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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고려불화 - 700년만의 해후 1부




ㅇ 전시유물 : 혜허(慧虛)필 <수월관음도> 등 108점
ㅇ 국내, 일본,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총 44개 처
-. 일본 소재 고려불화 27점, 미국·유럽 소재 고려불화 15점,  국내 소재 고려불화 19점 등 61점,
-. 중국·일본 불화 20점, 조선 전기 불화 5점, 고려시대 불상과 공예품 22점




고려의 불교와 불교회화
후 삼국시대의 분열과 혼란을 겪은 후 918년 다시금 한반도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고려는 군소 호족들과 지식층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 정책을 실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사회 통합 이념으로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가 불교를 숭상하며 수도 개경에 10대 사찰을 건립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요시한 것과 대각국사 의천 등 많은 왕실과 귀족 가문 자재들이 출가하여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고려시대 불교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불교는 통일신라에서부터 시작된 각종 종파가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고 체제를 갖추어 국가 불교로서의 외적 성장 뿐 아니라 내적 발전도 함께 이루어 갔으며, 향도 등 각종 불교 결사의 활동으로 다양한 사회 계층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불교에 기대어 각자의 소망을 발원하였으며 사찰을 세우거나 경전, 불화를 조성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더하여 고려시대의 무르익은 귀족 문화와 세련된 취향은 고려불화와 같이 숙련된 기법과 귀한 재료. 오랜 시간의 정성과 노력을 요구하는 수준 높은 불교 미술품이 발달하는 배경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화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활발한 대외 교류를 통해 중국 송.원대 불화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160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실제 제작되었던 수많은 고려불화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이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미타불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을 통해 당시 유행했던 불교신앙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으며, 고려불화에 보이는 섬세한 기법과 높은 완성도는 고려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려불화는 원나라 침공으로 강화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부터 약 120년간에 걸쳐 제작됐다 (대부분 14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 이 짧은 시기에 제작된 그림은 전세계 160여 점밖에 남아있지 않는데다 그 중 10여 점만 국내에 있을 따름이다.


고려불화의 특징 중 하나는 색채다. 민병찬 전시팀장은 “동시대의 중국불화에 보이는 청색이 고려불화에는 보이지 않는 등 이웃나라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지역마다 나는 안료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붉은 빛만 해도 중국의 것은 조금 더 선홍에 가까운 반면, 고려의 것은 다소 어둡다. 조선 미술의 영향으로 한국의 미는 흔히 단순하고 검박한 것이 특징이라 알려져 있지만 고려불화는 눈에 띄게 화려하다. 특히 금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金泥)’로 표현한 영향이 크다. 중국이나 일본은 붉은 가사가 단색으로 표현되는 반면, 고려의 것은 당초문·모란문 등의 문양을 금니로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가사자락의 주름을 섬세히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요, 투명한 사라(紗羅·베일)에 직조된 무늬까지 그려 넣었다.


중앙박물관 미술부 배영일 학예연구사는 “물방울 무늬의 광배가 전신을 감싸 ‘물방울 보살’로 불리는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금니를 머리카락 한 올 짜리 붓으로 찍어 그렸으리라 추정될 정도로 그 섬세함이 극에 달했다”고 말했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보인다. 조선 전기까지 고려불화의 기법이나 도상이 전해지긴 하나 그 섬세함은 확연히 떨어진다. 고려불화의 발원문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임금은 하늘처럼 오래 사시고 왕비는 만년토록 오래 사시기를’이란 문구가 흔히 등장한다. 고려불화는 단순히 인간의 손이 그린 것이 아니었다. 호국과 성불의 염원이 그려낸 그림이었다. (중앙일보 2010.10.12)



해외로 떠도는 고려불화


고려불화는 우리나라에 10여 점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 작품들도 일본에서 사온 것들이다. 
고려불화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주로 배불정책의 조선 전기때이다. 조선의 배불 정책으로 인하여 고려 때까지 보호되던 막대한 사찰과 그에 딸린 경전, 조각, 회화, 기물 등이 오갈 데가 없어지게 된다. 많은 사찰들은 폐찰되고, 심지어는 유생들의 손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서원 등으로 변해지고, 이런 와중에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에서 국가적인 입장으로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하게 되자 조선은 대장경과 함께 범종, 불화들을 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찰 90%가 소실되고, 사원건축들과 함께 그동안 전해오던 불화, 불경, 불상 등도 모두 불타버려 사라졌으나 일본에 건너간 회화들은 대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우리가 지금 찾아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는 모두 13세기 이후의 것들로, 14세기 작품이 주요이다. 고려문화의 가장 극성기인 11-12세기의 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고려의 무신정변, 몽고침략, 홍건적의 침입 등은 전국토를 황폐화시켰고, 따라서 고려의 예술품들은 보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나마 남아있는 작품들도 소유하지 못하고 일본이나 외국이 대다수 소장하고 있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결과에 대한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자기 자신의 문화나 미술품에 대해 몰랐고 경시했던 우리 자신이 아닌가 여겨진다.


임진왜란같은 격변기에 행해졌던 약탈과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등의 이유로 고려불화가 한국내에 존재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지만 , 고려불화가 소중하다고 의식을 했다면 애지중지 간직했을 것이고 국내에 상당수는 존재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홍준 교수 설명에 의하면 고려불화를 알아 준 것도 결국은 일본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도자기나 막걸리의 예 처럼)


○ 美로 간 고려불화… 그 뒤에 일본 古미술상 있었다 (조선일보 2014.01.20)
○ 해외 떠도는 우리 佛畵… 그 중간에는 일본 있다 (조선일보 2014.01.08)

○ 해외를 떠도는 한국문화재(이데일리)



고려불화제작 기법


고려불화는 대부분 비단 바탕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하여 제작된다고 한다.

