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화

고려불화대전 - 제3부 ‘수행자의 모습, 나한’


'나한(羅漢)'이란 

불제자로서 수행 끝에 최고의 단계인 아라한과를 얻어 일체의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얻은 성자(聖子)를 말한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 ; arahan, Arhat; Paragon of Spiritual Practitioners)의 줄임말로 덕 높은 고승을 통틀어 아라한이라고 한다. 보살과는 달리 주로 실존인물로 부처의 직제자나 바로 아래 단계로 깨달은 고승들에게 붙이는 이름이어서 수많은 나한들이 있지만 십육나한, 오백나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나한들에 대한 신앙은 불교의 성행과 더불어 스님들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크게 성행하게 된다. 

923년 태조가 양나라에 보낸 사신 윤질이 5백 나한상을 가지고 귀국하여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한 이후 1053년 문종은 신광사에서 나한재(羅漢齋)를 베풀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거나 국왕의 장수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농사를 위한 기우제의 목적으로 행해졌다. (출처: 고려불화대전)



● 석가삼존십육나한도(釋迦三尊十六羅漢圖)



석가삼존십육나한도(釋迦三尊十六羅漢圖). 高麗, 14世紀, 비단·彩色, 93.0×46.2 삼성미술관 리움


상단의 삼존 중 본존은 연화좌에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고 왼손은 배 앞에 내려놓았으며 양 협시보살은 모두 선 채로 연꽃 줄기를 받쳐 들고 있어 수인과 持物만으로는 존명을 확실히 구별할 수 없으나, 십육나한과 함께 그려진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삼존으로 추측된다. 


16명의 나한은 피어오르는 구름 줄기 사이에 배치하였는데, 석가삼존 앞의 세 명은 공양물을 바치며 경배하는 모습이고, 나머지 나한들도 대부분 공양물을 들고 있어 봉헌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삼존 중 본존은 육신부 전체를 금으로 칠하였으며, 나머지 인물에는 윤곽선에 금니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지물 표현을 금으로 강조하여 빛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혜원)


 

       (불화에서 보던 고려 '창금 장식' 목함 일본서 첫 공개)


이 불화는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석가삼존십육나한도와 함께 고려시대 석가삼존십육나한도로는 사례가 적은 귀중한 불화로서 독창적인 도상을 바탕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또한 불화 내에 묘사된 나한이 들고 있는 지물(持物)인 발(鉢,) 경상자(經箱子), 손향로 등에서 고려시대 금속공예와도 비교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해준다.


석가삼존과 십육나한을 한 화폭으로 그린 고려불화는 현재 이 불화 외에 일본 네즈(根津)미술관에 소장된 석가삼존십육나한도(釋迦三尊十六羅漢圖)가 있다. 현전하는 160점에 달하는 고려불화가운데 석가삼존십육나한도와 같은 도상(圖像)은 네즈소장본과 리움소장본의 2점이므로 도상의 현존 사례가 적은 편이다. 16나한은 석가여래 열반 후 미륵불(彌勒佛)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받은 분들이다. 응진전(應眞殿)은 바로 16나한을 봉안하기위한 전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가삼존 16나한도. 

고려, 일본 네즈(根津)미술관, 90.0 × 44.5 


네즈미술관본에 비해서 리움소장본 불화가 화면이 어둡지만 두 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도상을 배치한 구성형식과 도상이 유사함을 살필 수 있어 동일한 초본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의 표현법, 필선, 색채, 문양 등 양식적 특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리움소장본 보다 네즈미술관 소장본이 필선이 더 깔끔하고 인물표현도 활달하며 문양 표현 역시 명료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가삼존> 석가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협시(脇侍)를 배치하는 삼상(三像)형식. 협시를 범천(梵天) ∙ 제석천(帝釋天)으로 하는 경우와 2인의 불자(佛子)를 가진 시자(侍者)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도나 중국에서도 보통 양협시를 단순히 보살형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수(文殊, 騎獅)와 보현(普賢, 騎象)이 있고, 그외 관음과 허공장(虛空藏) 또는 집금강, 선종의 가섭(迦葉) ∙ 아난(阿難)이 짝지워진 것 등이 있다.


