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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세계의 신석기[新石器]문화


빗살무늬 토기(서울 암사동)



신석기는 새로운 석기, 즉 뗀석기(打製石器)와 구별하여 간석기(磨製石器)[각주:1]를 지칭한 것이며 이는 러복(J. Lubbock)에 의해 구별되기 시작했다. 간석기는 대개 토기를 동반했기 때문에 양자를 묶어서 이들이 사용된 시기를 신석기시대, 그리고 이 시기에 이루어진 문화를 신석기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점차로 사람들은 도구 자체에 의한 시기 구분으로부터 왜 이러한 도구들이 출현하게 되었는가로 주의를 돌리게 되었으며, 결과로서 주목한 것이 농경과 가축사육이었다. 사냥·채집에 비해 농경과 가축사육이 유리함은 당시로서 자명하였으며 간석기는 농사에 필요한 연장으로서, 토기는 낟알 보관용기로서 출현하였으니 농경과 가축사육이 더 포괄적이며 문화적인 특징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더구나 ‘간석기’라는 것만 놓고 볼 때, 이미 구석기시대에 드물게나마 나타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또 생계유형을 사냥·채집단계에서 식량생산단계로 바꾸면서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생존의 기회가 주어졌을 터이고, 인구가 늘어나면 그 때문에 궁극적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조직도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구석기·신석기의 분류체계나 용어로는 이러한 현상을 다 반영하지 못한다. 결국 오늘날의 ‘신석기문화(新石器文化)’라는 말의 의미는 사냥·채집으로부터 식량생산, 즉 농경과 가축사육으로 생계경제가 전환되어 간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구미에서는 ‘신석기’ 라는 용어 대신 ‘농경의 시작’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사냥·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이행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므로 이것을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농경의 기원을 추구하는 작업들이 많아지다 보니 기후가설(건조설), 핵지구가설, 주변지구가설(인구압가설) 등 몇몇 가설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 작업들이 중요했던 것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환경의 변화 및 동식물의 생태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고 농경의 실상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점인데, 1950년대 이후 많은 증거들이 쌓여가자 농경으로의 이행과정이 점진적인 것으로서 ‘혁명’이 아니라 ‘진화’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또다시, 농경이란 결국 급작스러운 과정이었다고 여기게 되었다. 왜냐하면 농경의 기원지로 첫손을 꼽히는 중동지방에서 보더라도, 야생의 에인콘(einkorn) 등 낟알을 가공하거나 수확하는 도구들이 많이 나오며 저장시설 및 조리시설 등이 급격하게 증가하던 나투피안(Natufian) 문화에 해당하는 여러 유적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가축사육 및 농경의 증거를 발견하기 어려운데 비해, B.C. 7000년 무렵이 되면 집짐승, 재배된 밀과 보리, 이에 따른 농경촌락 등의 출현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의 200만년 동안 이루어져온 사냥·채집양식에 비해 놀라운 변혁이었던 것이다. 즉 문화진화는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되 만 년 전후의 진보의 템포는 꽤 급작스러웠음을 고려하게 되었다.


*. 간석기(磨製石器) :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사용된 돌을 갈아서 만든 석기. 도끼, 끌, 낫, 칼, 화살촉 등의 공구와 무기가 대표적이다.



중동 신석기문화(中東 新石器文化) :


중동지역의 신석기문화 발전상은 약 10000년 전에 상당한 규모의 주거지군 출현으로부터 가축사육과 곡물 재배의 출현→토기의 사용→마을과 도시의 발전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일단 농경의 단계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는 또다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어 갔다. 와디 알 나투프(Wadi-al-Natuf), 나할 오렌(Nahal Oren), 아인 말라하(Ain Mallaha) 및 제리코(Jericho) 등에서 먼저 오랜 기간의 정주 촌락을 경험한 이들은 농경보다는 가축사육을 먼저 시도하는데, 자위 헤미 샤니다르(Zawi Chemi Shanidar), 간즈 다레(Ganz Dareh) 저지대, 카림 샤히르(Karim Shahir) 등에서 B.C. 9000년기 이전에 양과 염소 기르기를 시작한다. 많은 양과 염소를 기르던 챠이외뉘 테페시(Cayonu Tepesi)에서는 약 25~50여 채의 발달한 촌락 건물에 대부분 사육우리를 갖고 있었다.


