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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해방이전 한국 가요사 개관




1930년대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 한국의 초창기 재즈 영상 (Korean Early Jazz Videos in 1930's ~ 1960's)


1930년대~60년대 초창기에, 일명 만요족(漫謠族)이라고 불리우는 한국의 재즈 뮤지션의 영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특히, 만요족을 선두에서 지휘하던 김해송(金海松) 선생님의 영상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습니다. 영화나 일부 남아 있는 라이브 영상을 모아서 공유합니다. 트로트/엔카 음악들과 뒤섞여 있어 재즈를 최대한 분리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의 초창기 재즈 음악에 대한 감상과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정치불안으로 처절했지만 나름 뜨거웠던 한국의 스윙시대(Swing Era)!! *


1. 김소영 배우 노래대역, 백난아 노래 - 망향초 사랑 (1941) 한국영화 '반도의 봄' 중에서  0:00

2. 영화 반도의봄 아코디언 연주 미상 - 목포의 눈물 (1941) 한국영화 '반도의 봄' 중에서  3:49

3. 조선악극단(김정구, 고복수, 남인수) - 새날이 밝아오네, 돈타령(김정구)(1939) 일본영화 '사려깊은 부인(思ひつき夫人)' 4:38

4. 박시춘, 김시스터즈 -  '즐거운 토요일(1956)'  한국영화 '청춘쌍곡선 (1956)' 중에서  6:47

5. 김희갑 - 고복수의 타향살이(1934) 한국영화 '청춘쌍곡선(1956)' 중에서  9:18

6. 김희갑 - 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1954) 한국영화 '청춘쌍곡선(1956)' 중에서  10:59

7. 김희갑 -현인 신라의 달밤(1947) 한국영화 '청춘쌍곡선(1956)' 중에서  11:53

8. 현인 - 신라의 달밤(1947)  12:48

9. 이난영 - 목포의 눈물 (1969) 15:06

10. 엄토미와 그의 오케스트라 - TBC 동양TV 쇼 (1967)  17:40

11. 김시스터즈 - 애드 셜리번 쇼 (1960) 22:13




일제 시대의 대중 가요


광복의 해인 1945년까지의 대중가요는 당시 신문화의 유입 과정에 따라 급속한 변천을 겪으면서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의 비극으로 단절되거나 사장되어 버려 맥이 끊긴 불구의 형태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분단에 의하여 작곡가 이면상, 김해송, 작사가 박영호, 조명암 등의 작품들은 금지되어 왔으며, 대중 가요계의 원조라 볼 수 있는 당시의 화려한 별들인 가수 김용환, 채규엽, 선우일선, 왕수복, 이은파, 박향림 등의 음성과 노래들은 사장되어 왔었다. 오늘날 들려지고 있는 일제 시대의 노래들은 1936년 이후의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1923년, 강원도 지방에서 26세된 여자를 잡아먹은 호랑이 사건이 신문에 커다랗게 게재되어 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처럼 느껴지는 75년 전인 1925년경에 양약에 의한 대중 가요가 상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대중들의 귓전에는 1936년경 이후의 노래가 대부분 들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 원인은 작가의 월북으로 인하여 금지곡으로 정해진곡들이 많이 생겨 대중 음악의 단절 현상이 나타난데다가, 가수들의 조기 사망, 6.25 전쟁에 의한 수많은 자료의 소실로 주옥같은 대중 음악이 사장되어 버린 데에 있다.


일제 강점기의 세상풍경 <1>, <2>  /  엽서로 보는 일제강점기  /  일제강점기의 미인대회  /  일제강점기 음악가들의 문화주택 

근대 개화기의 신여성 나혜석 <1>, <2>  /  




 ● 유성기의 등장과 가요

 

축음기 광고 1938년 동경 / 콜럼비아레코드 녹음실


대중 가요의 시작은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가 이 땅에 상륙하여 대중화되는 현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1905년, <황성신문>에 유성기 (축음기)를 선전하는 첫 광고에 이어 

1913년, <매일신보>에 대대적인 선전이 시작된다. 

'새 소리판 나왓소 한장에 금 2원, 유성기(축음기)는 20원'이었다. 


축음기판(SP)에는 송만갑, 박춘재 등의 명창과 권번 기생들의 민요와 가기를 담고 있다.

1925년, 기생 김산월과 도월색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취입한 축음기판이 등장한다. 

양악으로서 처음 대면하는 유행가이다. 


<시들은 방초>와 <장한몽가>인데 두 곡 모두 일본의 연극 주제가들이다. 

