이 등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데생은 그 바위의 묘사 등에서 레오나르도적인 것이 적고, 또 체구나 얼굴의 표현이 딱딱해서 

품격있는 레오나르도의 필치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워 많은 학자들이 회의를 가지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예술가도 세상사에 참여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여러분야에 관심을 두었다. 

이런면에서 볼때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출처] [회화] 르네상스의 거장(2) / 레오나르도 다빈치|작성자 삼색냥이




● 살바토르 문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가운데서도 최근 500년만에 다시 나타나 미술시장을 뒤흔들어놓은 작품으로 2018년 열린 경매에서 이 작품은 4억5030만달러(약 4791억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모든 미술 시장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살바토르 문디(구세주)



살바토르 문디는 1500년경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의뢰한 작품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500년간 어디에 있었는지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요. 다만 1900년대에 당시 영국 컬렉터 프랜시스 쿡이 작품을 사들였고 그의 후손이 1958년 소더비 런던 경매에서 45파운드에 팔았다고 합니다.


500년만에 다시 나타난 살바토르 문디는 작품에 덧칠이 심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웠기에 그의 제자인 볼트라피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2005년 뉴욕의 딜러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약 1만달러에 작품을 사들이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요. 컨소시엄은 다빈치의 작품일 가능성을 염두해 뉴욕의 올드 마스터 보존 처리 전문가 다이앤 모데스티니에게 복원을 의뢰했습니다. 3년이라는 기나긴 복원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전 세계의 전문가에게 컨설팅을 맡겼고 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빈치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전문가는 스케치를 변형한 흔적이 있고 스푸마토 기법과 곱슬머리의 표현, 세밀한 손가락에서 드러나는 해부학적 지식 등이 전형적인 다빈치 작품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반대편에서는 일부분을 제외한 전반적 작품 수준이 다빈치의 다른 작품에 비할 바가 못되고 다빈치가 부분적으로 손을 댄 스튜디오 작품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작품에 보이는 스푸마토 기법이 다빈치 자신보다는 그의 제자들 스타일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미술사학자이자 레오나르도 연구자인 매슈 랜드루스 교수는 다빈치는 작업에 20~30%만 참여했을 뿐 작품의 상당수는 제자 베르나르디노 루이니가 그린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480년생인 루이니는 16세기 초반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름난 화가인데요. 다빈치의 영향을 깊이 받아 스승의 구성요소, 명암법, 독특한 얼굴형 등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주로 기독교 주제를 그려왔습니다. 특히 이 작품 속 옷 주름과 예수의 얼굴과 겉옷, 크리스털 보주 등에서 루이니의 기법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복원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도 있는데요. 작품 손상이 워낙 심해 대대적인 복원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어떤 부분이 본래 작품인지 가늠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검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주저없이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크리스티는 살바토르 문디를 고전 작품을 내놓는 올드 마스터 세일이 아닌 컨템퍼러리 세일에 포함시켰는데요. 세계의 주요 컬렉터가 컨템퍼러리 세일로 몰려든다는 점을 고려한 탁월한 전략이었습니다. 그 결과 2018년 11월 15일에 열린 경매에서 이 작품은 4억5030만달러(약 4791억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미술 시장 역사상 최고 기록입니다.


논란을 안고 지난해 미술시장의 최고가를 기록하며 아랍 왕자에 팔린 살바토르 문디. 이 작품은 경매 직후 아부다비 루브르 미술관이 작품을 전시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지난 9월로 예정됐던 전시행사가 연기된 후 그 행방이 일반에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부다비 루브르 미술관이 돌연 전시를 연기한지 몇달이 지난 최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해당 작품의 진위에 큰 의심을 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관련 전시에 살바토르 문디를 전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루브르의 직원들 사이에는 살바토르 문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아닌걸 우린 알고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도 합니다. (출처: 티키타카)


-. WSJ,'살바토르 문디' 실구매자 "사우디 왕세자 맞다" (중앙일보 2017.12.08)

-. 사우디 대사관에서 피살된 카슈끄지 자녀 근황 (2019.04.03 클리앙)




코덱스 아틀란티쿠스(Codex Atlanticus)


다빈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머릿속을 스쳐 갔던 모든 생각의 단편들을 메모로 남겼다고 한다. 개인적인 상념에서 우화·철학적 명상·문학·음악·미술·수학·천문학·인체·기계 장치·무기 등 말 그대로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아이디어를 빼곡히 기록해 두었다. 무려 1119 페이지에 이르는 다빈치의 그 메모들을 폼페오 레오니가 집대성해서 만든 것이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이다.


다빈치가 연구한 과학의 절정은 이 '코디체 아틀란티코' 에서 나타난다. 

이 습작들은 현재 밀라노 암브로시아 도서관에서 소장중이다.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암브로시아나 미술관과 함께 이어져 있는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었습니다. 좌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메모 '코덱스 아틀란티쿠스'가, 저 멀리 중앙에 카라바조의 정물화 '과일바구니'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Vitruvian Man 


Vitruvian Man by Leonardo da Vinci, Galleria dell' Accademia, Venice (1485-90)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또는 인체비례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소묘 작품이다. 

고대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 10서(De architectura)' 3장 신전 건축 편에서 

‘인체의 건축에 적용되는 비례의 규칙을 신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고 쓴 대목을 읽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의 설명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대의 인체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을 데려다 눈금자를 들이대면서 실측하여 기록하였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컴퍼스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원에 붙는다… 정사각형으로도 된다. 

사람 키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잰 길이는 두 팔을 가로 벌린 너비와 같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람의 손가락과 손바닥, 발바닥과 머리, 귀와 코의 크기 등을 숫자로 계산하면서 

사람 몸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수학적으로 계량화하는 고대 사상을 실험하게 되었다.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Marcus Vitruvius Pollio,?-?)


BC 1세기 경에 활약한 고대로마의 기술자, 건축가이다. 

그의 저술로 알려진 《건축십서 De achitectura 》는 10권으로 구성된 일종의 건축학 논문이며, 

로마건축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저서는 그리스 건축에서 상당부분 영향을 받았는데 규칙적인 비례와 대칭구조, 고전적 형식미를 강조 했다. 

그는 마치 새나 벌이 둥지를 짓듯이 건축은 자연의 모방으로 생각해서 건축재료는 자연에서 나와야 하며 

인간에게 휴식처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건축구조는 세가지 본질을 반드시 갖추어야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견고함(firmitas), 유용성(utilitas) 그리고 아름다움 (venustas)이다. 

그리스 건축양식을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으로 분류한 것도 비트루비우스이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재조명되는데 1414년 피렌체에서 재발견되어 

르네상스 건축가들에 빠르게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며 

고대 로마건축 연구 및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영향을 받아 유명한 비트루비우스 해부도를 그렸다.


Disegno di Anatomia Femminile

여성의 해부도


The Principle organs and vascular and Urino-genital systems of a woman. 1512.  47*32.8cm. Royal Library, Windsor Castle


이 여성 해부도는 1480년대부터 그의 생애 동안 열심히 연구한 해부학 연구의 성과의 하나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시체를 해부하는 것을 교회법으로 금지시키고 있던 당시로서는 놀랄 정도로 정확한 각 기관과 각 혈관 계통의 자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는 특히 여성의 임신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임신과 태아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투시도로서 뿐만 아니라 형태의 아름다움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해부도로서의 정확성보다는 도상학적인 세부의 아름다움이 넘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A page from Leonardo's journal showing his study of a foetus in the womb (c. 1510) Royal Library, Windsor Cas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