<십육나한> 부처가 열반에 들때 불법을 위촉하고 그 호위를 담당하라는 명을 받은 16인의 나한. 현장이 번역한 『법주기(法住記)』에 설명 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오백나한도는 부처의 제자 중 아라한과를 얻은 500명의 나한을 그린 그림이다. 오백나한은 부처의 열반 직후 왕사성의 1차 결집 때 불전(佛典)을 편찬한 제자들이다. 이들을 모신 전각을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또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이라 부르고, 상과 그림을 봉안하여 예배한다. 오백나한의 존명은 경전에 구체적으로 모두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오백나한’이라는 용어만이 쓰여 있거나 오백나한 중 일부 존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통일된 존명이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중국과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존명이 각기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래 오백나한신앙이 유행하면서 오백나한도 및 조각상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 나한신앙은 주로 국가 및 집권세력의 주도로 나한재 및 나한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외침이나 가뭄 등의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으로 나한도가 발원되었다.


그림의 형식으로는 오백나한을 각각 1폭씩 모두 500폭으로 그린 것과 1폭에 500명의 나한을 모두 그린 것이 있다. 오백나한을 각각 1폭에 모두 500폭으로 그린 형식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 분산, 소장된 고려시대의 오백나한도가 대표적이다. 대부분 원형 두광을 갖추고 가사 장삼을 입고 측면을 향해 암석 위에 걸터 앉아 있으며, 그 밖에 불제자들이 사용하는 기물이 등장하는 점 등 화면의 구성방식이 유사하다.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 「오백나한도」(고려 말∼조선초기)는 1폭에 석가삼존(釋迦三尊)을 중심으로 십대제자, 십육나한, 오백나한을 모두 표현하였다. 윗부분에는 수묵의 산수가 표현되어 있다. 오백나한의 경우 적게는 2∼3위(位)에서 많게는 수십여 위(位)가 무리를 이룬 모습으로 다양한 장면이 묘사되었다. 이와 같이 한 폭에 석가삼존과 오백나한을 그린 그림은 동아시아 불교도상에서는 현존 예를 찾아 볼 수 없으나, 북송대 법능(法能)의 「오백나한도」에 대한 구체적 인식으로 바탕으로 도상이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송대의 회화, 고려시대 수묵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백나한회상도(阿羅漢得果宴儀會像圖) 비단에 채색. 121.3㎝ x 187.5㎝. 일본 교토 지온원(知恩院) 소장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란 부처의 제자 중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500명의 나한을 그린 그림.

‘나한(또는 아라한)’은 공양받아 마땅한 자, 공양으로 복을 심는 밭, 진리에 상응하는 자,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난 자, 더 배울 것이 없는 자 등으로 불린다. 나한으로는 석가모니의 제자인 십대 제자가 유명하며, 이들은 석가설법의 청중이며 불법의 전수자로서 성격을 띤다. 신체의 윤곽선과 의습선들의 단순하면서도 먹의 효과를 최대한 살린 수법은 고려시대 오백나한도의 양식적 특징을 이어받고 있다.


일본 지은원에 있는 오백나한도는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속에 약 2, 3cm 크기의 오백나한이 깨알같이 그려져 있다. 토굴 속에서 명상에 잠긴 나한, 치열한 참선 수행으로 마른 몸에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털북숭이가 된 나한, 토론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나한들, 시원한 강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나한, 개울가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쪼그리고 앉아 승복을 빨아 헹구는 나한, 경전 꾸러미와 법복 옷가지를 둘러매고 수행에 들어가려는 스님들의 행렬, 까마귀에게 모이를 던져주는 노스님 등의 모습은 소박한 스님들의 일상이자 소우주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출처: 고려불화대전 도록)



현재 국내에는 고려시대의 오백나한도가 다소 남아 있는 셈이지만, 모두 한 폭에 나한 한 사람씩 그린 그림들이다. 반면 이 그림은 한 폭에 오백나한을 모두 그렸다는 점에서 이 그림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즉, 오백나한은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산수를 배경으로 각 나한들이 제각기 개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면의 중앙에는 석가모니삼존좌상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을 배치하고 있는 점에서 지온원에 같이 소장되어 있는 관음삼십이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 1550)와 함께 조선시대 전기불화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산수 사이에서 자유분방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조선조 후기의 16나한도나 선종조사도(禪宗祖師圖) 등의 연원을 더듬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형태 역시 활달하면서도 정교하게 잘 묘사하였는데, 각 신체의 윤곽선과 의습선들의 단순하면서도 먹의 효과를 최대한 살린 수법은 고려시대 오백나한도의 양식적 특징을 이어받고 있으면서 선종화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러한 형태의 특징은 은은하고 장중한 색채로서 더욱 돋보이고 있다. 어쨌든 이 그림은 고려 불화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걸작이자 당시의 회화경향을 살필 수 있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본속에 한국불화 - 1.日 교토 지은원소장 오백나한도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고려불화 ‘오백나한회상도’를 돌려 달라.