가야금과 장고 장단에 맞춰 부른 <장한몽가>는 일명 <이수일과 심순애>라고 불려졌으며 

신파극이나 무성영화에 의해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장한몽』의 탄생과 운명]


가야금 장고 반주에 기생 김산월과 도월색이 1925년 처음 음반으로 취입한 일본 노래의 가사를 보면


대동강변 부벽루하야 산보하는

리수일과 심순애 양인이로다

악수론정 하는 것도 오날뿐이요

보보행진 산보하난것도 오날뿐이라

심순애야 심순애야 내년에는

금일금야 이갓치 밝은 달빛을

어대서 저 달빛을 보드라도

흘이거던 심순애야 심순애야


  




장한몽가 1941 (이수일과 심순애) 

고복수.황금심 노래



金色夜叉/금색야차 (장한몽 원곡) 1932
이수일과 심순애 원곡 - 日本浀

가사가 지명과 인명만 다르고 내용은 이 일본곡과 대동소이(거의 번역수준 이라고)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長恨夢)



윤심덕, 사의 찬미(1926)

광막(曠寞)한 광야(曠野)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작곡 : 이바노비치

작사 : 김우진, 윤심덕


희망가 - 채규엽(蔡奎燁)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신자 임학찬 작사로 1910년에 작사되었으며 1830년에 제레미 잉글스가 찬송가로 작곡한 작품을 1921년 박류파, 이채선 명창이 가사 앞구절을 제목으로 따 녹음해서 25년 음반으로 나온것을 그 이후에 여러 제목으로 불리다가 1933년 채규엽이 희망가로 제목을 고쳐 녹음했지만 음원이 존재하지 않고 


이 음원은 1970년대에 가요백년사라는 음반전집에서 명국환이 재편곡된 반주로 녹음 및 취입한 음원 입니다.




희망가 · 황금심






최초 대중가요 논쟁


「윤심덕의 ‘사의 찬미」  근대 개화기의 신여성 윤심덕 <1>  <2>  <3>  /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하루아침에 탕녀로 추락한 성악가, 비극적 최후가 아프다

윤심덕


음악에 있어서 어느 시대, 어떤 장르에서건 최초의 논쟁은 있기 마련이다. 음악은 음반으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때문에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도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최초의 대중가요에 대해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1926년에 발표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가장 많이 언급한다.


이 곡은 윤심덕의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를 담당했으며, 엄밀히 이 곡은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Ivanovici)의 관현악 왈츠인 ‘다뉴브 강의 잔물결(Danube Waltz)’의 선율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라는 점 때문에 최초 논쟁에서 다소 예외일 수 있다. 다만 1920년대 발표된 음악 가운데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라는 이유가 크기에 최초의 논쟁 안에 여전히 놓이고 있다. [출처: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희망가」  유행가시대 (1) 이 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 채규엽의 <희망가>


「희망가」는 작사 작곡 미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레코드취입 가수 채규엽(蔡奎燁)이 1925년 불러 히트한 곡이다. 국내 최초 레코드취입 가수가 불렀다는 점과 일제 강점기 때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불렀던 외국 곡을 번안해 탄생된 노래라는 점도 특이하다. 


채규엽은 국내 직업 가수 1호이자 최초의 포크 가수로 「봄노래」 「방랑자의 노래」 등을 불러 인기가 높았다. 일본 최고 인기작곡가 고가마사오(古賀政男)의 히트곡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淚溜息)」를 번안한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한국말로 취입, 대단한 인기를 끈 장본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음악계 최고의 가수로 꼽혔다. 잡지사(삼천리)의 인기가수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다. ‘어른이 부른 동요’라 할 수 있는 「외양간 송아지」를 취입, 국내에 처음 포크음악을 선보인 가수이기도 했다. 


「희망가」는 사실 외국의 번안곡으로 노랫말이 한국인 정서에 맞게 바뀌어 불렸다. 흐름이 대체로 부드럽고 멜로디가 쉬워 1919년 3·1만세운동 물결이 지나간 뒤인 1923년 무렵부터 대중 속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민족염원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대중들 마음은 좌절과 허탈감에 빠졌다.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운 일본의 통치방식이 다소 누그러져 조선사회가 활기를 띄는 듯 했지만 민중들 일상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애조 띤 노래(창가)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 노래를 ‘희망가’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억압에 시달린 민초들의 바람이 「희망가」란 노래를 낳은 셈이다. 아쉽게도 「희망가>의 바탕이 된 외국 곡의 번안자와 편곡자마저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토마스 가들의 「夢の外」가 원곡으로 가요계에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대중가요로는 1925년 발매된 ‘조선 소리판’에 실린 노래들, 도월색의 「시들은 방초」, 김산월의 「장한몽」과 1926년 윤심덕이 불러 히트시킨 「사의 찬미」 등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희망가」가 이보다 훨씬 이전에 나왔다. 1922년에 나온 노래집엔 「청년경계가」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어 전국적 유행에 힘입어 일축(일본축음기상회)에서 음반으로도 발매됐다. 음반이 처음 나왔을 땐 다시 제목이 바뀌어 「이 풍진 세월」로 나왔다. 명확하진 않으나 1925년 이전에 나온 노래가 틀림없고 음반으로 취입된 우리나라 유행가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기록된다. 문화재청의 대중가요 1호 찾기 목록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출처: 다시 부르는 희망가]




 ● 가수 부재의 시대 


1921년 <조선일보> 광고에는 연극 연구 여자를 모집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3개월 양성 기간으로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서양 문물에 의한 신문화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대에 우리네의 생활양식에서는 여염집 여인이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기생들도 무대를 경원시 하는 시절이었으니까.


