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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월드뮤직


이토렌트의 한 분이 올려주신 글을 링크로 남겨 놓습니다.



1. [월드뮤직]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 누에바 칸시온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넘어가던 시기의 라틴아메리카는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외국 거대 자본의 막강한 힘에 휘둘리며 경제적ㆍ문화적인 종속이 심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또한 빈부의 격차를 비롯해 굳어져 가는 사회적 모순과 여러 나라에 난립했던 군부 독재정권의 횡포로 인해 힘없는 민중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지니지 못한 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새로운 노래’라는 뜻을 지닌 누에바 칸시온은 라틴아메리카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노래를 통해 되찾자는 기치를 내걸고, 강대국들의 착취와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얼룩진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 있는 음악가들에 의해 시작된 노래운동이자 민중을 대변하는 저항의 물결이었다.


누에바 칸시온은 이미 1950년대부터 그 음악적인 자양분과 의식적인 기초가 마련되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룬 쿠바 혁명이 누에바 칸시온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되며, 음악적으로는 안데스 음악의 전통을 비롯한 민속음악의 수집과 연구가 그 바탕이 되었다. 그 음악적인 초석을 마련한 인물로 아르헨티나의 아타왈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와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가 손꼽힌다. 이들은 민속음악의 발굴과 함께 전통에 기초를 둔 새로운 소재의 노래들을 만들었고, 그 노래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누에바 칸시온 세대의 가수들에 의해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알려졌다.




2. [월드뮤직] 그리스



지중해 빛이라는  색채의 표현을 창조한 아름다운 파란 색 바닷가와 하늘, 하얀 벽 그리고 그리스 신화 등을 통해 우리들에게 알려진 나라, 에게 바다에서 태어난 땅이 그리스라는 게  옳을 정도로 그들은 바다에 빛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는 무엇보다 서양 역사의 근원지라는 점과 민주주의의 발원지 였다는 점만으로도 문화적인 탐구의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동서양 문화를 모두 갖추었다는 면에서 월드 뮤직 이해의 순서에 있어서 우선권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렘베티카(Rembetica)란?


그리스 아테네 평민촌에서 생겨난 가요로서, 오스만투르크에서 독립하였을 때 터키에서 귀국한 그리스인이 터키 현악기를 연주하면서 터키 양식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 자연스럽게 그리스의 렘베티카가 되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터키 가요도 포함됩니다. 렘베티카(Rembetika) 혹은 레베티코(Rebetiko)라고도 불리는 렘베티카는 전통적인 색채를 띤 현대 그리스 대중음악의 근간이 된 음악입니다. 그리스 현대사의 중요한 기점이라 할 수 있는 1922년 터키와의 전쟁 이후, 소아시아 지역으로부터 150만 명에 이르는 많은 난민들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이 난민들이 아테네의 외항(外港)인 피레우스를 중심으로 이들만의 개성 있는 문화를 형성하게 되는데, 렘베티카는 이들이 거주하던 거리의 카페나 술집에서 부르던 노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약과 매춘, 실업, 밀수 등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생겨난 렘베티카는 가난과 연애와 같은 통속적인 것들과 소외된 삶, 사회적인 문제들을 소재로 한 노래였습니다. 




3. [월드뮤직] 안데스 음악



서글픈 바람의 노래

안데스 음악


남미 대륙의 서부를 종단하면서 북으로는 카리브해까지, 남쪽으로는 남극 바다와 닿아있는 안데스 산맥. 안데스 음악은 이 고원의 척박한 땅에 문명을 일구었던 인디오들의 음악이다.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안데스 국가에 속한다.


한 나라나 민족, 지역, 또는 하나의 문화가 지켜온 음악 전통이 담겨 있는 월드 뮤직의 대부분은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그 정서적 특징이 만들어진다. 특히 다른 문화에게 정복당한 역사를 경험한 지역의 음악은 그 ‘한(恨)의 정서’로 인해 음악적 감동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신대륙 발견의 선봉에 섰던 스페인에게 찬란했던 잉카 문명을 정복당하고 고난의 역사를 살아야만 했던 인디오들의 슬픔이 짙게 배어있는 안데스 음악 역시 그중의 하나로 세계 음악팬들에게 감동을 전해왔다.