B.C. 8000년 무렵 중동지방에서는 토기가 만들어지기 전의 신석기문화가 시작된다. 이를 보통 ‘선토기신석기’라고 하며 PPNA(Pre Pottery Neoloithic A)와 PPNB(Pre Pottery Neoloithic B)로 구별하나 최근에는 PPNC까지 세분되고 있다. 선토기신석기는 B.C. 8000년으로부터 B.C. 6000년 무렵까지 계속된다. 유명한 PPNB 유적으로는 아부 후레이라(Abu Hureira), 차이외뉘, 최탈 휘윅(Catal Huyuk), 제리코(jericho), 문하타(Munhatta), 베이다(Veida) 등이 있다. 이때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주요 재배식물에는 밀, 보리, 콩류 등이 있고, 사육짐승으로는 개, 양, 염소, 돼지, 소 등이 있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의 교역도 활발해지는데 대표적인 대상이 흑요석이다. PPNB 시기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대 취락의 출현이다. 차이외뉘 유적 등에서는 이 거대취락의 발전과정을 5단계로 나누었는데, 이곳은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인 온갖 인간행위가 이루어졌던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점유기간의 후기에 가면 밀과 콩과식물을 기르며 흑요석과 플린트로 만든 긁개와 찌르개 종류, 돌도끼, 공이 등의 석기와, 뼈로 만든 송곳, 치레걸이, 자 등 다양한 도구가 나온다. 굽지 않고 햇볕에 말린 찰흙은 여러 용도로 쓰였으며 특히 구리로 만든 치레걸이(裝身具)[각주:2]도 나오고 있다. B.C. 7000년경이면 레반트와 쟈그로스 산맥 모두에서 밀, 보리, 콩류재배 및 개, 양, 염소, 돼지, 소 등의 사육에 대한 증거가 보인다. 농경의 도구로서 작은 간도끼가 항상 동반된다.


본격적으로 토기가 만들어질 무렵에는 중동의 아나톨리아, 레반트, 자그로스 산맥 주변의 전역에 걸쳐 인간의 거주 흔적이 나타난다. 가장 유명한 유적 가운데 하나가 쟈모(Jarmo)이며, 남부 레반트에 있어 가장 이른 토기신석기문화를 ‘야무키안(Yarmukian)’이라고 한다. 토기신석기는 이전의 PPNB에 비해 크기와 사회경제면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B.C. 6000년 무렵 토기신석기 사회는 채집·사냥행위가 크게 줄어든 반면 농경에 기초한 조그만 자치적 마을로 바뀌어간 것이다. 식물재배는 주로 곡물이었지만 야채와 아마도 길렀다. 토기를 만들고 굽는 동안에 열을 이용하는 기술을 습득하여 마침내 용광로-야금술이 필요한 동석기(Chalcolithic)시대로 나아가는 계기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란 동북부와 러시아의 투르크멘 지역의 농경에 대해서도 최근에 와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중동지역 보다 약간 늦게 발달한 제이툰(Jeitun)문화가 있다. 여기서는 두줄박이 보리재배와 염소, 양 등의 사육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으며 시기는 대략 B.C. 6000년기로 편년되고 있다.



유럽-아프리카 지역 신석기문화(Europe-Africa 地域 新石器文化) :


타우루스-쟈그로스 산맥 지역의 비옥한 초승달지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농경, 가축사육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터키를 거쳐 동부 지중해 지역의 여러 섬 및 유럽 동남부와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이란 고원의 산과 사막 때문에 제한되었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리비아 사막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농경이 가장 급속히 퍼져나간 곳은 유럽 쪽이었다.


중부 유럽의 비옥한 뢰스(lo¨ess) 토양이 뒷받침되어 발칸지역에서는 B.C. 6000년기에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서부 지중해 해안지역으로 토기 만들기와 양 기르기가 퍼져나갔고, 이에 따라 중부 혹은 북부 유럽의 신석기문화의 발전양상은 중동지방과 유사하게, 그러나 시차를 두고 발전하여 갔다. 그러나 소 기르기는 이러한 파급 방향과는 반대로 유럽의 동남부에서 처음 시작되어 아나톨리아와 중동지방으로 퍼져나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스의 Franchthi 동굴은 구석기시대부터 계속 사람들이 살았던 곳인데 B.C. 6000년 무렵 이후로 양, 염소, 돼지, 소 등의 집짐승과 콩류 등의 식물을 길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무늬는 없으나 생김새가 다양하고 매우 잘 만들어진 토기들과 함께 플린트와 흑요석으로 만든 작은 돌날 및 격지석기[각주:3]들, 간석기, 조가비로 만든 치레걸이 등도 나오고 있다. B.C. 4000년기 중반이 되면 프랑스 서부, 영국, 북유럽 평원,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농경의 증거가 발견되며 호숫가 등에 조그맣게 모여있는 촌락 등이 발견된다.