1920년경부터 복혜숙이 신극 단체 '토월회'에 등장하였으며, 신파극단에서는 여배우 이애리수, 이경설, 김연실, 윤백단, 김선초 전옥이 인기를 끌었다.


'일본 축음기 조선 소리판' 이란 라벨로 축음기판이 선전되면서 1927년에는 빅터 레코드사와 콜럼비아사가 서울에 대리점을 개설하고 개업준비를 했다.


1929년 4월 콜럼비아사에서 한국 최초의 창작대중가요가 나왔다. <낙화유수>라는 노래로서 첫소절을 따서 <강남달>로도 불려지고 있다. 1942년 5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된 남인수의 '낙화유수'는 이정숙의 '강남달'과 전혀 다른 곡이다. (비교들 해 보시길...)


이정숙과 김영환
당시의 변사로 이름 날리던 김영환이 진주에서 기생으로 살아온 어머니의 얘기를 영화대본으로 해서 제작된 영화 '낙화유수'가 많은 호응을 받아 "강남 달" 이라고도 불리는 주제곡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콜럼비아 레코드사는 1929년, 이 주제곡을 음반으로 만들어 인기리에 판매 해 최초의 영화 주제곡으로 발매된 가요 음반이 되었다.

1927년 상영된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이정숙의 낙화유수는 1929년 4월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는데 이 후 노래의 첫 소절의 가사를 따서 '강남달'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리웠다. 


이정숙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연유는 직업가수가 없던 시절인지라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오빠 생각>, <뜸북새>등 동요를 취입한 최초의 동요 가수인 이정숙이 이 가요를 취입한 것이다. 그 때까지도 일반인에게는 유행가와 동요를 구분하는 의식이 없었고, 양악류의 음악은 통칭 창가로 인식하였었다.


<낙화유수(落花流水)>는 1927년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인기를 끈 무성 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이다. 초창기 여배우인 복혜숙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노래는 무성 영화 변사로 인기를 누리던 김영환이 작곡하였다. 김영환은 이 영화 감독까지 하였었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 트로트의 원조라고 이야기 되어진다. 1927년 발표되었고 1929년 음반으로 나왔다.

이 이전에는 유성기의 등장과 함께 번안가요들이 주로 불리워 지다 최초로 창작가요인 '낙화유수'가 발표된 것이다.

<황성 옛터(황성의 적)>가 먼저 나온 노래라고 전해지고도 있지만 음반으로는 1932년 3월에 첫 발표되었다.



 ● 무대 배우의 가수 

 

이애리수

1930년에 접어들자 음반계의 시선은 연극무대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 미모의 이애리수와 김연실, 강석연, 이경설, 윤백단, 전옥 등 여배우가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민족의 연인이었던 막간가수, 이애리수)


여배우 복혜숙은 콜럼비아레코드에 종로행진곡 등 몇곡을 불렀으나 노래솜씨가 신통치 않아 그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취성좌의 배우에서 토월회에서 활동을 한 강석연은 1931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세동무' '방랑가' '오동나무'를 불러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애리수는 빅터 레코드에서 1930년에 '방랑가' '오동나무'를 부르면서 1932년 빅터 레코드에서 '황성옛터'를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취성좌 배우인 전옥은 1933년 포리돌 레코드에서 째즈 멜로디를 시작으로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물길천리' '수부의 아내'등으로 배우로서 인기를 굳히는데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3년 연극 '항구의 일야'(주제가: 노래 김용환)는 1950년대 극장에서 연극으로 흥행을 많이 하였다.


윤백단은 1933년 OK 레코드에서 '횃불을 높혀라' 등을 불렀었는데 배우가수 중 연장자로서 선배 배우인 셈이다. 이외에 1930년에 빅터 레코드에서 '세동무'를 부른 김연실 1933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강남을 가자'를 부른 김선초도 초기의 유명한 배우 가수였다.


당시에 제일 많이 부른 노래는 '방랑가' '오동나무' '세동무' '강남달' '황성옛터'가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배우가수중 남자로는 강홍식이 유일하게 유명한 가수이다.

1934년 강홍식의 노래처녀총각이 거리의 축음기가게를 한창 바쁘게 만들었었다.


(가수 강홍식의 아내는 전옥. 2녀1남을 두었고 전옥은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칭의 영화배우. 전옥의 아이들 중 강효실도 배우. 강효실은 최무룡과 결혼. 강효실은 배우 최민수의 친모. 강홍식은 북한으로가 영화감독으로 활약하면서 북한 영화의 기초를 닦았다네요.)