고려불화에 주로 쓰인 적색, 녹색, 청색은 각각 주사, 석록, 석청이라는 광물성 안료에서 나온 것으로 이들 안료는 원석을 가루 낸 뒤 맑은 아교물을 부어 여러 차례 거르는 방식으로 만들었단다. 금가루를 개어 만드는 금니도 고려불화에 많이 사용되었다한다.


안료 가루를 비단 위에 칠하기 위해서는 안료가 비단에 잘 붙을 수 있도록 접착제 역할을 하는 아교가 필요하다. 아교는 동물의 가죽 등에서 추출한 천연 접착제로 물에 녹여서 아교물을 만든 뒤 여기에 안교 가루를 개어 사용했다. 한편 바탕의 뒷면에 채색을 한 후 앞면에서 다시 채색하는 고려불화의 배채법은 깊은 색감을 살리고 안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 주어 고려불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 준다.



[KBS1 역사스페셜] 천년신비, 고려불화의 세계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전세계에 전하는 고려불화 숫자는 1백60여점에 이른다고 한다. 고려 불화라고 해도 그려진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우선 깨달은 자인 부처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또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을 하고 성불을 미룬 여러 보살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채 깨달음을 수행하는 수행자 모습의 나한이 있다.
 
부처님 그림도 신앙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불법, 즉 가르침을 중시할 경우에는 비로자나불이 된다. 또 국락 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는 때에는 아미타불이다. 그리고 깨달음 그 자체를 중요시할 경우에는 석가모니불이 된다.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 가운데 50여점, 즉 3분의 1 가까운 수자를 차지하는 불화가 이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시는 부처님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죽은 뒤 극락 세계에 태어나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부처님인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미다.




제1부 '깨달음의 존재, 부처'

현존하는 고려불화를 주제별로 나누면 여래도(부처), 보살도, 나한도, 경상변도 등으로 분류된다. 부처 그림은 비로자나불, 석가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아미타불도,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같은 정토계불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는 현세의 복락, 고난으로 부터의 구제, 극락왕생 등 현실적안 기원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부처를 주존으로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정토신앙의 성행을 반영하듯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가 많다.



비로자나불도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 · 노자나불 · 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노사나불(盧舍那佛) · 석가불(釋迦佛) · 수용신(受用身) · 변화신(變化身)으로 쓰고, 비로자나불은 자성신(自性身)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또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불을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에 배치하여 설명하고 있고, 밀교(密敎)에서는 《대일경(大日經)》의 설을 계승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체라고 한다. (네이버백과사전



    

비로자나불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620 x 882mm, 일본 후도인(不動院)소장

화면은 배경뿐만 아니라 4면의 테두리까지 모두 '화불' 혹은 "佛"자로 가득차 있다.


원형 광배 안에 비로자나불이 보관과 법의를 착용하고 영락과 팔찌를 한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다.
본존의 두광(머리둘레의 빛)과 법의(부처님의 옷)는 물론이고 '萬五千佛(만오천불)'이라 써진 윗부분과 화면 하단의 공간에 수많은 화불(化佛)이 그려진 독특한 도상의 그림이다. 그 아래에 흰색 안료로 '大平' 이라는 글자를 썼는데, 글자안에도 수많은 화불을 그려 넣었다.


세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전같은 원형 안에 울긋불긋하게 그려진 얼굴이 바로 화불이다. '化佛(화불)'이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작은 여래의 모습으로 표현된 형식이다. 화면 하단에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그려진 탑의 좌우에 화불 무리를 배치하고, 각 무리마다 '五菩薩','十九佛', 五十三佛', '보승칠불<寶勝七佛>' 등의 명칭을 작은 네모칸 안에 써 넣었다.


아름다움은 時空을 초월하고 염원은 生死를 뛰어넘는다.

'만오천불'을 그리고자 했던 화공의 집념과 원력을 보고있자면...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스런 붓질이 들어갔는지 숙연해집니다.




비로자나삼존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23.0 × 82.0cm, 독일 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화엄경의 주존 비로자나불이 가운데 대좌 위에 앉고, 그 양쪽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는 정면향의 비로자나삼존도이다. 비로자나불의 양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화면 향좌측의 문수보살은 양손으로 여의(如意)를 받쳐 들고 있고, 보현보살은 왼손으로 연꽃 줄기를 받쳐 들었는데 연꽃 위에 경권(經卷)이 놓여 있다. 이 그림은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 중 유일한 비로자나삼존도이다.


본존과 협시, 대좌에는 금니선과 금니 문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육신부를 제외하면 금니(금물감)가 사용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 본존의 법의와 보현보살의 치마에는 연화당초원문, 문수보살의 치마에는 당초원문을 주조로 하였다. 대좌에도 다양한 금니 문양을 많이 그려 넣었는데, 연꽃 바로 아래의 겹쳐진 원형 무늬, 금강저 무늬, 사자 주변의 육각형 무늬 등 연속문늬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혜원)


(금니는 고운 금가루를 아교풀로 개어서 만든 안료를 의미한다.)




■ 변상도(變相圖)

'변상도'란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서 묘사한 그림이다.