아프리카 나일지역에서는 중동지역 보다 약 2000년 가량이나 더 채집생활을 계속한 뒤 원래는 건조농사인 밀과 보리를 관개농업으로 바꾸어 농경을 시작했다. 그러나 밀과 보리 농사는 사하라 이남을 넘지 못했으며, 아프리카 대륙 고유의 농경은 후기 석기시대의 물고기잡이에 기초한 정착생활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프리카 동부의 호수가 많은 지역이 그러한 곳으로 꼽히고 있는데 숲의 가장자리, 개울가나 개간지 옆에서 기름야자나 얌, 기니 콘(수수의 일종) 등이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고있다. 수수는 나일 중류지역에서도 B.C. 3000년이면 출현하며, 구근류(tuber)는 고고학적 자료를 찾기 어려우나 아프리카 농경에서 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재배기원은 대략 B.C. 5000~4000년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축사육은 당나귀와 고양이, 그리고 오로지 식용으로만 기르는 기니 파울(guinea fowl) 등이 있다.



중미, 동남아시아 신석기문화(中美, 東南亞細亞 新石器文化) :


한편 이들 지역에서 동떨어져 있어 그 양상이 매우 다르게 전개되어 나간 곳으로 중미지방을 들 수 있다. 신대륙의 가장 유명한 작물인 옥수수는 B.C. 5000년경부터 재배되기 시작하는데, 이 무렵에 해당하는 멕시코의 떼우아깐(Tehuacan) 계곡에서 나온 야생 옥수수인 테오신테(Teosinte)는 아직 원시적이고 작아서 2~3㎝ 정도이다. B.C. 1300년 무렵이면 이러한 생계양식이 멕시코 일원에서 확립되어 중미 각지에 퍼졌고 B.C. 400년 무렵에는 옥수수가 이 지역 음식물의 80%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카사바, 마니옥, 감자, 고구마 등 신대륙의 재배작물은 매우 다양하다. 또 강남콩, 아보카도, 호박 등을 길러서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하였다. 가축사육의 범위는 훨씬 좁은데, 마땅한 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페루의 야마와 알파카, 비꾸냐, 기니 피그(Guinea Pig) 정도가 고작이며 이들은 고기나 털, 가죽과 함께 특히 수송수단으로서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신대륙의 농경은 중동에 비해 매우 늦게 시작되었지만 농경이 일단 시작된 이후의 문화진화는 중동의 그것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발전하였다고 한다. 남미의 경우 기따르레로 동굴에서 약 10000년전에 구근류(tuber)와 뿌리류를 먹고 산 증거가 있다고 하며 비슷한 예로는 동남아시아(태국)의 Spirit Cave에서 B.C. 9000년 무렵 마름, 강남콩, 완두콩 및 곡류 등이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더 이상의 후속연구는 나오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농경은 이곳 일원에서 전개되어간 자갈돌석기 문화인 호아빈문화가 B.C. 7000년경 토기가 출현하면서 네모자귀 그리고 간돌칼 등이 출현하는 쪽으로 문화양상이 급변하게 되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신석기문화(中國 新石器文化) :


중국의 경우 독자적으로 신석기문화 연구를 수행해 나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라는 용어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정착촌락, 토기사용, 일정범위의 작물재배 및 가축사육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 지역별로 전개되어간 신석기문화 유형을 상당히 세분해 놓았는데 B.C. 5000년 무렵이면 仰韶文化, 大汶口文化, 馬家浜文化, 大坌坑文化 및 新樂文化 등으로 대별된다. 농경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곳은 馬家浜文化의 모체인 河姆渡 유적으로서 B.C. 5000년경부터 쌀농사를 시작했으며 장립형과 단립형이 다 나타난다고 보고되었다. 개와 돼지를 비롯한 가축사육도 이 무렵에 나타난다.