지금도 간혹 들리고 있는 이 노래는 북한방송에서도 불려지고 있다.




황성옛터 1932 이애리수




부활 1931 이애리수



강남제비 1930 이애리수



처녀총각 1934 강홍식

봄이왔네 봄이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가네




전옥 항구의 일야( 一夜) 1957 - 37分

1950년대 극장에서 연극으로 흥행




강석연 1931 방랑가




낙화유수 1929 (이정숙, 남인수, 김용임)

첫소절을 따서 <강남달>이라고도 함.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곳

구름속에 님의 얼굴 가리워졌네

오늘밤도 길손 오래 외로히 서서

물에 뜬 이한밤을 홀로 새울가


머나먼 님의 나라 참아 그리워 

적막한 가람가에 물새가 우네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아래 재워나 주오


강남에 달이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의 닙사귀에 버레가 우네 

차라리 이몸이 잠들니로다 

님이 절로 오시여서 깨울때까지



1942년 5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된 남인수의 '낙화유수'는 이정숙의 '강남달'과 전혀 다른 곡입니다. 1927년 상영된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이정숙의 낙화유수는 1929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는데 이 후 노래의 첫 소절의 가사를 따서 '강남달'이라는 제목으로 불리우게 되지요.






         눈물의 여왕 - 전옥    




 ● 직업 가수의 등장 


채규엽 등 1930년대 국내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일본 도쿄공연 포스터
 1936년 월간 종합잡지
'조광'에 실린 채규엽 음반 광고


1930년 3월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나온 축음기판에 채규엽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눈에 띈다. 

<봄노래 부르자>를 시작으로 한국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이 탄생하게 된다.


채규엽(蔡奎燁)은 1933년 일본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도 일본 노래를 취입했으며, 1930년대 말에는 태평 레코드사에서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948년경 고향인 함경도로 간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채규엽과 같이 일본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한 가요 관계 인물로서는 북한 음악가 동맹 위원장을 역임하다 1990년에 사망한 이면상이 있었으며, 빅터 레코드사와 콜럼비아 레코드사 전속 가수였던 <진주라 천리길>을 부른 월북 가수 이규남이 있다.


채규엽(蔡奎燁)

채규엽은 1906년 함흥 출생으로 원산중학을 다녔는데, 재학시절 독일인 교사에게 음악을 배웠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고 1년 뒤에 돌아와 귀국 독창회를 열었다. 이때 채규엽은 바리톤으로 무대에 섰다. 그로부터 본격적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여 극단 토월회와 취성좌의 공연에서 막간가수로 출연하기도 했다. 강한 억양의 함경도 사투리에 완강한 이미지로 느껴지는 용모. 신장은 비교적 작은 편이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음악학교 교사의 경력을 가졌으며, 가창력 또한 뛰어나 많은 사람에게 찬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채규엽에게는 무엇보다도 흥행사로서의 남다른 자질이 있은 듯하였습니다. 


채규엽은 '봄노래 부르자' '서울노래' '눈물의 부두' '북국 오천키로' 등의 대표곡을 비롯해 80여곡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작사가가 노랫말을 쓴 '서울노래'(조명암 작사, 안일파 작곡)는 지금 읽어도 유구한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과 번민이 잔잔하게 깔려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채규엽 -봄노래 부르자 1930년


당시 조선 민중들은 식민 치하에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괴롭고 숨 막히는 심정을 가슴 속에 안은 채 대책 없이 살아가고 있는 중,  채규엽이 불렀던 '봄 노래 부르자'는 빼앗긴 강산에 봄이 오는 것을 꿈에 가만히 그려보는 설렘과 아련함을 담고 있으며,인기가 워낙 높아가자 이 곡은 곧 수상한 곡으로 낙인 찍혔고 발매 금지가 되었습니다. 




유랑인의 노래 1930 채규엽



채규엽 -낙화
영상출연 가수김수진



만주(滿州)의 달 1937 채규엽




명사십리(明沙十里) 1937 채규엽




소리사랑/이규남 - 진주라 천리길 (1941)

해방후 월북한 작사가,작곡가들의 작품들이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80년대 후반 해금되면서 MBC 주부가요 열창 우승자 출신들이 결성한 여성중창단 《소리사랑》이 1993년에 리메이크 한 곡입니다. 원곡의 편곡을 훼손하지 않은..최대한의 사실적인 창법이 돋보이네요. 

소리사랑의 리메이크곡에 이어 이규남의 원창이 이어집니다.




소리사랑 3집 - 명가요 선집 

『해금가요 편』 (1993)




 ● 권번 기생 가수 


난을 치는 기생들


마약중독으로 초라한
죽음을 맞은 이화자

1930년 초반, 여배우들의 가수 활동과 함께 권번 기생들의 활약도 가요의 흐름에 한줄기 영향을 주었다. 