고려 시대의 국가적 숭불 정책과 불교 신앙의 성행은 자연히 스님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나한 신앙도 성행하였다. 국가적으로 거대한 나한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왕의 행차가 빈번했던 보제사의 금당은 나한을 주존으로 모시는 나한보전이었다고 한다. 16나한, 오백나한 등 나한도도 무수히 그려졌지만,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고려는 국난이 있을 때 나한재(羅漢齋)를 올려 밖으로는 외적을 방어하고 안으로는 국태민안의 치세로 500년 동안 통일 정부를 지켰다. 이러한 불교사상 유일의 고려불화, 오백나한도(阿羅漢得果宴儀會像圖)가 지금 일본 교토 지은원(知恩院)에 보관 돼 있다고 한다. ‘나라 지키기 불교도 총연합회’는 고려 불교의 이 같은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에 있는 오백나한도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이 약탈해 가 416년 동안 보지 못하게 돌려주지 않고 있는데, 2003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개관기념으로 전시계획을 세우고 일본에 있는 그 작품을 빌려와 전시를 하고 돌려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강 이봉호는 국가적 수치라 여기고 사진을 입수해서 원형대로 복원하여 공개행사를 하고 있고, 나라 지키기 불교도연합회는 그 작품을 반환해야한다는 취지에서, 이 사실을 온 겨레에 알리고 작품이 돌아올 때 까지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한다고 한다.


금석문연구가인 이봉호씨가 복원한 阿羅漢 得果宴儀會像圖 (아라한 득과연의회상도)


그는 이 작품을 그리다 보니 '오백나한도'라는 명칭이 그림과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을 '아라한 득과 연의회상도(阿羅漢 得果 宴儀會像圖)'가 오히려 적합할 듯하다고 했다. 

아라한이 득과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의 모습이라는 의미다. (자세한 내역은 여기로)



오백나한도 중 제153 덕세위존자, 조선, 1562, 비단에 색, 44.5 x 28.4cm, LA카운티박물관


조선의 오백나한도는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1501~1565)가 발원해 1562년에 제작됐다. 조선왕조는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쳐 불교미술도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불교 전통이 강압적 정책으로 완전히 사리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는 섭정을 하면서 1550년에 승과(僧科)를 부활시키고 서울 봉은사와 양주 회암사 재건에 힘을 보태는 등 불교를 외호했다. 이때 조선불화의 명작들이 탄생한다.


문정왕후는 나라의 평안과 왕의 무병장수를 발원하며 500폭의 나한도를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그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카운티미술관 소장의 ‘오백나한도’ 뿐이다. 소나무 아래에 있는 존자는 두루마리로 된 경책을 읽고 있고, 붉은 옷과 귀걸이 등을 걸치고 있다. 화가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불교신문 - 문정왕후 불심 깃든 ‘오백나한도’ 특별 공개)




● 고려 대몽항쟁시기의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2010년 10월 12일에서 11월 21일까지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불화대전'에는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연작 열두 폭이 전시되었는데, 본래 500폭이었을 것이나 한국, 미국, 일본 등에서 확인된 14점 중 12폭이 전시되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고승을 일컬으며 고려시대에는 나한신앙이 성행하여 많은 나한도가 제작되었다.

지금 전해지는 오백나한도는 모두 똑같은 크기(폭 45cm, 길이 65cm)의 비단에 그린 수묵화로 한결같이 국토는 태평하고 임금은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국토태평(國土太平) 성수장천(聖壽長天)'이라는 명문이 있고 김의인(金義仁)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작 연도의 반은 을미년이고, 반은 병신년이다. 을미년 다음이 병신년인데, 1236년인 병신년은 바로 팔만대장경이 제조되던 해이므로 이 오백나한도 또한 고종 22년(1235)과 23년(1236)에 대몽항쟁의 의지를 담아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오백나한도는 폭마다 일련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고 저마다 독특한 얼굴과 성격을 갖고 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오백나한도



엄숙한 영계(靈界)의 분위기에서 그려진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모습이 하나같이 평온하고 자비로운 모습이라면 자연이나 일상적 분위기에 그려진 나한의 면면은 고뇌하는 모습이다. 그 처절한 모습이 마치 잔인무도한 몽고병을 물리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려 강도시기의 군신, 군민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오백나한도 중 제15 아대다존자, 고려13세기, 비단에 옅은색 53.5 x 39.5 국립중앙박물관


화면 우측 상단에 '제십오아대다존자第十五我多尊者'라는 묵서명이 있어, 이 나한의 차례와 존명을 알 수 있는 나한도이다. 