그러나 河姆渡 유적의 물벼(水稻) 꽃가루와 형태상 일치하는 벼꽃가루가 호남성(湖南省) 풍縣의 彭頭山 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위에쓰 문화가 8200~7800년 전(미보정)으로 측정되어 벼농사의 기원이 훨씬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재배종인가 야생종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중국 동북 3성(遼寧省, 吉林省, 黑龍江省) 지역에서 전개되어간 신석기문화는 한국의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특히 중요하다. 이곳의 신석기문화 양상은 이 지역에서 1970년대 이후로 활발해진 고고학적 조사에 힘입은 바 크다. 요하를 중심한 최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요서지방에서는 査海 유적 등을 중심으로 신석기문화의 시원이 B.C. 8000년 경까지 소급되며 요동까지를 아우른다면 그밖에 新樂, 后窪 유적 등에서 하가점 하층까지의 문화가 연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査海 유적의 토기는 구운 온도가 비교적 낮고, 생김새가 단순하며 항아리가 대부분이다. 석기는 돌보습[각주:4]과 돌도끼가 대표적이고 짐승뼈로 보아 농업과 목축업이 생업경제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지방의 전기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后窪 하층이 대표적인데 평면 원형과 네모꼴의 많은 집자리가 나왔으며 토기는 모래질의 홍갈색 또는 흑갈색 단지, 접시, 잔 등이 출토된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之’자무늬(꼬불무늬)는 한국 신석기 토기들과의 친연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황하 이북의 화북지방이나 요하를 중심한 요녕(遼寧)지방 등에서는 조, 수수 등의 잡곡류와 함께 배추 등의 채소류도 재배되었다. 遼寧省 新樂 유적의 경우 B.C. 6000년 경에 탄화된 기장이 나왔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신석기시대에 사냥과 물고기잡이가 여전히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B.C. 3000년 무렵에 해당하는 良渚文化에서는 순장(殉葬)의 풍습과 옥기를 비롯한 특별한 껴묻거리, 그리고 제단 유적 등이 출현해서 일찍부터 주목받았는데 최근에 와서는 대표적인 紅山文化에 드는 B.C. 3500년 무렵의 牛河梁이나 東山嘴 유적에서도 여신묘나 대형의 제사 유적, 대형의 돌무지무덤, 여러 모양의 옥기 등이 발굴되었다. 발굴보고자들의 대토론에서 이 유적을 계급사회의 뚜렷한 증거이며 중국의 고대종교와 원시문명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땅의 면적만큼이나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문화가 전개되어 나간 양상을 보이며 간석기와 토기를 쓰면서도 여전히 사냥, 채집, 물고기잡이가 중심이 되어 식물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지역도 있다. 예를 들면 江西 仙人洞이나 廣西 甑皮岩 등의 동굴유적과 新開流, 昻昻溪 등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이북에 있는 유적들이 그러하다. 이들 지역은 시베리아나 러시아의 연해주, 그리고 알래스카 및 미국의 북서해안에 연결되면서 낟알기르기와는 무관한 신석기문화를 창출해내었다. 아무르 하류의 유적들에서는 정착생활의 동인이 계절적으로 회유하는 물고기떼를 장악하는데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지역에서는 대부분 세석기가 동반된다.



일본 신석기문화(日本 新石器文化) :


일본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이해는 한국에서 전개되어간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한국 남해안 등지와 자주 교역한 증거가 나타나며 지역적으로 가깝다보니 제 문화요소 및 문화양상들도 비슷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매우 독특한 신석기문화의 발전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신석기문화라는 말 대신에 ‘죠몽(繩文)기’라는 용어를 변함없이 사용하고 있으며 죠몽토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일찍 출현한 토기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죠몽의 초창기는 한랭한 최종 빙하기에서 조금씩 후빙기로 향하는 과도기 단계이며, 방사성탄소연대에 의하면 13000~10000 B.P.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대형 돌창이나 도끼 등 대륙 석기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석기군의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전후하여 죠몽문화의 특징적인 도구인 돌화살촉이나 토기도 출현한다.