권번에 소속된 기생은 예의 범절, 서화, 시조, 창, 가야금, 유행가, 일본 노래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다.


1941년까지도 평양에는 기생 학교가 있었다. 기생에 적을 두고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끈 인물로는 선우일선, 왕수복이 특히 유명하였다. 그들이 노래를 취입하기 위해 평양에서 서울에 올 때는 레코드 회사 간부들은 인력거를 서울역에 대기시켜 놓고 칙사 대접을 하였다. 일본에 있는 녹음실에서 취입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우일선과 왕수복(王壽福)은 6.25 전쟁 이후에도 평양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노래는 거의 신민요 노래들이고 1934년에 나온 이면상 작곡인 <꽃을 잡고>는 선우일선을 스타덤에 올려놓는 계기가 된다. 왕수복의 인기곡은 전기현 곡으로 1933년에 나온 <고도의 정한>이다.


1940년대 대중 가요계를 주름잡은 이화자(李花子1916-1950)는 권번 소속 기생이 아니고 

일반 유흥가 술집 출신으로 천부적인 자질과 풍부한 호소력을 가진 1936년에 등장한 가수이다. 


1940년 초에 널리 퍼진 이화자의 <목단강 편지>는 1950년 후반에 엉뚱하게 <처녀 뱃사공>이라는 노래에서 가사는 바뀌었으나 멜로디의 많은 부분이 표절되어졌다.


이화자는 세상에 불만이 많으신 분이였던것 같아요. 마약에 빠져서 중독되었고 이혼후에 남성편력도 심해서 주변의 빈축을사기도 했으며 나이 30대에 벌써 얼굴이 70대로 보였다고 하며 1950년에 어느 골방에서 고독사 하셨다고 합니다. 사연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참고로 이미자씨가 인기가수로 발돋움 할때 이화자 후에 최고의 가수라고 기사에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유튜브 댓글에서)


孤島의 情恨은 1933년 10월에 포리돌레코드에서 발표한 최초의 권번출신 가수 王壽福 대표곡 입니다.

그 시절 그 인기를 가늠 해보기 위해 민족잡지 삼천리지가 1935년에 발표한 인기투표 결과를 보면 1935년 1월부터 10월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10,130명이  응답, 남녀 가수별로 발표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부문: 왕수복 1,903 /선우일선 1,166 / 이난영 873 / 전 옥 377 / 김복희 348)

해방되던 해에 김광진과 결혼한 왕수복은 두 분의 고향이기도 한 평양으로돌아가고, 곧이어 남북의 왕래가 막히면서 방송에서 날마다 흘러나오던 님의 노래는 오랫동안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新긴아리랑(신민요) 1940 이화자




꽃바람 분홍비 1941 이화자




어머님 전 상백 1939 이화자




목단강 편지1941 이화자




이화자 걸작집 上

어머님전상백, 화류춘몽, 마지막 글월



이화자 노래모음 화류애정 외 9곡

1. 화류 애정(花柳哀情) 1940년

2. 허송 세월(虛送歲月) 1940년

3. 월명사창  1940년

4. 추풍낙엽(秋風落葉) 1940년

5. 마음의 화물차 1940년

6. 눈물의 노리개 1940년

7. 관서신부 1940년

8. 가거라 초립동 1941년

9. 목단강 편지 1938년

10. 결사대의 안해 1943년




花柳春夢 (화류춘몽) 1940 이화자

조명암작사 김해송작곡. 오케레코드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드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 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롬이 원수다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었으며

나 젊은 사람한테 사랑도 했드란다

밤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 실어

손수건 적신 연이 몇 번인고

이름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빛나는 금강석을 탐내도 보았으며

겁나는 세력 앞에 아양도 떨었단다

호강도 시들하고 사랑도 시들해진

한 떨기 짓밟히운 낙화 신세

마음마저 썩는 것이 기생의 도리냐




선우일선-꽃을 잡고 1934


하늘하늘 봄바람이 꽃이 피면

다시 못 잊을 지낸 그 옛날.


지낸 세월 구름이라 잊자 건만

잊을 길 없는 설운 이내 맘.


꽃을 따며 놀던 것이 어제련만

님은 가고 나만 외로이.




선우일선- 망향의 가을밤

영상출연 가수 박채영



왕수복-고도의 정한(孤島의 情恨) 1933

영상출연 가수 김수진





송가인 화류춘몽 花柳春夢 2020





기생(妓生), 남자들의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왔던 여인들


현매홍, 김옥엽 오산월 김영월 윤채선 이옥란 장연홍 장연홍


기생(妓生, a gisaeng 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호칭이다. 지난날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예기(藝妓)'와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출전을 찾을 수 있다. '기생'의 '생'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학생'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또한 성씨 뒤에 붙어 '젊은이' 또는 '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예컨대 교생, 서생, 선생, 학생, 이생, 허생 등과 같은 경우이다.