이 나한도는 보통의 고려불화와 달리 수묵담채로 그렸다. 두 명의 시자에 둘러싸여 앉아있는 존자는 굽은 허리와 얼굴의 주름살에서 나이 든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법을 설하듯 움직임이 느껴지는 입술과 생각에 잠긴 눈매, 희끗한 색채의 머리카락과 턱수염, 길고 흰 눈썹은 존자의 나이와 함께 오랜 세월의 수행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 나한도는 유사한 작례가 여러 점 남아 있어 이들을 함께 묶어 오백 명의 나한을 그린 오백나한도 시리즈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십대제자, 십육나한, 오백나한의 차례와 존명을 명기한 조선 후기의 의식집 [오백성중청문五百聖中請文]을 참고하면, 오백나한 중 15번째 존자는 '아대다존자'와는 전혀 다른 이름인 반면, 십육나한 중 15번째 존자는 '아벌다존자阿伐多尊者'로 기록되어 있다. 표기상 약간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이 나한도는 오백나한 중 15번째가 아니라 십육나한 중 15번째임을 알 수 있다. 십육나한의 차례와 이름은 경전에 의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으며, 경전상 15번째 나한의 이름인 '아시다존자阿氏多尊者'로 비정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오백나한도 중 제23 천성존자, 고려1235년, 비단에옅은색, 59.7 x 41.5, 일본도쿄국립박물관


'제이십삼천성존자'는 화면이 어둡게 변색되었으나 그림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나한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가 표현되어 있어 앉은 곳은 나무 아래의 바위임을 알 수 있다. 나한의 앞에는 한 젊은 승려가 공손히 합장하고, 나한을 올려다보고 있다.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앉아 승려를 내려다보는 나한의 시선에서 자애로움이 느껴진다. 나한에 비해 승려는 매우 작게 표현되어 있어 주된 인물과 부수적 인물과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오백나한도 중 제31 왕상존자, 54.5×40.5, 비단에 채색, 고려시대, 개인 소장


오백나한도 가운데 하나인 제31왕상존자의 그림으로, 자세는 앞서의 혜군고존자와 마찬가지로 약간 오른쪽 측면을 향하고 암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구성요소는 아래쪽에 신발만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 매우 단조롭다. 그러나 가사의 묘법이 거의 같으며 바위의 표현 역시 소위 이곽파 화풍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의 화기 부분이 거의 잘려나가 제작시기 및 목적을 단정할 수 없지만 화풍으로 미루어 보아 1235,6년에 그려진 일련의 오백나한도 가운데 한 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보필은 하였으나 비교적 형상이 뚜렷하고 특히 바위의 수묵적 묘법을 가장 잘 전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2006년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열린 '고려불화'展의 안내 표지



오백나한도 중 제92 수대장존자, 고려1235년, 비단에 옅은색, 64.7 x 42.2 국립중앙박물관


제92 수대장존자는 V자 형태의 괴목을 등지고 둥글게 엮어 만든 의자에 앉아 있다. 두 손에 받쳐 든 작은 병에서는 수직으로 무언가 솟아오르고 있는데, 존자는 고개를 들어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 작품은 다른 오백나한도 작품에 비해 금니를 많이 사용하여 광배를 금니로 둘렀을 뿐 아니라 가사에도 금강저문과 당초문을 금니로 그렸다. 옷주름 역시 기본적으로는 먹선을 이용하였으나, 그에 중첩하여 금니로 선을 그은 것을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제92 수대장존자의 부분도



오백나한도 중 제125 전보장존자, 고려1235년, 비단에 옅은색, 57.0 x 50.2 국립중앙박물관


제125 전보장존자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다. 

