Çatalhöyük at the time of the first excavations
Çatalhöyük (Turkish pronunciation: [tʃaˈtaɫhøjyc]; also Çatal Höyük and Çatal Hüyük; çatal is Turkish for "fork", höyük for "mound") was a very large Neolithic and Chalcolithic proto-city settlement in southern Anatolia, which existed from approximately 7500 BC to 5700 BC, and flourished around 7000BC. It is the largest and best-preserved Neolithic site found to date. In July 2012, it was inscribed as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Çatalhöyük is located overlooking the Konya Plain, southeast of the present-day city of Konya (ancient Iconium) in Turkey, approximately 140 km from the twin-coned volcano of Mount Hasan. The eastern settlement forms a mound which would have risen about 20 m above the plain at the time of the latest Neolithic occupation. There is also a smaller settlement mound to the west and a Byzantine settlement a few hundred meters to the east. The prehistoric mound settlements were abandoned before the Bronze Age. A channel of the Çarşamba river once flowed between the two mounds, and the settlement was built on alluvial clay which may have been favourable for early agriculture.
출처 : Wikipedia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Çatalhöyük |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의 Çatalhöyü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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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르트가 터키의 남동부 아나톨리아 코냐 일대의 차탈휘크(Catal Huyuk) 유적을 발견하기전까지는 인류최초의 도시국가는 이스라엘의 예리코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차탈휘크는 수메르 문명의 모체 격으로 그들은 셈족도 수메르인도 아닌 소아시아 토박이였으며 6,000여명의 시민이 거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 금속병용 과도기 시대를 살았던 그들은 매우 체계적인 도시를 이루었고 곡물을 재배하고, 말과 돼지를 가축으로 사육하였다. 또한 원시적 직조기술을 알고 있었으며, 포크와 숟가락도 이용했다.
주거는 비슷하게 계획된 직사각형의 방이 4개씩 있고, 지붕에서 사다리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외벽에는 문이나 창문이 전혀 없는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사람이 죽은 후 시신은 독수리가 쪼아먹고 남은 유골은 수습해서 유골에 예쁜 색칠을 하여 매장하였다.
비너스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늘어진 젖가슴을 가진 테라코타의 인류 최초의 모신상(母神像)도 발굴하였다. 벽화에는 소· 사슴 또는 사냥하는 그림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14개의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출처 : 바람 (middleway49), 건축물로 본 인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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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avations at the site, located on the Anatolian plateau of central Turkey, are wrapping up after decades of digging.
- BC 7500~BC 5700년경 (수메르 문명보다 오래되었습니다)
- 신석기 시대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도시 차탈회위크 (오늘날 아나톨리아 반도 지역 위치)
- 인구수는 약 6천명 추정
- 밀, 보리 농사와 양, 염소, 소를 가축으로 삼아 살았고 (농사와 가축 모두 인류 최초임)
-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훨씬 이전...
1958년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의 코니카 근처에서 제임스 멜라트(James Melaart)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하면서 차탈 휘이크(Catal Huyuk)는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기원전 6천500년 정도에 건설되어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5천년 정도에 그 모습을 감춘 이 도시는 인구 약 6천명 정도가 함께 거주한 대규모 집락지이자 도시였다. 신석기 시대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인구이자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삼각지 지역에 둥지를 틀고 비옥한 토지 위에 곡물과 견과류를 비롯한 농사를 지었다. 벌판에는 가축까지 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는 견고한 성벽도 없었고 그곳을 지키는 군사도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직사각형 주택을 짓고 살았으며 한 주택에서 약 100년 정도 사용한 후에 그것을 메우거나 부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주택을 건설하는 식으로 긴 세월을 지내왔다. 같이 살던 가족이 죽기라도 하면 그들이 살던 집 바닥을 파고 사랑하는 사람을 순장하였다. 가족이라는 것이 죽어서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이었던 셈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주택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급기야는 이웃집과 벽을 맞대고 있는 모양으로 변해갔다. 집과 집에 오밀조밀 모이다 보니 길이나 도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성벽도 없었던 곳이다 보니 포악한 짐승이나 적군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원초적인 수비 대형이었을지도 모른다. 