1939년 일본 잡지 『모던일본』 조선판의 표지
조선의 기생으로 식민지 조선의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하는 일본인의 시선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교방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시·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8, 9살이 된 기생은 동기(童妓)라 하는데, 교방에서는 12세부터 교육을 시켰다.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노래를 잘 하는 기생은 성기(聲妓) 또는 가기(歌妓)라 불렀다. 또한 악기를 잘 다루는 기생은 현기(弦妓) 또는 예기라 하였다.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미기(美妓), 가기(佳妓), 염기(艶妓) 등으로 불렀다. 특히 사랑하는 기생은 애기(愛妓), 귀엽게 여기어 돌보아 주는 기생은 압기(狎妓)라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기생은 장기(壯妓)라 했고,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은 의기(義妓)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기생의 우두머리는 행수기생으로 도기(都妓)다.


어두운 호칭으로 노래와 춤과 몸을 파는 기생인 창기(娼妓), 천한 기생이라는 천기(賤妓), 퇴물기생이라는 뜻의 퇴기(退妓)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는 기부(妓夫), 즉 기생서방으로 종8품 벼슬인 액례·별감·승정원 사령·의금부 나장·포교·궁가·외척의 겸인 청지기·무사 등이 등장하여 후대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대원군 시절에는 금부나장과 정원사령은 오직 창녀의 서방이 되는 것으로 허락하였을 뿐 관기의 서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기생서방에게 돈을 주고 그 몸을 속량(贖良)해야 한다. 이는 그동안 먹여 살린 비용을 갚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였다.


조선시대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은 서울·평양·성천·해주·강계·함흥·진주·전주·경주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이 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이어갔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일반인도 요릿집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으며,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 당시 기생에 대해서는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함께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상은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출처] zixa


일제강점기 기생이야기 (1. 연예인 노동조합 "권번"), (2. 얼짱스타 "기생 장연홍"), (3. 조선을 빛낸 7대 기생)(4. 히트상품 기생 사진엽서), (5. 강명화 자살사건), (6. 조선의 마타하리 "요화 배정자")조선의 명기 -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 



기생(妓生) 장연홍(張連紅)의 수영복을 입은 모습
1911년 ~ 1914년 생으로 추측되는 조선 최고 미인의 화초기생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기생은 크게 화초기생과 예능 기생이 있었는데, 모두 시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문사와 어울려 시를 주고받고 음악과 춤을 즐기던 풍류의 동반자였습니다. 이러한 조선 기생을 범할려면 집안에 정식으로 들여 부인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줘야 가능했으며, 기생으로 화동한 여인도 모두 정조 관념이 뛰어나 한 사람에게만 정조를 바치는 지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 사진의 여인 장연화도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이 몰락하여 과거 1930년대 평양에서 활동한 기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뭇 남자들의 주파로 정조를 지키기 어려운 고민을 인근 지인에게 털어 놓았다는 문헌이 있으나 말년의 행적이 불분명한 인물입니다. 아마도 저런 사진은 일본인에 의해 관광잡지나 홍보용 사진을 활용코자 찍었을 것입니다. 아름답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쓰라린 역사가 있는 사진입니다. [출처: 오똑이의 삶과 여정]




 ● 봄철을 맞은 가요계 


1933년은 음반 회사가 이 땅에 기업적인 토대를 닦은 시기이다.


음반 회사로는 콜럼비아사, 빅터 레코드사, 포리돌 레코드사, 시에튼 레코드사가 음반 생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회사들이다. 

빅터, 포리돌, OK 레코드사에서 대중 가요가 많이 나왔지만, 빅터와 포리돌 레코드사의 노래들은 대부분 자료가 사장되고 작가나 가수들 또한 일찍 사망하여 OK 레코드사에서 나온 노래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 레코드사에서 당시의 자료들을 발굴하여 복각함으로써 일반인에게 소멸된 노래들을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1933년 OK 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은 이난영이란 소녀 가수를 발굴하게 된다. 여배우도 아니고 권번 기생도 아닌 순수한 가수의 등장인 셈이다. 일본을 순회 공연중인 '태양 극단'에서 노래하는 16세 소녀를 빼내 왔는데, 그 소녀가 바로 이난영이다.


1933년 가을 <불사조>, <밤고개를 넘어서>의 두 곡을 부르면서부터 꾸준히 인기를 얻어 온 이난영은 1935년 여름,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로 일약 유명한 가수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는 OK레코드사에서 향토 찬가 가사 모집을 하였는데 목포의 문일석이라는 청년이 투고하여 당선된 작품으로 손목인의 곡이다. [특집다큐] 다시 보는 난영 (2009)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저고리시스터(1935)' 멤버들. 

왼쪽부터 홍청자, 왕숙랑, 박향림, 이난영, 서봉희,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가운데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부른 주인공입니다. 