넓게는 벽화(壁畵)나 벽에 거는 탱화(幀畵) 등을 포함한 불교회화(佛敎繪畵) 전반뿐 아니라 설화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 고대 인도의 부조(浮彫)까지도 의미한다. 좁게는 경전의 첫머리 혹은 권(卷) 머리를 도해(圖解)하는 사경화(寫經畵)와 판경화(版經畵)만을 통상 변상도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진리의 내용[眞相]을 변화하여 나타낸 것이라 하여 변상(變相)이라고도 한다. 그 기원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담은 불전도(佛傳圖), 전생(前生)을 묘사한 본생도(本生圖)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대 인도의 여러 불탑(佛塔)과 탑문(塔門) 및 난순(欄楯) 등에 새겨진 부조상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처음에는 석가모니와 관계된 설화내용을 바탕으로 부조 또는 그림으로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다양한 경전이 성립되면서 그 내용과 심오한 교리를 함축하여 한 폭의 그림으로 설명한 변상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법화경(法華經)》 계통의 변상도로 〈묘법연화경변상도(妙法蓮華經變相圖)〉, 《화엄경(華嚴經)》 계통으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 《정토3부경(淨土三部經)》 계통으로 〈관무량수경변상도(觀無量壽經變相圖)〉, 이외에도 〈범망보살계경변상도(梵網菩薩戒經變相圖)〉 〈금강경변상도(金剛經變相圖)〉 〈현우경변상도(賢愚經變相圖)〉 등이 있다.

한편, 그 경전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경(經)이 잘 보호될 것을 기원하는 뜻에서 신장상(神將像)을 그린 〈불공견색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 제13권 변상도〉(1275)나 〈문수사리문경변상도(文殊師利門經變相圖)〉(1276) 등도 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을 수록한 경전과는 달리 불교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거나 새롭게 위경(僞經)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부모은중경변상도(父母恩重經變相圖)〉 등이 있다. 대체로 초기에는 필사(筆寫)를 위주로 하는 사경(寫經)이 경전의 형태를 이루면서 권(卷) 머리에 또는 경(經) 머리에 한 폭의 그림으로 장식한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가 유행하였고, 점차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목판이나 활판으로 찍은 판경변상도(版經變相圖)가 많이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판경의 첫머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본문과 함께 삽도 형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경전과 거기에 수반되었던 변상도는 승려계급이나 특수계층에 한정되어 유통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교단이 발달하고 불교신앙이 대중화되면서 큰 규모의 변상도가 나타나게 된다. 즉 벽화나 탱화의 형태를 빌려 경변상의 내용이 확대되었는데, 이른바 관경변상도, 화엄변상도, 미륵하생경변상도 등이다. 탱화의 형태를 빌린 변상도는 비단이나 종이 위에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지며 회화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경변상도는 백지(白紙)나 감지(紺紙), 비단 등에 먹이나 금·은을 사용하여 선(線) 위주로 도상을 창출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한국에 현존하는 최초의 변상도는 신라 때 만들어진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8세기 중엽)가 있고, 고려시대 사경변상도로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발원으로 제작된 〈감지금니대보적경변상도(紺紙金泥大寶積經變相圖)〉(1006, 일본 文化廳 소장)와 〈화엄경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 제31권 변상도〉(1337, 호암미술관 소장) 등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목판인쇄술의 보급과 함께 경판변상도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정조(正祖)가 발원한 용주사판(龍珠寺版) 〈불설부모은중경변상도〉(1796)가 유명하다. (네이버백과사전)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16觀變相圖), 고려. 1323 비단에 색, 224.2 × 139.1cm,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

최하단 가운데 부분의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인이 왕비와 공주로 아마 이들의 시주로 이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겠느냐고 보는 사람도 있다


관경십육경변상도는 『관무량수경』 경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극락세계에 이르는 16가지 방법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것을 관상함으로써 극락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화면은 세로로 네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각 관을 나타내는 부분에는 붉은색 칸을 만들어 금니로 표기를 했다.

물과 나무와 연못 등을 배경으로 부처와 보살의 정교한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졌다.


전체적인 구성은 화면을 세로로 네 부분으로 나누고, 16관의 차례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진행하는 형식이다. 각 관을 나타낸 부분에는 붉은색 구획을 마련하여 금니로 해당 관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또 하단의 화기에는 제 1관(日沒觀)부터 16관(하배생상관 下輩生想觀) 까지 "정토 십육관의경각송(淨土 十六觀依 經各頌)"이라 하여 각 관에 대한 게송을 적어 놓았다.
 
상단의 제 1관(日沒觀=일몰관)은 까마귀가 그려진 붉은 해로 나타내었다. 좌우에는 넘실거리는 물결을 그려 제 2관(水想觀=수상관)을 나타내고, 그아래 제 3관(地想觀=지상관)을 유리지(琉璃地) 위에 황금선이 교차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제 4관(樹想觀=수상관) 가운데 흰 빛줄기가 뻗어나가는 나무를 중심으로 일곱 그루의 보배나무를 그렸고, 제 5관(池想觀=지상관)은 붉은 여의주에서 물줄기가 솟아나와 보배연못으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으로 그렸다.


제 6관(摠想觀=총상관)은 보배연못 아래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는 아름다운 누각을 제 7관(華座觀=화좌관)은 화려하게 치장된 대좌 위에 당간을 꽂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제 8관(像想觀=상상관-화기에는 僧想觀=승상관 으로 기재)화좌 사이에 앉은 삼존상으로 나타내었다. 제 9관(遍觀色想觀=편관색상관), 제 10관(觀音色身觀=관음색신관), 제 11관(勢至身想觀=세지신상관)은 각각 부처님의 몸,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생각하는 관인데, 화면 중앙에 가장 큰 규모의 삼존상으로 그렸다. 부처의 신광 안에는 화불이 있으며, 삼존 좌우로는 승려형과 보살형의 권속이 둘러싸고 있다. 제 12관(普觀想觀=보관상관)은 정토에 나는 것을 관찰 하는 관으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승려와 여인 4명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었다. 