조기 단계는 관동지방의 토기편년에서 말하는 撚사文系土器群·貝殼沈線文系土器群·貝殼條痕文系土器群의 시기로 방사성탄소연대로는 10000~6000 B.P.에 해당한다. 조기 단계가 시작되는 10000년전 무렵 세계적으로 기후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는데, 일본 최고의 조개무지인 神奈川縣 夏島 조개무지나 千葉縣 西之城 조개무지가 이 시기에 형성되고 후빙기의 환경변화에 대응한 본격적인 수산자원의 이용이 개시된다. 식물채집 가공구인 뗀도끼·갈돌·공이 등이 생산용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뼈낚싯바늘과 작살형의 자돌구(刺突具)가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토기는 대부분 깊은바리모양(深鉢形)으로서 초창기 단계와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나 그릇의 크기와 장식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입술부분이 벌어지고 끝이 뾰족한 토기가 대부분인데, 서일본에는 일부 납작밑 토기도 확인되며, 조기 후반에는 구연부가 파상으로 된 ‘山’자형이나 입술 아래 부분에 단이 져 있다든지 목이 잘록하다든지 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단계에 수렵·어로·식물채집이라고 하는 생업활동의 수단이 본격적으로 확립되면서 연중 계절적 변화에 따른 식료획득이 용이하게 되어 본격적인 정주생활이 시작된다.


전기 단계는 조기 단계의 토기 형태가 둥근밑(丸底)에서 납작밑(平底)으로 일반화되고 문양이 다승문(多繩文)으로 변화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방사성탄소연대에 의하면 6000~5000 B.P.에 해당한다. 전기 전반은 전신세의 최온난기에 해당하고 해수면 상승도 최고조에 달한다. 일본 각지의 해안가에서는 조개무지(貝塚)의 형성이 본격화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어로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온난한 기후환경에 따른 안정된 식료자원을 배경으로 이 단계 이후 정형적(定型的)인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며, 취락의 내부나 인접지에 집단무덤이 형성되고 있다. 간도끼나 목공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여러 가지 목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특히 칠(漆)기술이 발달하여 실용품에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칠기가 나타나고 있다. 전기 말에는 얕은 바리나 목단지도 등장하는 등 그릇의 형태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으며, 동북지방에서는 대형의 원통모양 토기가 많이 만들어진다.


중기 단계는 죠몽토기 중에서도 가장 입체적인 조형문양이 발달한 점이 특징이다. 특히 관동·중부지방의 ‘勝坂式土器’나 호꾸리꾸지방의 ‘馬高式土器(火焰土器)’라 불리고 있는 일군의 토기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용기 자체보다 덧붙인 장식적 돌기가 더 큰 토기도 출현한다. 방사성탄소연대로는 5000~4000 B.P.의 연대에 해당하며, 중부 일본에서는 토기의 기능분화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중부 일본에서는 기종이 다양해지는 반면 동북 이북이나 서남 일본에서는 여전히 심발형이 기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생산용구는 식물채집도구 및 가공구인 뗀도끼, 갈돌, 공이 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식물채집 가공구가 생산용구의 주체를 점하게 되었음이 명확시되고 있다. 식물자원을 고도로 이용하는 생업형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안정된 식료자원의 공급이 보장되어, 중부·관동·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죠몽문화의 최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관동지방의 武藏野 대지는 중·소하천 유역 평균 3~4㎞사이에 중기 단계의 취락 유적이 분포하는데, 이것은 평균적인 죠몽인의 행동범위라 생각되는 5㎞의 수치에 비교하면 폭발적이라 할 수 있는 취락의 증가와 팽창을 나타내는 것이다.


후기 단계는 대략 4000~3000 B.P.에 해당하는데, 기후가 한랭하고 습윤한 환경으로 변화하여 육상 식물에 큰 피해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는 ‘堀之內式’에서 ‘加曾利B式’에서와 같이 마소승문(磨消繩文)의 발달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가진 토기군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동일본에서는 기벽이 얇고 정교한 토기가 만들어지는데, 기형변화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심발(深鉢), 천발(淺鉢) 등이 나타남은 물론 귀때토기, 표수토기(釣手土器), 고배, 향로형토기, 목단지들과 함께 쌍구(쌍口)토기 등의 각종 이형(異形)토기도 출현한다. 후기 후반의 구주(九州)지방에서는 마소승문 수법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만기(晩期)에 일반화하는 흑색마연토기가 등장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중부·관동의 내륙부에, 중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로 인해 식료자원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동일본의 태평양 연안지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어업자원을 개발하고 관동지방에서는 내만성 어로를 발달시켜 대규모 조개무지가 형성되고 있다. 쿠로시오해류(黑潮)와 친조(親潮)가 교차하는 해역을 가진 동북지방에는 주술적·제사적 유물이 풍부하게 만들어지고 환상석렬(環狀石列)이나 환상토리, 환상성토 유구 등 대규모의 제사유구도 등장하고 있다. 한편 서일본에서는 중기 단계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확인되지 않으며, 동일본에서의 기후 악화와는 달리 비교적 변화가 없는 추이를 보인다.