한편 포리돌 레코드사에는 극작가 왕평과 가수 겸 작곡가 김용환이 토속적인 신민요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김용환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의 형인데, 작사, 작곡 등 만능 재주꾼으로 매우 다재 다능한 인물이었다. 

1935년 김용환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부른 <젊은이의 봄>, 1937년에 나온<구십리 고개>등은 우리의 토속성을 너무나 잘 표현한 노래들로 축음기로나 들어볼 뿐 일반 시중에서는 들어볼 수가 없다. 김용환은 광복 후 3년만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가요의 대중화 시대 축음기의 전국적인 보급과 창가에서 한걸음 발전된 노래들이 SP판에 의하여 대중의 귀에 익어지면서 이난영, 고복수 등의 신진 가수들이 등장하자 1936년 이후에는 외면당하던 가요계에도 가수 지망생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다.


1936년 당시 인기 판도는 채규엽, 강홍식, 선우일선, 김용환, 최남용, 노벽화, 이은파, 고복수, 이난영 등의 가수가 스타 선상에 군림하였다("조광" 1935년 2권 1호, "사해공론" 1936년 3월호)


남인수

1936년 OK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된 경남 진주 출생의 청년 남인수는 1937년 12월에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인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서 일약 대스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미성의 가수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이후 전국을 휩쓰는 가요계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1950년대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으로 한 시대를 장식한 남인수는 1962년에 인생의 막을 내리는데, 그의 장례는 연예인 협회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신문 사회면에는 조계사에서 홍제동 고개까지 장관을 이룬 인파 행렬을 일제히 보도하였다. 가수 남인수의 등장에서부터 가수를 열망하는 붐이 일어나고 축음기판의 목록도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 


판소리 잡가 등은 거의 밀려나고 유행가 음반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1936년 이후부터 1940년 초까지 계속된다.


1937년부터 1940년은 소질과 재능을 가진 남녀 가수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노래, 다양한 성격의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요의 황금 시대에 속한다.




목포의 눈물 1935 이난영 

오케레코드
SP원곡으로 취입당시 부른 노래



이난영-목포의눈물 (추모음악)

1961년 고복수 은퇴공연時 노래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비극으로 끝난 김해송, 이난영의 이야기




김용환-젊은이의 봄 1935




김해송노래모음 [실버타운 편집]



유성기(留聲機)로 듣던 

불멸(不滅)의 명가수(名歌手)


밀월의 코스 / 김해송 00:00

봄사건 / 김해송,박향림 03:10

산간처녀 / 김용환 05:46

세기말의 노래 / 이경설 08:44

오빠는 풍각쟁이 / 박향림 11:52

전화일기 / 김해송,박향림 14:41

청춘계급 / 김해송 17:47

풍차 도는 고향 / 김해송 20:58




유성기로 듣던 흘러간 옛노래




해방전 가요모음


이난영 - 선창에 울러왔다(년대미상)

이난영 - 해조곡(1940년)

이애리수 - 황성옛터(1928년)

이인권 - 꿈꾸는 백마강(1942년)

이해연 - 뗏목 이천리(1942년)



흘러간 옛 노래 (1960 제작)

고복수.황금심-풍년가

남인수-황성옛터

황금심-알뜰한 당신

고복수-타향살이

이난영-목포의 눈물

진방남-마상일기

백난아-아리랑 낭낭

현인-신라의 달밤




[유성기로 듣던] 흘러간 옛노래 모음




애수의소야곡 - 남인수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애수의 소야곡 - 송가인




대표적인 가수와 노래를 살펴본다.



당시의 대표적인 음반레이블



일제시대 대표곡 ( 표시를 누르면 대표곡을 재생하는 사이트로 이동합니다. )


박향림, 이난영

<오케(OKEH)레코드사>

<타향>(고복수),

<눈물젖은두만강>(김정구),

<해조곡>(이난영),

<꼴망태 목동>(이화자),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꿈꾸는 백마강>(이인권),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선창>(고운몽).

<연락선은 떠난다>(김해송


<빅터 레코드사>

<황성의 적>(이애리수),

<알뜰한 당신>(황금심),

<아이고나 요맹꽁(맹꽁이타령)>(박단마),

<눈물의 손수건>(조영은),

<아리랑 술집>(김봉명)


<콜럼비아 레코드사>

<봄노래부르자>(채규엽),

<찻집 아가씨>(박향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남일연),

<홍도야 울지 마라>(김영춘),

<울리는 백일홍>(계수남).


<포리돌 레코드사>

<구십리 고개>(김용환),

<꽃을 잡고>(선우일선),

<항구의 일야>(김용환).

<고도의 정한>(왕수복).


<태평 레코드사>

<청춘 극장>(빅정림),

<눈물의 경부선>(울금향).

<나그네 설움>(백년설),

<불효자는 웁니다.>(진방남),

<찔레꽃>(백난아) 등이다.