정병에서는 물줄기처럼 생긴 어떤 기운이 솟았다가 아래로 향하면서, 땅에 누워 장난을 치는 듯한 동물에게로 떨어지고 있다. 존자는 눈을 크게 뜨고 동물 쪽을 응시하며, 그 동물을 부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짙은 피부색과 둥글게 부릅뜬 눈, 두터운 입술은 존자의 퐁모를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이 나한은 지금까지 '진보장존자'로 소개되어 왔으나, [오백성중청문]에는 제125째 나한이 '전보장존자'로 기록되어 있고, 

실제 기록된 화제 또한 '전보장존자'로 판독이 가능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오백나한도 중 제145 희견존자, 고려1236년, 비단에 옅은색, 59.2 x 42.0 국립중앙박물관



오백나한도 중 제백칠십 혜군고존자(第百七十 慧軍高尊者) 고려(高麗), 54 X 37.3,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측면으로 앉아 있는 나한을 그린 작품이다. 

큼직한 얼굴에 짙은 눈썹, 큼직한 눈과 입, 매부리코 등이 장자풍의 얼굴과 더불어 자비스럽고 후덕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다. 

근엄하면서도 온후한 기풍이 넘치는 고승(高僧)의 모습이다. 넓은 가슴에 듬직한 체구를 하고 있다. 


가사를 입었는데, 그 옷주름이 바람에 휘날리듯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옷주름이 번잡하지 않으며 옷깃, 소매끝 등에 

짙은 먹칠을 하여 농담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두 손을 모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선정인(禪定印)의 수인(手印)은 고승의 명상하는 자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나한은 넓은 바위에 앉아 있다. 뒷편에 보이는 작은 바위 위에는 향상(香床)에 받쳐진 향 그릇이 있다. 

어깨 뒤로 암벽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신체의 윤곽선이나 각 의습선이 단순하면서도 먹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수묵 초상화(水墨肖像畵)의 전통과도 관련된다. 


이 그림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함께 전해지는 나한도 중 제427존자의 후기에 의하면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 전해오던 것인 듯하다. 이곳 지방 귀족들의 발원에 의해 시주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오백나한도 중 제234 상음수존자, 고려 후기, 55.1cm×38.1cm, 비단 채색, 일본 개인 소장.



오백나한도 중 제329 원상주존자, 고려1235년, 비단에 옅은색, 59.0 x 42.0 일암관소장 세부


제329 원상주존자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나한의 부리부리한 눈매와 무릎을 힘주어 짚은 양팔의 근육 등에서 힘과 기운이 느껴진다. 나한의 시선은 화면 왼쪽 상단의 용을 향해 있으며, 눈빛으로 용을 제어하는 듯한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오백나한도는 폭마다 일련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고 저마다 독특한 얼굴과 성격을 갖고 있다. 그중 압권은 '제329 원상주존자(圓上周尊者)'이다. 씨름선수를 연상케 하는 우람한 체격으로 바위에 걸터앉아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화면 위쪽의 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눈빛으로 용을 제압하는 모습인데 인체 데생이 정확하고 필치에는 기운이 생동한다. 고려시대 수묵화가 얼마나 수준이 높았는가를 이 작품은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오백나한도는 오래전부터 일본 이데미츠(出光)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알려져 왔는데 출품표를 보니 국내 개인소장으로 되어 있어 놀랍고 반가웠다. 돌이켜보건대 30년 전만 해도 고려 탱화는 국내에 한 점도 없었고 오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백나한도 7점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리움, 호림박물관, 우학문화재단,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개인 컬렉션의 고려 탱화가 11점이고 오백나한도 대표작도 돌아온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해외문화재 환수에 사립 박물관과 개인 소장가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오백나한도



오백나한도 중 제357 의통존자, 고려1235-6년, 비단에 옅은색, 52.5 x 36.8 국립중앙박물관



오백나한도 중 제427 원원만존자, 고려1236년, 비단에 옅은색, 58.2 x 40.4 국립중앙박물관



오백나한도 중 제464 세공양존자, 고려 1255-6, 비단에 옅은 색, 52.7x40.5cm,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나한이 신통력으로 용을 부리는 모습은 중국의 나한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도상이다. 