만기 단계는 3000~2400 B.P.의 연대에 해당하며, 풍부한 기종과 장식성을 특징으로 하는 ‘카메가오카(龜ケ岡)式系’ 토기군과, 천발과 심발이라고 하는 단순한 기종 그리고 장식성을 배제한 서일본의 돌대문(突帶文)계 토기군이 일본열도를 크게 구분하며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위치하는 관동지방에서는 만기 전반까지 ‘안쿄우(安行)式系’ 토기군이 지역색을 뚜렷이 나타내며 분포하는데, 후반에 들어오면서 관동지방의 독자적인 지역색은 점차 없어진다.


만기의 동북지방에는 후기 단계의 외양성 어로를 보다 발전시킴과 아울러 연어·송어 등 하천어업을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이것을 기초로 죠몽문화의 극치를 나타내는 ‘카메가오카(龜ケ岡)문화’가 전개되고 있다. 각종 어로구는 카메가오카(龜ケ岡)문화에 최고도로 발전하고 토우(土偶), 암판(岩版), 석봉(石捧) 등 주술적·제사 유물의 다채로움이 더해지면서 극히 뛰어난 칠기가 제작되는 등 그 내용의 풍부하다.


만기 단계의 구주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서일본에서는 식물채취 가공구인 굴지구, 갈돌 등의 출토 예가 증가하고, 특히 굴지구에 수확도구로 추정되는 석기가 세트로 등장하고 있어 만기 전반에는 이미 재배식물의 이용이 진전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으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논농사기술도 등장하게 된다.



극동 신석기문화(極東 新石器文化) :


극동의 신석기시대는 1920~1930년대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1926~1927년에 M. M. 게라시모프(Gerasimov)에 의해 발굴된 오시포프카(Osipovka)와 1934년 A. M. 졸로타예프(Zolotaev)에 의해 수추(Cuchu)섬의 발굴이 수행된 것이 극동 신석기시대 연구의 시작이었다. 본격적으로 신석기시대가 연구된 것은 오클라드니코프에 의해 1930년대 중후반 아무르강유역과 극동지역에서 135개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오클라드니코프의 연구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현재까지도 극동의 신석기시대의 주요한 특징을 정의하는 데에 중요하다. 즉, 그는 석기공작에 있어서 극동 신석기시대의 석기는 격지·잔손질된 돌날석기·몸돌·도끼 등의 주요 석기의 제작기술 및 형태에서 구석기시대 및 중석기시대와 비슷하다는 점, 토기와 관련해서는 납작밑이며 무늬는 빗금무늬·번개무늬·찍은무늬 등이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토기의 겉 표면에는 점토막(slip)이 덮인 점 등을 지적했다.


그의 연구는 결국 연해주의 신석기시대는 구대륙에서 정의하고 있는 신석기시대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든 차일드에 의해 정의된 신석기시대 혁명(정주를 기반으로 해서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이행)의 요소가 극동지역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 극동의 신석기문화는 어업을 기반으로 하는 채집경제로 충분히 잉여생산을 할 정도의 능력이 되었으며, 온화한 자연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어업 및 수렵에 기반하여 주민들은 정주생활을 할 수 있었다.


최근(1990년대)들어 아무르강유역의 신석기시대는 10,000여년 이전의 고토기가 발견되면서 그 연구가 심화되고 있다. 주요 유적으로는 오시포브카, 가샤, 사카치 알리안, 말라야 가반(Malaya gavan), 노보페트로프카, 그로마투하, 오시노보예 오제로, 수추섬 유적 등이 있다. 특히 아무르강 하류에 위치한 수추섬은 신석기시대 여러 시대의 주거지가 완벽하게 보존된 채로 남아 있어서 ‘아무르의 미케네’라고도 불리운다.