<오케악극단의 모습>

1.남인수 2.고복수 3.이화자 4.이난영 5.김해송 6.김정구 7.이철 8.손목인 9.이은파 10.장세정 11.김용호

 



 ● 암흑기의 가요 


백년설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한반도에도 전시 비상 체제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대중 가요에도 정책적인 전쟁의 입김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는데, 

백년설이 노래한 <복지 만리>가 그 예이다.


( ▶  곡 듣기 )


달실은 마차다

해실은 마차다

청태콩 벌판 우에

휘파람을 불며불며

저 언덕을 넘어 가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기층 대륙길에

빨리 가자 방울 소리 울리며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인 이 노래는 1941년 3월에 상연된 전창근 감독의 영화<복지 만리>의 주제가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서 만주 지역으로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적인 영화였다.


1942년 인기 절정의 백년설은 경성 방송국에 나가서 <아들의 혈서>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일본의 침략 전쟁에 몰아넣기 위해 가요의 교묘한 이용 방법인 것이다.


어머님 전에 이 글월을 쓰옵나니

병정이 되온 것도 어머님 은혜

나라에 밧친 목숨 환고향 하올 적엔

쏘다지는 적탄 아래 죽어서 가오리다


<아들의 혈서>(조명암 작사/박시춘 작곡)



박향림

식량 배급이라는 통제된 생활 속에서도 부분적이나마 1942년까지는 대중 가요의 맥은 이어져 나왔다.


1943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학교와 거리에는 일본 군가가 흘러 넘치고, 
OK레코드사에서 가수 백년설과 남인수, 박향림이 <혈서 지원>이란 노래를 합창하는 단원에서

대중 가요는 어둠 속으로 묻혀져 버리고 그 막을 내리고 만다.


( ▶  곡 듣기 )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 만세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되기 소원입니다.


<혈서 지원>(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 광복 이후 새출발의 우리 가요계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라디오에서 울려 나오는 일본 천황의 목소리는 무조건 항복이었다. 

작가, 가수 등 가요계 인물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국 각지, 광산 등에 위문대로 끌려 다니다가 하나 둘씩 모이게 되었다.


1947년, 고려 레코드사가 광복이후 음반 생산의 첫 선을 보였다. 

지금까지 음반 생산은 모두 일본에서 하였기 때문에, 처음 해 보는 작업이라서 사실 내용은 보잘 것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숯불에 구운 축음기판은 고작 하루에 열장 정도였다. 그것도 낡은 축음기판을 재생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에 럭키 레코드사, 서울 레코드사(1949년 첫 음반발매) 등이 탄생하지만 

모두가 원시적인 수공업 형태로 축음기판을 생산하는 실정이었다.


감격과 희열의 시대에 나온 노래를 보면,


남인수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박시춘 작곡)

현 인 <신라의 달밤>(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비노래는 고모령>,

이인권 <귀국선>

박재홍 <울고 넘는 박달재>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 등이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1949년 6월, 김구 선생이 피격되던 서재에서는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을 실은 이 노래는 6.25 전쟁직전까지 민족의 환희를 가장 잘 표현한 노래일 것이다.


194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 영화가 탄생하였다. <푸른 언덕>이란 영화로 현인과 김백희가 주제가를 불렀다. 

그러나 당시의 음반 제작 시절의 영세성으로 가요계의 활동은 극장 무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체적인 악극단의 인물을 살펴보면,


'태평양 가극단'의 김용환, 김정구, 구봉서,

'백조 가극단'의 전옥, 고복수, 황금심,

'대도 악극단'의 장동휘, 왕숙람, 황정자,

'남대문 악극단'의 반야월,

'다이아몬드 악극단'의 백년설,

'MC 악극단'의 손목인,

'은방울 쇼'의 박시춘 등이다.




백년설노래모음




[오아시스레코드] 남인수

(오리지날 힛송 총결산집)






악극단, 가극단의 단체가 수십개나 되어 전국 극장 무대에서 연극 쇼와 함께 가요 활동이 왕성하였다.

광복 이후 새로 등장한 가수로는


<임 계신 전선>을 부른 금사향,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른 송민도,

<한강>의 심연옥,

<빈대떡 신사>의 한복남,


그 외 백설희, 박재홍, 현인 원방현, 황정자 등이며 

1950년 직전까지의 3년의 가요 상황은 극장 무대가 가요의 전달 주무대였었다.






이난영이 자기의 두딸과 조카로 김시스터를 만들었고 (1953년) 최초로 미국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발표한 곡 중 '찰리브라운'이라는 락앤롤이 빌보드 7위에 링크되었다는 국내보도가 있었으나 

실제 빌보드 기록에서는 확인이 안된다고 하네요.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미국을 열광시킨 원조 걸그룹! / kbc광주방송 지식통조림




[출처: 해방이전 한국 가요사 개관 - 이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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