제 13관(雜想觀=잡상관)은 구름으로 둘러싸인 누각 앞에서 아미타불이 협시보살을 거느리고 설법하는 모습이다. 제 14관(上輩生想觀=상배생상관)상배관의 연못에서는 잡상관의 아미타삼존이 이 연못의 상배 왕생자(往生者), 즉 높은 근기의 왕생자들을 맞이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우측은 제 15관(中輩生想觀=중배생상관) 향좌측은 제 16관(下輩生想觀=하배생상관)을 배치하였다. 한편 향우측의 중배관 연못에서는 두 보살이, 향좌측의 하배관 연못에서는 한 보살이 각각 중배 왕생자들과 하배 왕생자들을 맞이 하고 있어, 왕생의 등급에 따른 차이를 보여준다.


게송에 이어지는 발원문에는 이 공덕이 일체에 미쳐 자신과 중생이 극락에 오르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루 만이라도 부처의 가르침을 행한 자는
마땅히 부처를 좇아 극락의 연꽃에 가리라.
수행이 적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말하지 말라.
만 개의 횃불도 지푸라기 불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미타여래 한분이 허공을 꽉 채우니
푸른 부처의 눈은 바다처럼 깨끗하네.
이처럼 가없는 부처의 모습을,
다만 白毫의 모습만 봐도 자연히 모두 보게되네.

<관경십육관변상도> 게송 중에서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16觀變相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일본 오타카지<大高寺>소장


이작품은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의 중심 부분인 정종분<正宗分>의 내용을 그린 곤경십육관변상도로, 

극락세계의 열여섯 가지 장엄한 모습을 관상함으로써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면의 구도는크게 상단.중앙. 외연부로 나눌 수 있다.
화면 상부에는 Γ¬ 자형태로 9개의 원이 있고, 좌우에 각각 2개의 원으로 13관상을 표현하였다. 상부의 좌측 위에서 아래로 두 번째에 위치한 제 13관 상배관<上輩觀>은 도상을 확인 할 수 있지만, 나머지 모양이 불명확하고 명칭이나 게송이 기재되지도 않아서 각각의 도상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중앙은 전각을 중심으로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의 전각에는 부처와 권속들을 배치하고, 좌우에는 빈 대좌와 보리수를 배치하였다. 보리수는 붉은색의 열매를 표현하였다. 전각의 상단부분에는 중단의 전각을 감싸듯 신비로운 빛이 좌우로 뻗어 올라가고, 여기에 하강하는 비천을 좌우에 배치하였다. 


중단의 전각에도 부처와 권속들을 배치 그좌우에는 여러 성중과 공양하는 비천을 그렸다.
상단의 전각에도 부처와 권속들,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시방제불<十方諸佛>과 가릉빈가<迦陵頻伽>를 배치하였다. (아름다운 사람)





  

원각경변상도(圓覺經變相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650 x 850mm,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원각경, 즉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의 내용을 그린 불화이다. 원각경은 고려시대에 선종의 근본 경전으로서 매우 중시되어 그 위상이 높았다. 경전의 내용은 문수보살을 미롯한 열두 보살이 부처와의 문답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각 보살의 이름을 딴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전에서는 주존의 존명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나, 이 그림에서는 설법하는 자세의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12명의 보살은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옆에 방제<旁題>를 두어 존명을 밝힌 보안보살<普眼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청정혜보살<淸淨慧菩薩>, 위덕자재보살<威德自在菩薩>, 변음보살<辨音菩薩>, 정제업장보살<淨諸業障菩薩>, 보각보살<普覺菩薩>, 원각보살<圓覺菩薩>, 현선수보살<賢善首菩薩>, 로 확인되어, 경전의 내용과 일치한다


보살들 아래에 역시 방제로서 존명을 기재한 팔만금강, 이십팔천왕, 십만귀왕, 대범왕은 원각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경전을 지닌 자를 수호할 것을 맹세하는 대중으로서 등장하고 있어, 경전의 내용이 이 그림에 충실히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림박물관 소장 <원각경변상도>(1357)에서도 유사한 구도가 보인다. (출처 : 도록의 해설서)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후기, 1350 비단에 채색, 171.8 × 92.1cm, 일본 지온인 소장

미륵하생경변상도 3점은 모두 비슷한 화면 구성을 보이고 있으나 지온인본 및 신노인본은 서로 거의 같은 구성이고 1294년 작 묘만지본은 약간 다르다. 이로보아 기년명이 없는 지온인본은 1350년 작 신노인본과 모본을 공유했을 가능성 등 좀 더 가까운 관련성을 가지고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이래 뿌리깊게 신앙되었던 미륵신앙은 미륵상생경에 의한 도솔천 왕생사상과 미륵하생경에 의한 용화수하성불의 이른바 메시아 사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은 극락왕생의 아미타 사상과 거의 흡사한 것이지만, 뒤의 것은 오랜 후세에 석가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미륵이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것으로, 가령 후삼국 때 궁예가 세상을 구제하러 강림한 미륵으로 자칭하기도 하였습니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은 인도 바라나시 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고 도솔천에 머물며 진리의 법문을 설합니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에 걸쳐 설법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못다 제도한 중생들을 성불케 한다고 합니다. 이 3회의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합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당시까지 구제되지 못한 모든 대중을 성불시킨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린 『미륵하생경변상도』로 일종의 교화용 경변상도이지만 본존 미륵불을 크게 클로즈업시켜 화면을 압도하도록 구성했기 때문에 예배용의 존상화적 성격에 가까운 그림입니다.