그로마투하(Gromatukha) 유적, 노보페트로프카(Novopetrovka) 유적 등은 각각 아무르강 중류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한편 아무르강 하류의 보즈네세노프(Voznesenov) 유적은 다층위 유적으로 그 연구를 통해서 말르이쉐프카·콘돈·보즈네세노프 등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들의 편년상 및 문화가 분리되었다. 이들은 모두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발굴된 반면, 수추섬은 19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계속 발굴되고 있는데 대단위 주거 유적이며 단순한 문화의 구분이 아닌 신석기시대인의 예술 및 정신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그리고 사회복원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극동지역에서는 전면 발굴된 유적으로는 자이사노프카(Zaisanovka)1 유적, 다층위 유적인 올레니(Oleni)1 유적, 청동기시대 유적을 포함한 다층위유적인 시니 가이(Siniy gai) 유적, 그리고 쵸르토브이 보로따(Cherotovy vorota) 동굴 유적과 발렌틴(Valenteen) 곶 유적 등이 있다. 최근 1993년부터 발굴되고 있는 보이스(Bois)만 패총 유적은 최초의 매장 유적이며, 동시에 한국의 두만강과 인접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주요문화로 아무르강 중류에서는 전기문화에 노보페트로프카문화, 그로마투하문화, 중기문화로 말르이쉐보(Malyshevo)문화, 콘돈(Kondon) 등이 있으며, 말기에는 보즈네세노프문화 등이 있다. 연해주에서는 현재 3개의 문화유형이 알려져 있는데, 루드닌문화(Rudnin)와 보이스만문화는 비교적 이른 시기이며, 자이사노프카는 후기까지 존속되어서 청동기시대 이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아무르강변의 가샤(Gasya) 유적에서 발견된 홍적세[각주:5]기의 토기는 현재 논란이 이어지고 있어서 중석기시대, 전환기, 또는 신석기시대 전기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시기구분은 주로 방사성탄소연대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형식학적 분류에 의해서 상대연대를 설정할 만큼 유적이 많지 않으며, 토기의 양이 많지 않다는 점, 게다가 각 유적에서 나타나는 문화상의 차이가 시간적인 차이인지 지역적인 변형인지에 대한 학자간의 통일된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연해주지역에서만 40개의 방사성탄소연대가 측정되었는데 루드닌문화와 보이스만문화의 중심연대는 B.C. 5000~4000년기에 해당하며, 자이사노프카문화[각주:6]의 경우 초기 및 말기에 해당하는 자료가 없다. 이 경우 올레니 유적에서 시니가이 청동기문화[각주:7]의 상층에 있었다는 것에 근거해서 B.C. 2000년기 중엽정도가 하한일 것으로 본다.


극동의 초기 신석기시대 석기는 돌날 또는 돌날격지로 가공되는 것으로서 대부분의 유적에서 널리 발견된다. 이 양상은 지역적으로 약간씩 다른데, 제야강의 그로마투하문화에서는 돌날공작이 존재하나 주종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중기 아무르강의 노보페트로프카문화에서는 한쪽 면에 2차가공을 하는 기법만이 존재하는 반면 말르이쉐보문화에는 양면 2차가공이 특징이며, 눌러떼기가 주종을 점한다. 루드닌문화에서는 때려떼기가 주종을 점하고 눌러떼기는 소수이며 양면 눌러떼기기법은 더욱더 적다. 돌날석기가공은 후기구석기[각주:8]에서 발전한 자체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석인가공의 수법 및 그 유물의 존재유무는 시간적인 위치를 정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한편 오시포프카문화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후기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석기전통의 변화에 대해 좀더 명확히 알게되었다.


신석기 중기가 되면서 돌날석기는 감소하게 되며 2차 가공의 경우에도 전면이 아니라 끝 부분만 가공하는 것으로 바뀐다. 중기 이후부터는 북중국 및 한국의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석기공작이 발전하여서 지역적인 석기가 발전한다.


극동 신석기시대의 생업경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물고기잡이와 채집경제가 주종을 이루며, 풍부한 어로자원은 신석기시대 정주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연해지역 및 강하구가 바다와 연접한 지역에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된다는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유적 및 암각화에서 구체적인 수렵의 증거도 드러난다. 예컨대 신석기시대의 암각화로 알려져 있는 사카치알리안에서는 배에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양이 있으나 물고기는 없으며 여우, 사슴, 오리 등이 표현되었다. 또한 그로마투하의 석기 및 동물뼈 분석결과 어업이 주종을 이루긴 했으나 동시에 반유목적인 생활상이었으며, 그 문화의 말기에 가서야 비로소 어업에 기초한 생활을 영위했음이 밝혀졌다.