16세기, 황금을 찾아 나선 스페인 인들이 처음 남미 땅을 밟은 이후 남미 인디오의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안데스 고원에 꽃피웠던 잉카의 찬란한 문화는 무지한 서구인들의 폭력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역사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제국주의의 폭력과 지배가 지속되는 동안 남미 인디오들의 80%인구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뿌리깊은 고통과 슬픔의 한을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이 흘렀고. 1970년 사이먼과 가펑클이 'El Condor Pasa:철새는 날아가고'가 안데스 인디오 음악임을 알린 후, 안데스의 음악은 비로소 부활하여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의 음악은 그래서 지난 세월의 깊은 회한을 머금어 애절하고, 비장하며, 우수에 가득 차있다. 빠르고, 경쾌한 춤곡들에서 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한의 정서’가 느껴지는 이유도 역시, 안데스 인디오들의 고통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기 때문이다. 


안데스 음악 속에 담긴 잉카의 번영과 몰락


‘하늘까지 이어지는 밭’이라는 의미를 지닌 안데스에는 잉카 문명 이전에도 수 천 년에 이르는 그들만의 역사가 있었다. 기원전 페루의 고지대에 이루어졌던 차빈(Chavin) 문명이나 기하학적인 그림의 신비로움으로 유명한 나스카(Nazca) 문명 등이 안데스 지역의 역사 속에 존재했으며, 잉카(Inca) 문명은 12세기 경 현재의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티티카카(Titicaca) 호수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데스의 험준한 고원 지대에 꽃피웠던 이 문명들은 다른 지역의 문명과 마찬가지로 제국과 도시를 건설하고 여러 가지 신화를 남기기도 했고, 그 문화 속에서 이어져 온 민속 음악의 특징들이 안데스 음악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안데스 지역은 잉카문명 (Inca는 ‘케추아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 발생한 곳으로 안데스 산맥을 경계로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 북부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등의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전통적으로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Andes :  하늘 까지 계속 되는 밭이라는 뜻. 

Inca  :  태양의 아들 이라는 뜻을 지님.

안데스 族 : 안데스 산맥 주변에 사는  인디언(몽골리안) 자료상 50여개가 넘는 종족

잉카 族 : 따완띤슈유(잉카 제국 왕국의 족 케추아 族) 후에 아이마라 족도 포함.


안데스 음악의 배경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잉카 문명이다. 안데스 지역에 이루어진 마지막 원주민 문명이기도 하거니와,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안데스 음악의 근간을 바로 잉카 제국의 번영과 몰락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잉카 문명이 이루어졌던 곳은 페루와 볼리비아, 그리고 에콰도르 정도이다. 잉카 제국의 옛 수도인 쿠스코(Cusco)는 인구가 이십만이 넘는 큰 도시였고, 15세기경부터는 본격적인 정복 사업을 시작해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북부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잉카’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가파른 고원에 계단식 밭을 일구고 살았던 인디오들은 태양을 숭배하고 대지를 위대한 어머니로 여겨 파차마마(Pachamama)라는 대지의 여신을 섬기며 살았다. 안데스의 인디오들은 특정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음악은 가장 중요한 감성 표현의 도구였고,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중요한 기록의 수단이기도 했다. 원래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다고 하며, 씨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공동경작을 했기에 음악은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다시 말해 안데스 인디오들에게 음악은 그들의 정체성이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문화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와 삶의 모습이 담긴 음악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픈 정서를 보듬게 된다.


영토의 확장과 함께 번성을 누리던 잉카 문명은 스페인으로부터 온 이방인에 의해 허무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스페인의 군인이자 남미 대륙 원정의 선봉에 있었던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라는 인물은 이 지역에 황금이 가득하다는 말을 듣고 1532년 200여 명에 불과한 군대를 이끌고 ‘쿠스코’로 들어갔다. 당시 잉카 제국을 다스리던 왕은 아타왈파(Atahualpa)였다. 피사로의 계략과 인디오들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유럽의 무기는 근위병 수천 명을 순식간에 제압했고, 사로잡힌 아타왈파 왕은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을 피사로에게 몸값으로 주었지만 끝내 살해당하고 말았다. 스페인이 안데스 사람들의 영혼에 준 지울 수 없는 상처는 그렇게 어이없이 시작되었다.