이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본은 화제 부분이 박락되어 '양존자' 부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오백성중청문]과 대조하여 볼때 제464번째 나한인 세공양존자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헤원)




● 고려 16 나한도


십육나한 중 첫 번째 나한 빈도로존자상 고려13세기 높이 42.0cm 국립중앙박물관


빈도로존자는 십육나한 중의 첫 번째 나한의 이름이다. 대좌 앞면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나한상이 빈도로존자이며 영통사 승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통사는 왕실의 진전(眞殿)이 설치되었던 고려시대 주요 사찰 중 하나이다. 

안상(眼象)이 새겨진 사각의 대좌 위에 앉은 나한은 두건을 쓰고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나한의 얼굴과 몸매는 세장하게 표현되었으며 명상에 감긴 듯 침잠한 표정을 짓고 있다. (국립중앙박불관 학예연구사 박혜원)


사찰의 외떨어진 곳 작은 규모로 자리하고 있는 곳에 세분의 성인을 모신 집이라는 뜻에서 삼성각(三聖閣)이라 부르는 전각이 있다. 이 전각에는 중국 도교의 영향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며 수명을 늘려주는 북두칠성인 칠성님을 부처님화하여 모신 치성광 여래를 중앙에 모시고 그 좌측에 인도의 마리산(천태산)에서 선정에 드신 독성인 나반존자를, 그 우측에 우리고유의 신앙의 대상인 산신인 호랑이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 세 성인 중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도를 닦아 깨달음을 증득하여 연각의 지위에 있는 분을 독성(獨聖)이라하며 나반존자나 빈두로존자 또는 빈두로파라타 존자로 불리워지는 부처님의 제자 16나한 중의 한분으로 사찰의 삼성각이나 독성각 또는 나한전, 영산전에 모셔지기도 한다. 나반존자는 흰 머리에 아주 긴 눈썹을 지니고 있어 부처님의 다른 제자와 확연히 다른 얼굴의 모습을 불화나 조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 나반존자님의 희고 긴 눈썹)



고려 십육나한도 중 제7 가리가존자(迦理迦尊者). 국내 개인소장. 보물 제1882-1호


이 나한도는 16나한도 중 제7 존자인 가리가존자를 표현한 것으로, 의자에 앉아 고요하게 사색하는 이국적인 모습의 수행자를 수묵담채로 담담하게 담아내었는데, 바위와 수목을 배경으로 하는 고려 오백나한도와 확연히 구분되는 도상적 특징이다. 


이 작품은 국토의 태평, 국왕의 장수 등을 발원하며 병신년에 그려진 것인데, 필선과 색채, 표현방식 등에서 1235년에서 1236년 사이에 제작된 고려 나한도와 거의 같은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작시기인 丙申年은 1236년으로, 다른 나한도와 마찬가지로 동량(棟梁) 김의인(金義仁) 등 무인들의 주도 하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불화가 제작될 당시는 몽고의 병란이 있었던 국가적 위기의 상황으로, 국난 시 크게 베풀어졌던 나한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제작된 사례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불화는 고려시대 제작된 나한도와 16나한도 중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며, 16나한도로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제15 아벌다존자와 이 작품이 유일하다. 현존하는 고려불화 중 13세기에 제작된 불화는 매우 드물고 특히 16나한도는 그 예가 거의 없어, 이 작품은 고려시대 16나한 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 십육나한도 중 제15 아벌다존자(阿伐多尊者).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882-2호


고려시대 나한신앙은 특정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전 시기에 걸쳐 유행하였으나, 

현재 불화로 남아 있는 16나한도를 비롯하여 제7 가리가존자도와 이 작품이 유일할 정도로 그 유례가 드물다. 


화제란에는 묵서로 “第十五 阿代多尊者”라고 적어 놓았으나, 무학대사의 의례집을 토대로 1809년에 영파성규(影波聖奎)가 다시 지은『五百聖衆請文』에는 “第15 阿伐多尊者”라고 등장한다. 아마 원래의 화제를 후대에 옮겨 쓰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아대존자와 그를 시봉하는 시자 2인을 그렸는데, 老尊者는 죽절형 주장자에 몸을 의지하여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노비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얼굴 표정에는 기백이 살아 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화면의 여백을 존중한 안정된 구도 속에 농묵의 변화를 통한 깊은 공간감과 입체감을 표현하였으며, 안정된 구도와 세밀하고 유려한 필선, 그리고 사실적인 인물 묘사와 백색과 붉은색, 짙은 농묵 등의 묘한 색채대비를 통하여 격조 높은 그림을 완성하였다. 특히 존자의 의자 밑에 자그맣게 묵서로 “惠間(또는 惠閒)라고 작자명을 적어 놓았는데, 고려 16나한도와 오백나한도를 통틀어 작자명이 기록된 유일한 예로서도 주목된다. 