한편 자이사노프카1 유적에서도 수렵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쵸르토브이 보로타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경제유형이 밝혀졌다. 쓴자국 및 동물뼈 분석 결과 모두 사냥이 주 생산원이었으며, 굴껍질 및 패각의 발견은 이들이 어로물을 채집했으나 소량의 물고기뼈를 통해 어업은 단지 생계의 보조수단임을 말해준다. 이밖에 개의 가축화흔적 및 직물의 발견으로 수공업이 일반화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발렌틴 유적 석기의 사용흔 분석결과 다양한 석기류가 분류되었으며 광물을 굴착하고 가공하는 도구(괭이, 석판 등)가 많고, 가죽을 가공하는 도구도 발견되었다. 현재 이 유적은 적철광과 갈철광에서 채색용 안료를 채취하던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와 같이 신석기시대 극동지역 주민은 어업뿐 아니라 수렵, 수공업 등 다양한 생업활동을 영위하였다.


극동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평저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모두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소성온도는 대개 600~650℃이나 신석기시대 말기에 가면 700~800℃로 높아진다. 토기기벽의 정면기법을 보면, 신석기시대 전(全) 시기에 슬립을 표면에 씌우는 수법이 사용되지만, 후기에는 표면을 마연하는 수법이 등장한다. 토기의 문양은 빗살무늬가 주종을 이루나 지역별로 특징적인 무늬도 존재하는데, 예컨대 ‘아무르 망상문’이라고 하는 격자누름문은 아무르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번개무늬는 연해주의 말기 신석기시대에 주로 보인다. 또한 붉은 슬립을 입히고 인면을 새긴, 채도를 연상시키는 토기도 보즈네세놉스크(Vosznesenovsk) 주거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 공통적으로 분포하는 빗살무늬(새김문, 그음문, 압인문, 찰문 등)가 각 지역별·문화별로 분포하며, 노보페트로프카문화의 경우 융기문토기도 존재한다.


극동 신석기시대의 주민은 현재 이 지역에 거주하는 퉁구스-만어계 및 고아시아어계의 원주민과 많은 상사성(相似性)을 보인다고 여겨지고 있다. 예컨대 콘돈문화와 보즈네세보문화에서 발견된 예술품은 현생 원주민이 신석기시대인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보이스만 유적과 쵸르토브이 보로타 유적의 인골과 가장 가까운 현생인류는 고아시아족의 일종인 북극권의 츄크치, 캄차트카 인종이라는 일관된 결론이 나온다. 러시아학계에서는 극동의 신석기시대의 직접적인 후손은 고아시아어계이며 츄크치를 비롯한 북극권의 인종은 신석기시대 이후 북쪽으로 이동한 주민들로 본다. 그리고 이들은 고아시아어계 중에서 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일 것이다. 현 극동에 거주하는 민족 중에서는 니브흐(길략)인이 그들의 직접적인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춭처 : 네이버 고고학사전

















  1.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사용된 돌을 갈아서 만든 석기. 도끼, 끌, 낫, 칼, 화살촉 등의 공구와 무기가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2. 신체나 의복에 붙여 장식을 하거나 신분의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의 총칭 [본문으로]
  3. 몸돌이나 대형석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떼어진 모든 1차 생산물로 협의의 개념으로는 돌날과 대비되는 말로서 격지라는 용어를 쓴다 [본문으로]
  4. 쟁기 또는 극젱이의 술바닥에 맞춰 쓰는 삽모양의 연장을 말한다. 농사를 지을 때 씨를 뿌리기 위하여 땅을 갈아 엎는데 썼다 [본문으로]
  5.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이며 오늘날과 같은 기후상태와 대륙빙하가 발달하였던 시기가 교대로 나타나는 대단히 불안정한 기후로 특징되는 시기로, 흔히 “빙하시대(氷河時代)”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문으로]
  6. 연해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본문으로]
  7.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농경과 목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생산력이 증가하고 이를 토대로 정주성 대규모 마을이 형성되며, 사회 내적으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에 신분적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본문으로]
  8. 일반적으로 다양한 돌날석기공작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인류문화발전단계이다.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기후가 대단히 추워지는 시기이며 체질적으로 완전한 현생인류가 전 세계적으로 출현하는 시기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