크게 2등분되는 화면의 상부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합니다. 상부 중앙에는 미륵불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불상 무릎 좌우로 두 협시 보살이 좀 더 크게 묘사되었는데 이 삼존은 삼각형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륵불 주위에는 보살중 10대 제자들이 좀 더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이 주위를 제석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미륵불은 보통 의좌상(倚坐像)을 하고 계신데, 그 이유는 설법하는 장소가 법회를 하기 위해 꾸며지거나 실내가 아닌 용화수 아래의 길거리인 이유로 가부좌를 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미륵불의 머리 보주 위에서 올라간 광선이 허공으로 올라가 맴을 돌아 좌우 두 가닥으로 퍼져 나가는 곳에 구름 속에 싸여 있는 2층의 화려한 건물은 성불하기 이전에 거주하던 도솔천 궁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모습이며 그 좌우에 5구씩 부처와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를 그렸다, 이들 하늘 세계와 미륵불이 있는 지상세계를 흰 광선 모양의 둥근 광배가 분리시키고 있는데 불보살들이 발 아래의 청문대중과도 역시 구름으로 구획짓고 있는 점에서 당시 불화의 위계에 의한 계층적 구도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청문대중은 바둑판 모양의 지상에 좌우 대칭되는 구도로 묘사되었는데 오른쪽에는 남성, 왼쪽에는 여성이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꿇어앉은 남녀상과 머리를 깎고 있는 남녀상인데 꿇어 앉은 인물들은 2용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용왕과 용녀일 것이며 삭발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륜성왕과 왕비로 생각된다.


이왕족들은 미륵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여 머리를 깍는 전륜성왕<轉輪聖王> 부부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최근 일본에서 공개된 묘만지본에서는 이들이 자씨부수범마<慈氏父修梵摩> 자씨모마하제<慈氏母摩하提>, 즉 미륵의 부모임을 각 도상의 옆에 금니로 기록하고 있어, 지온인본과 신노인본에서도 역시 미륵의 부모를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튼 이 장면에서는 삭발하고 있는 두 인물이 가장 크게 그려지고 있어서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단에는 사람들의 생활상 (가마를 메고 가는 사람들, 씨 뿌려 거두는 추수, 칠보가 떨어져 흩어져 있어도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모습 등 경전에 묘사된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 그림은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난 후 전륜성왕 내외와 모든 신하 시녀 그리고 미륵의 부모를 위시한 일체 중생을 세 번에 걸쳐 설법하여 출가성불케 하는 내용을 도해한 것입니다.




전륜성왕의 권속들

경작하는 백성들의 모습


향로와 공양인들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1350(충정10). 견본채색. 178 x 90.3cm, 일본 와카야마현 신노인(親王院)

부처의 붉은 가사 전면에는 원문을 가득 그려 넣었다. 원문 안에는 가득한 금니의 문양들이 그려져있다.  고려불화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이 원문이 옷주름에 접히더라도 항상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석가가 열반에 든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 이 세상에 태어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용화수(容華樹 -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되어 그때까지 구제받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세 번의 설법회를 열어 모두 성불시킨다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의 내용을 그린 경변상도이다.


화면의 구성은 크게 상하로 나뉘어 있는데 화면의 상단에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을, 하단에는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곳이라고 알려진 시두말성(翅頭末城)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화면 가운데에는 의자에 앉은 듯이 두 다리를 내린 미륵불과 같은 자세를 취한 협시보살좌상, 그 주위로 제석, 범천, 십대제자(十大弟子), 십이신장(十二神將)이 배치되어 있다. 윗부분에는 천개(天蓋)를 중심으로 보수와 구름을 탄 5체의 부처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녀가 그려져 있다.


미륵삼존좌상의 아래에는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 전륜성왕과 왕비가 꿇어앉아 삭발하는 장면을, 그 아래에는 미륵이 하생한 시두말성의 화려한 누각, 말, 코끼리가 끄는 보차, 전륜성왕 및 여러 대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하단부에 농부가 밭갈이 하는 장면, 추수하는 장면, 금은보화를 쓸어담는 장면 등은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한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도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화수(畵手)인 회전(悔前)이 그린 이 미륵불화는 적색과 녹색, 군청이 주조색이며, 문양 및 세부묘사에 금니를 사용하고 있다.


출처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회화 (유마리, 김승희)

참고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左] 미륵하생경변상도의 추수하는 농부

그림 하부 우측에 고려시대 추수하는 농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벼를 베는 사람과 도리께로 타작하고 떨어진 낱알을 쓰는 등의 갖가지 풍요로운 가을 정경은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한다"는 하생경의 표현을 도상화시켰다 할 수 있다. 





    

미륵하생경변상도 (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 1294년, 비단에 색, 일본 묘만지<妙滿寺>소장


묘만지본에는 최상단에 '미륵하생지도', 하단 화기에 '용화회를 주제로 함을 밝혔다. 미륵경전에서 용화회는 본래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여는 법회를 의미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미륵불에 대한 불교의식도 용화회라 일컬었다.