제작 이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면의 꺾임과 박락, 그리고 후대의 수리 등 아픈 상흔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으나 현재 고려시대 13세기에 조성된 불화는 세계적으로 그 수가 많지 않고, 더구나 국내에 잔존하는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만으로도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인사의 오백나한도 화첩



해인사에는 오백나한도라 불리는 화첩이 보관되어 있다. 그 정식 명칭은 <어제정관붕오백존나한책(御製丁觀鵬五百尊羅漢冊)>이다. 

화첩의 발문에 의하면 중국 청나라 건융황제(乾隆皇帝)가 보리수 잎을 구하여 당시의 유명한 화가 정관붕으로 하여금 그 잎에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화첩은 모두 27매로 병풍처럼 접게 되어있고, 한 장의 크기는 가로 31.5㎝, 폭 24.1㎝로 총 길이는 661㎝이다.

이 화첩의 내용은 제일 첫장에는 연화 좌우에 사십이수관음을 그렸고, 다음 장부터 오백 명의 나한을 각장마다 이십분씩 각각 다른 형태로 그렸다. 마지막 장에는 사천왕상을 보리수 잎에 그려 붙이고, 다른 일면에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정사하고 마지막에 발문이 붙어있다.


해인사지에 의하면 제2차대전 중에 일본인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반이되었다가 광복 이후에 시중에 흘러나온 것을 1947년 당시 주지 환경(幻鏡)스님이 매입한 것이고 한다. 환경스님의 회고록에는 문교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불교 문화재는 박물관보다는 사찰에 보관되어져야 한다고 관계부처에 건의하여 해인사에서 인수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스님의 꿈에 일주문에 많은 대중 스님들이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오백나한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 윤회를 벗어난 자, 악을 떠난 자, 또는 마땅히 존경받을만한 자라는 뜻으로, 원시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오백이라는 숫자는 부처님의 제자 오백 비구를 말한다. 여기에는 부처님 입적 후 왕사성 칠엽굴에서 행한 제일결집 때에 참여한 오백의 비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나, 오백나한의 명호에 후세의 스님들도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후세에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오백나한의 신앙이 성행하게 되었고, 사경(寫經)은 경전상에서 경전의 서사, 수지 독송의 공덕을 말하고 있으나, 초기에는 경전의 전수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된 후에는 국가의 안위나 조상의 명복을 비는 하나의 신앙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오백나한도는 중국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 1736-1795) 시대에 살았던 궁중화가 정관붕(丁觀鵬)의 그림이다.

정관붕의 생몰(生沒)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나 도석화(道繹畵)와 인물화(人物畵)에 정통하였으며, 유작(遺作)으로는 자유중국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태평춘시도(太平春市圖)나 설어도(雪漁圖) 등 여러 명품을 남겼는데 특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오백나한도는 그의 대표작임에 틀림없는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이 오백나한도는 대작은 아니지만 섬세한 필치와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색채가 종교화에서 느낄 수 있는 법열이 담겨져 있을 뿐더러 모두 보리수 잎에 그려져 있어 더욱 불교적이며 우아하다.


이 오백나한도는 화첩(畵帖)으로 되어 있는데, 총27장으로 각 장마다 보리수 잎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병풍처럼 접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총 길이는 6m 61cm이며 한장의 크기는 가로 31.5㎝, 폭 24.1㎝이다. 이 화첩은 건륭황제가 직접 구한 보리수 잎에 당대 최고의 명화가 정관붕에게 오백나한을 그리게 한 것으로 보아 궁중의 보관용이었거나 그 당시의 고승(高僧)이나 큰 사원에 황제가 직접 기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화첩의 내용을 보면, 첫장에 푸른색 바탕에 보리수를 배치하고 연꽃 위에 42수(手)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그렸는데 한눈에 그의 필치를 알 수 있는 명화이다. 그 뒤의 25장에서는 보리수 잎 하나하나에 스무 분의 나현상을 그렸으며, 맨마지막 별장(別張)에는 사천왕(四天王)상을 그렸다. 그리고 각 장마다 그림의 좌편에 10줄로 된 발문(跋文)을 쓰고 있다. (월간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