특별하게 큰 주택이나 건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직은 살벌한 계급사회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며 원시 신앙을 섬기던 사원 또한 일반 주택과 그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했으니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닌 제사장 같은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모두들 고만고만한 크기의 집에 모여 살면서 지붕 위로 올라가 하루를 즐기고 또 고만고만한 사원에 모여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제물 삼아 무병(無病)과 안위(安危)를 빌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차탈 휘이크에는 먹고 살고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질투와 욕심도 없이 햇빛 따사한 옥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나 하고 지낼 정도로 여유도 있었다. 서로 살 맞대가면서 사랑해야할 자연인과 가족이 있었다. 다른 곳을 침탈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자기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그곳의 자연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버내큘러(vernacular)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도 필요 없었다. 한 웅큼 움켜쥐고도 욕심이 끝이 없는 ‘필요한 최대한(necessary maximum)’의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저 하루하루 넉넉히 먹고 살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사는 일에만 충실한 이 도시는 다시금 ‘필요한 최소한(necessary minimum)’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출처 : [김영훈의 도시이야기] 차탈 휘크 ‘필요한 최소한’의 도시
이 부락의 특징은 도로가 거의 없으며 집들이 서로 붙어있어 지붕을 통해서만 다닐수 있었다. 이러한 배치의 장점은
1. 건물이 서로 기대로 있어 홀로 서 있는것 보다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2. 건물의 가장 외곽의 벽은 장식없는 벽으로 된 연속적인 띠를 이루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가 쉽다.
밀집된 건물군의 여기저기에는 옥외마당이 자리하는데, 이 마당은 쓰레기장으로 사용되었다.
주택들의 크기가 다양 하지만 표준 면적에 따라 진흙벽돌로 된 벽으로 지어 졌으며 이것은 다시 단단한 목조뼈대로 보강되었다.
typical interi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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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 패턴으로 직조된 깔개와 흑요석을 매끄럽게 갈아서 만든 거울 등이 이 건물의 거주자들이 사용했던 유물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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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5700년 경에 이르러 카탈 휘잌에서 완전한 농경경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한세기도 안돼서 이 장소는 버려지게 되었다.
출처 : 괴수토리
□ 출토된 유물들
Aurochs' heads |
Earliest textile fragments |
각종 신들의 모습 |
두사자들이 마주보고있는 양각 |
벽화에 그려진 황소 |
벽화에 그려진 남자와 사슴 |
Original of the map |
This picture is believed to be a map of Çatal Höyük, dated at 6,200 BC. |
Reconstructed Catal Huyuk shr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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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pard Dance Painting |
Revealing a Wall Paint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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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 Reli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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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ion of Neolithic Pottery |
Pot with faces |
Complete pot |
Animal stamp se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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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Figurine |
Pigurine |
Five bone rings, had been cut from a single bone and were found on the left hand. |
belt buckle from b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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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벨레(Phrygia의 대지의 여신; cf. RHEA, Legacy of the Goddess) - 인류 최초의 테라코타(점토(terra)를 구운(cotta) 것) 모신상(母神像)
Enthroned Goddess on left was found in a grain bin at Catal Huyuk 6000 BC. It is the oldest representation of Anatolian goddess who would be known as Cybele. Image on right is the enthroned Roman Goddess, Cybele 250 AD.
흙수저·금수저도, 성차별도 없었다는 8000년 전 선사인들 삶터
복원한 차탈회위크 유적 거주시설. 황소뿔 장식이 벽에 붙어 있고
주거시설과 인골이 매장된 무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이채롭다.
터키 앙카라 아나톨리아고고학박물관에 있다.
8000~9000년 전 인류사상 최초의 신석기 농경주거지로 손꼽히는 소아시아 고원의 차탈회위크 마을터는 인류사의 상식을 뒤엎은 유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전체가 가족이었다. 동등한 넓이의 집터를 각기 꾸려 지붕 구멍을 통해 서로 오가며 소통하고 곡식을 나누고 후손을 함께 길렀다.
Catalhoyuk is the largest and oldest human settlement site found to date.
□ Exca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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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from top of the mound |
참조 :
1. 공식 홈페이지
2. Flickr
3. Çatal Höyük: (The 'Forked Mound')
5. 흙수저·금수저도, 성차별도 없었다는 8000년 전 선사인들 삶터 [한겨레 2017-08-17]
[인류문명의 뿌리, 아나톨리아(4)-코니아와 차탈회위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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