고려시대에는 충렬왕이 1301년과 1302년에 광명사에서 친히 용화회를 열었다는 기록 등 용화회 개최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융성했던 법상종과 미륵신앙이 용화회 개최 및 미륵하생경변상도 제작의 배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극락에 가길 기원하는 아미타불 -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파하는 부처로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쉽게 입에 올리게되는 법문의 부처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죽은 뒤 극락 세계에 태어나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부처님인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미다.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 가운데 50여점, 즉 3분의 1 가까운 숫자를 차지하는 불화가 이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다. 살았을 때 선행과 염불을 많이 한 사람은 임종할 때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로 맞이해간다는 '내영도'형식이 많다.아미타 내영도에는 몇가지 형식이 있는데, 아미타불 단독으로 왕생자를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 삼존불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8대 보살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25 보살 또는 많은 성중이 맞이해 가는 장면 등이 있다.


아뭏든 아미타불은 단독 예배를 위한 아미타불 존상화, 아미타 내영도, 관경변상도 등의 여러가지 모습으로 수없이 많이 그려지고 숭배되었다. 이 그림들은 왕족이나 귀족의 원당이나 사찰의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에 봉안되었다.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2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찰의 극락전, 극락보전, 무량수전, 아미타전에 봉안되며 우협시보살로 관음보살, 좌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과 함께 삼존불이 봉안되어있다.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아미타정인이나 설법인, 항마촉지인을 주로 취한다.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 유명하다.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시대, 123.0 x 57.0cm,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본존불의 오른손은 앞을 향하여 밑으로 내리고 있다. 손모양이 잘 보이지 않아 돋보기로 봐야 보인다. 손바닥에는 법률이 금니로 그려져 있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붙여 원을 만들고 있고 나머지 손가락은 앞으로 뻗고 있다. 아미타불의 수인이다.

아미타불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삼존도이다. 이 작품은 특히 아미타삼존의 발 아래에 구름 표현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바 있다. 내영도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아미타불 일행이 타는 구름이 내영도의 거의 필수적인 도상적 요소인 데 비해 고려불화 내영도에는 구름이 없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형식은 내영도가 아니라 수기도(授記圖) 즉 수기를 주는 장면이라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름이 표현된 이 아미타삼존도는 고려불화 내영도가 구름을 생략했을 뿐 내영 장면을 의도한 것이 맞다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아미타내영도에 대부분 구름이 표현된다 하여 구름을 내영도의 필수적 도상으로 보기는 어렵고, 이 그림에 그려진 구름도 일본 아미타내영도의 구름과는 다르다. 일본 아미타내영도에서는 아미타 일행이 실제로 구름 위에 올라타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데 비해, 여기서는 단순히 아미타 일행이 위치한 공간이 구름 위 공중임을 암시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영도인지 아닌지는 구름의 존재 여부보다 당시 고려인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으며 내영(혹은 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미타불 일행의 모습 자체는 구름의 존재와 상관없이 내용을 암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아미타삼존도는 형식상 하쿠쓰루미술관((白鶴) 및 MOA미술관 소장 아미타삼존도들과 같은 계열로, 고개를 앞으로 내민 아미타불의 자세와 두 협시보살의 배치가 매우 유사한 구성을 보여준다. 다만 관음보살이 든 버드나무 가지가 하쿠쓰루미술관본에는 없으며, 세지보살이 지물 없이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도 다른 점이다.


이 아미타삼존도의 또 다른 특징은 문양이 매우 세밀하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붉은 가사에는 고려불화 특유의 당초원문이 그려져 있는데, 달팽이처럼 말린 덩굴의 표현은 가느다란 금니선을 세 겹으로 구사하고 덩굴줄기 사이에는 작은 삼각형을 무수히 채워 넣었다. 이 문양에서 사용된 금니선의 간격은 비단 바탕의 올 간격보다도 좁을 정도로 세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협시보살에도 다양한 문양이 사용되었다. (출처 : 부처마을)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005x542mm, 일본 MOA미술관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좌측) 아미타불의 오른쪽, 그림에서는 왼쪽에 대세지보살이 있다. 서방극락세계에 있는 지혜 및 광명이 으뜸인 보살이다. 지혜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보살이기도 하다. 정수리에 보병을 이고 천관을 쓰고 있다. 가슴에는 자그만 상자를 들고 있다.

(우측) 아미타불의 왼쪽, 보는 입장에서는 오른쪽에 관세음보살이 서 있다.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정병을 들고 있는 왼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화려하기가 더 이상 이를데가 없다. 거대한 목걸이와 아름다운 팔찌가 드러나 있다. 손 모양의 우아함도 대단하다.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삼존도이다. 본존은 오른손 바닥을 내밀며 팔을 길게 뻗고 시선은 아래를 응시함으로써 왕생자를 맞이하는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아미타불과 보살의 얼굴은 경직되지 않고 생동감이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이는 시선 처리와 진행방향의 암시로 인해 마치 그림의 한 끝에 왕생자가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모두 연꽃 위에 올라가 있다. 아미타불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데, 원형의 꽃무늬를 금니로 그려넣었다. 옷은 주름져 있으나 금니 무늬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비사실적으로 처리해야 더욱 근엄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좌우의 협시보살의 너울 옷은 환상적이다. 너울에 표시되어 있는 원형의 금니무늬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장자리 원형의 무늬가 겹치는 곳에서는 원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원형의 근원성도 너무나 말도 안되는 곳에서는 사실성을 회복했다. 세 분의 두광 표현도 너울을 그린 것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고려불화가 육신부에 주선을 사용하는 데 비해 본존의 육신부에 주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점, 그리고 옷주름 표현에서 먹선 또는 한 단계 짙은 색선을 긋고 가장자리를 따라 가늘게 금니선을 덧그리는 관습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먹선 또는 한 단계 짙은 색선만 사용하였다는 점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또한 보통 고려불화에 그려지는 원형 문양이 원칙적으로 형태만 원으로 형성될 뿐 가장자리에 윤곽선이 그러지지 않는 데 비해, 이 불화의 원형 문양은 실제로 윤곽선을 돌리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출처 : 중앙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혜원 글)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비단채색, 103.0×68.0cm


연꽃을 밟고 서있는 아미타여래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역시 연꽃을 밟고 서 있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모셔져있다.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 후기. 117.3 x 60.2cm.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중품중생인을 결하고 높은 대좌 위에 앉은 아미타불이 입상의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설법도 형식의 아미타 삼존도이다. 얼굴이 정방형에 가깝고 당당하고 중량감 있는 신체를 가진 아미타불에 비해 보살은 세정한 비례를 보인다.