이어 정복자들은 꼭두각시 왕을 내세워 민심을 수습하려 했지만, 잉카의 혈통임을 자각한 그 왕은 안데스 깊숙이 도주해 스페인에 대항했다. 스페인의 횡포에 시달리던 많은 잉카인들이 힘을 모았지만, 물리적으로 스페인의 군대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결국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삭사이와망(Saqsaywaman)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잉카인의 피로 대지를 물들이며 ‘쿠스코’를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피사로가 황금을 찾아 잉카의 대지에 들어 온지 40년이 되는 1572년, 마지막 왕인 투팍 아마루(Tupac Amaru)가 처형당하면서 제국의 역사는 끝이 나고 말았다.


안데스 음악에 배어 있는 한 맺힌 슬픔은 이때부터 드리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오만과 야욕에 찬 스페인은 수많은 인디오들을 광산으로 몰았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데려온 흑인들까지 동원해 약탈해 간 금과 은, 그리고 천연자원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을 것이다. 볼리비아를 비롯한 일부 안데스 지역에는 강제 노동의 역사에 이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탄광의 노동자로 일하는 인디오들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이들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며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복자들은 또한 잉카의 후예들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종용했고,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안데스 사람들의 영혼이나 다름없는 음악을 ‘악마의 음악’으로 규정하고 그 전통을 지우려 했다. 음악가들이 탄압을 받고, 페루의 한 지역에서는 모든 전통악기들을 수거해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노골적인 침략과 수탈로 이어지는 뼈아픈 역사를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인디오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들만이 지녔던 문화의 명맥을 유지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던 광산의 어두운 지하에 그들이 믿었던 토속 신앙의 신을 모셔두었고, 안데스 대자연의 정기가 담긴 음악 역시 잊지 않았다. 오히려 스페인으로부터 들어 온 서구의 음악어법을 자신들의 음악 속에 포용하고, 기타와 하프를 차랑고(charango)와 아르파(arpa)라는 악기로 개량해 안데스의 정서를 불어넣기도 했다.




4. [월드뮤직] 포르투갈 파두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이가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포르투갈의 항구도시 리스본. 이 도시의 오래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바이후 알투(Bairro Alto)와 알파마(Alfama) 지역의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내린 밤은 바다처럼 깊고 검푸르다. 리스본 시내와 대서양이 펼쳐진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는 파두 하우스로 불리는 레스토랑들이 있다. 검은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른 가수는 포르투갈 기타의 청승맞은 음색을 따라 이베리아 반도 끝자락에 드리운 운명을 절절한 감성으로 노래한다. 


바다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온 리스본 사람들의 그늘진 삶과 진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들은 시간이 깊어갈수록 더욱 큰 울림으로 이 도시의 밤을 떠돈다. 스페인의 플라멩코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관심을 받아 온 파두(Fado)는 운명의 굴레와도 같은 바다라는 환경과 영욕(榮辱)의 역사로 인해 쌓인 포르투갈 사람들 특유의 한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이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복잡한 역사를 헤쳐 왔다. 로마 문화의 영향을 함께 받았으며, 8세기에 이르러 북아프리카로 진출해 있던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들의 침입으로 긴 세월 동안 이슬람 문화의 그늘 아래 있었다. 포르투갈이 국가로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것도 이 시기였다. 


기독교 왕국들을 중심으로 무어인들을 축출하는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과정에서 카스티야(Castilla) 왕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며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된 것이다.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을 세운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대항해 시대를 열어 나갔다. 아프리카 서해로 향하는 신항로를 발견해 브라질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고, 인도항로를 개척하며 해양대국의 찬란한 황금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영화(榮華)는 그리 오랜 역사 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1580년부터 60년 동안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국과 네덜란드 등이 식민지 경쟁에 가담하면서 해양 강대국의 위용을 잃어갔다. 또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어났던 나폴레옹의 침략과 최대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독립, 그리고 정치, 사회의 혼란이 야기되면서 국력이 점점 쇠퇴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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