두 보살은 모두 사라<紗羅>를 착용한 모습으로, 투명하고 우아한 표현에서 고려 불화의 수준 높은 기법을 볼 수 있다. 관음보살은 좌상의화불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왼손에는 정병을 , 오른손에는 버즈나무 가지를 들었다. 세지보살은 정병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끈이 달린 경합을 감싸 쥐고 있다.


『관무량수경』에서 설하는 16관중 제 11상에서 세지보살의 모습을 "육계 위에 보병(寶甁)이 있어 온갖 光明이 가득하여 두루 佛事를 나툰다"고 묘사하는데, 보관에 그려지는 정병의 표현은 이에 입각한 것이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 1330년, 비단에 색, 일본 호온지<法恩寺>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좌측은 관세음보살, 우측은 대세지보살을 그리고 있다.


아미타삼존도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세지보살로 이루어지나 여기에 아난과 가섭을 더한 특수한 형식의 아미타 삼존도이다.
아난은 양손을 합장하고 가섭은 발우를 받쳐 들고 있다. 협시보살이 모두 연화좌위에 양다리를 포개고 앉은 자세로 표현된 것은 고려불화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관세음보살은 버드나무 가지를,세지보살은 경책이 놓인 연꽃줄기를 들고 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고려불화가 대부분 권문세족등 귀족계층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는데 이작품은 화기에 의해 향도(香徒)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음이 명시되어있다는 점이다. 香徒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불교 신앙결사의 한 형태로, 수행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佛事를 위한 경제적 보시의 성격이 짙은 모임이었다.


* 향도들은 주로 불상, 불화, 종, 탑 등을 조성하였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 후기. 111.2 x 50.9cm.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아미타불 본존은 얼굴과 턱선이 풍만하고 손의 표현이 두툼하며, 육신부의 윤곽을 표현하는 주선이 다른작품에 비해 굵고 경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하단의 협시보살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본존은 육신부 전체를 금니로 칠한 데 비해 보살의 육신부는 살구색을 칠하였고 본존보다 밝고 발그레한 주선과 붉은 바림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설법도 형식에서 두손모두 엄지와 중지를 붙인 상태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세워 들고 왼손은 명치 높이로 눕혀 든 모습을 보이는 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오른손은 손가락을 붙이지 않고 있으며, 왼손을 옆구리 정도로 내려 들고 있다.


본존은 얼굴과 턱선이 풍만하고 손의 표현이 두툼하며, 육신부의 윤곽을 표현하는 주선이 다른작품에 비해 굵고 경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협시보살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본존은 육신부 전체를 금니로 칠한 데 비해 보살의 육신부는 살구색을 칠하였고 본존보다 밝고 발그레한 주선과 붉은 바림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100x510m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국보 218호

(첫번째) 아미타삼존도는 대부분 아미타불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는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대세지보살을 지장보살이 대신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존재까지도 성불시킨 뒤에 마지막으로 해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있는 그야말로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극락에 왕생하는 자를 맞이하는 이 그림에서는 어쩌면 지혜를 일깨워준다는 대세지보살보다 지장보살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를일이다. 지장보살은 머리를 깎았고, 금니로 표현된 등근 구슬을 손으로 받들고 있다.


(두번째) 대자대비의 관음보살이 본존의 한발 앞에 나와 몸을 앞으로 굽힌 채 내영자에게 두 손을 뻗어 손 위에 올려놓은 연꽃 대좌 위로 맞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옥에 떨어진 마지막 한 명의 중생까지 구원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 보살은 소년처럼 앳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구도자처럼 관음과 지장의 도움으로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에 왕생하고픈 고려 귀족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아미타불이 보살들을 거느리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내영도 형식의 아미타삼존도는 고려불화에서 상당수 찾아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내영도의 맥락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아미타불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빛은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끓은 왕생자를 감싸면서 그가 아미타불에 의해 극락왕생의 길로 곧 인도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아미타불 앞으로 나와 왕생자에게 다가선 관음보살은 허리를 굽혀 왕생자가 탈 금련화(金蓮花)를 내밀고 있다.


삼존도하면 대부분 중심이 되는 본존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게 마련인데, 이 그림은 오른쪽에 아미타불이 있고, 왼쪽에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서 있다. 관음보살은 약간 구부려 왕생자를 적극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특이한 그림이다. 그래서 덩치가 가장 큰 아미타불이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쳤고, 지장보살이 부처의 오른쪽에, 관음보살이 부처의 앞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약간 헝클어진 균형을 완벽하게 잡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가슴 부근에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여원인 즉 설법할 때의 수인이지 않을까 싶다. 얼굴과 가슴 그리고 손은 검게 나타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부분을 칠한 염료가 탈색한 듯하다.


아미타불이 왕생자를 향해 빛줄기를 방사하고, 관음보살이 연화대를 내밀어 왕생자를 태우려는 모습의 삼존도 형식의 내영도는 서하의 아미타내영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관련성은 오래 전부터 주목받았다. 이 고려불화의 내영도와 서하의 내영도가 같은 모티브를 갖게 된 원인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며 이 작품 외에 다른 고려불화 내영도에서는 현재까지 이러한 도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희소하고 흥미로운 사례이다.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인데 비해, 여기서는 세지보살 대신 보주를 든 지장보살이 그려진 점도 특이한 점이다. (출처 : 부처마을)



이러한 모습은 중국 서하(西夏)에서 그려진 아미타내영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관련성이 오래 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아래의 그림은 위의 그림과 주제와 구도가 아주 비슷한 서하의 그림이다. 이번에 같이 전시되었다.






▲ (左) 아미타삼존내영도, 중국 서하西夏 13세기, 면에 색, 142.5*94.0cm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죽은 자를 맞이하러 오는 아미타삼존내영도이다. 중국계에 속하는 불화이다.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세지보살의 보관에는 정병이 있어 존격을 뚜렷이 드러내 준다. 나무 밑에 앉은 왕생자는 승려의 차림으로 두 손을 합장하고 있으며, 그의 머리에서 마치 영혼과 같은 빛줄기가 위로 발하고 있다. 빛줄기 속에는 왕생(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어린아이가 막 연화대에 오르려 하고, 아미타불의 이마에서 발하는 서기가 내려와 어린아이를 감싸고 있다. 손을 내민 아미타불, 연화대를 들고 다가서는 보살, 그 앞의 왕생자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구도는 고려불화 중 <아미타 삼존도>와 매우 가까워 오래 전부터 주목받았다.


▲ (中, 右) 아미타불도, 중국 서하西夏 12-13세기, 비단에 색, 러시아 에르미타주작물관 소장




아미타 삼존도(阿彌陀 三尊圖), 고려시대, 일본 가쿠린지(鶴林寺) 소장 중 도난. 일본 중요문화재


● 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미타삼존도 사건 계기로 본 해외문화재 환수문제
국내 절도범이 2002년 7월 일본 효고(兵庫)현 가쿠린지(鶴林寺)에서 훔쳐 반입한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의 반환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법의 ‘선의취득’ 조항을 들어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아미타삼존도는 국내 반입 후 4~5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최종 구매자가 대구 어느 사찰에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기증받은 사찰은 도난당했다고 주장,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출처 : 현대불교 2004.12.03)


● 훔쳐 온 문화재는 어디로 갔나?
얼마전 일본의 절에 보관중이던 고려 불화 한 점이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하여 절취되었고, 그 절취범은 국내에 판매를 하였다고 경찰에서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사건의 처리에 있어 국내에서 판매하여 소장하고 있다는 경북 모 암자 주지의 완강한 부인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사건을 종결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수수께끼의 낡은 보물창고 2005.06.13)


서울중앙지검을 日本사찰의 대리인으로 방문한 제일교포2세인 정광균씨

● "일본서 도난당한 고려 佛經 한국에 있다" 10여년 전에 종결된 사안… [日 재수사 요청]
조선왕실의궤 반환 맞춰 - 日, 민사소송은 할 수 있지만 소유자 몰라 사실상 불가능
일본이 조선왕실의궤 등 1205권의 한국 도서를 반환키로 하면서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도난당한 고려시대의 중요 문화재가 한국으로 밀반입됐다며 이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한 것으로 8일 확인됐다... 일본 외무성이 재조사를 요청한 것은 나가사키현의 안코쿠지(安��寺)가 소유했던 고려판 대반야바라밀다경(高麗版大般若波羅蜜多經)과 효고현의 가쿠린지(鶴林寺)가 보관했던 아미타 삼존도 불화다.... (출처 : 조선일보 2011.05.09)


"목숨 걸고, 고려佛畵 찾아오라"
日사찰 주지 특명… 대리인 방한, 정부가 문화재 지정땐 환수 불투명
‘일본 원정 문화재 절도단’이 일본 사찰에서 훔친 고려 불화(佛畵)를 되찾으려고 일본 사찰 관계자가 지난 7일 한국을 방문했다... 재일동포 2세인 일본 사찰측 대리인(59)은 9일 본지 기자와 만나 “고려 불화를 소장했던 일본 효고(兵庫)현 가쿠린지(鶴林寺) 주지로부터 ‘목숨을 걸고’ 아미타삼존상을 되찾아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선대로부터 가보처럼 물려온 물건을 자기 대에서 잃어버린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민법상 ‘선의 취득의 원칙’에 의해 대구의 모 암자에 고려 불화 소유권이 있다면 적당한 값을 치르고서라도 되찾아 가겠다”고 했다. (출처 : 조선일보 2011.05.09)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 1320년, 177.2cm×91cm, 비단에 채색, 일본 송미사 소장.




아미타 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고려후기, 비단에 색, 175.3 X 84.3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소장


아미타불 아래 여덟 보살의 몸이 향하는 방향이 엄격한 좌우 대칭을 이루어 고후쿠고코쿠젠지<廣福護國禪寺>소장본에 비해 한층 정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고려 말로 갈수록 구도가 좌우대칭을 강조하게 되고, 조선시대 예배화에 보이는 정면성으로의 지향이 뚜렸해진다. 이 작품에서는 통상 앞줄 중앙에 배치되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뒷줄에 배열되었는데, 이러한 예는 고려의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유일하다. 이는 달리 보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본존 가까이로 이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들어서면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제외한 다른 보살들의 지물이 점차 사라지거나 연꽃으로 획일화되면서 화면에서 아미타삼존만 개별성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이미 이때 부터 감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아름다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