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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ischa Elman

 

로멘틱한 바이올린 소리의 미샤 엘만(Mischa Elman (1891 - 1967))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은 하이페츠 (Jascha Heifetz) 이전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와 더불어 20세기초를 수놓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명이었다.

 

미샤 엘만은 1891년 1월 20일, 우크라이나 키에프부근의 탈노예(Talnoye)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이페츠(Jascha Heifetz), 짐발리스트(Efrem Zimbalist), 밀슈타인(Nathan Milstein)과 더불어 신동으로 극찬받았고, 특히 그 아름다운 음색은 <엘만 톤(Elman tone)>이라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의 부친은 처음에 엘만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엘만이 6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오뎃사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게 되었다. 최초의 스승은 피델만(Alexander Fiedelmann)과 브로드스키(Adolf Brodsky)였으나, 1902년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의 오디션을 통과하여 성 페테스부르그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였다.

 

1904년 12세 때에 벌써 러시아 국내는 물론 런던에서까지 연주회를 열어 일약 악단의 총아가 되었다. 즉, 1904년 성 페테스부르그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진 뒤, 1904년 10월 14에는 베를린에서, 1905년 3월 21일에는 런던, 1908년 12월 10일에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미국에서의 대 성공으로, 주로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1923년 미국에 귀화해서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58년 12월 10일, 미국 데뷔 5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공연이 뉴욕에서 열렸으며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미샤 엘만을 가리키는 단어 가운데 가장 귀에 익은 것은 '엘만 톤'이 될 것이다. 올드 팬들에게는 유성기 속의 바랜 음색처럼 아련한 향수로 다가서는 말인데, 실제로 요즈음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과는 현격히 다른 음악세계가 엘만이나 짐발리스트의 음악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 시대의 바이올린 주법은 그 시대 청중들의 기호에 가장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깊고 풍부한 빛깔의 비브라토를 추구했던 엘만의 선풍적인 인기는 시대적인 요구가 낳은 산물일수도 있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엘만의 레코딩이 시기에 따라 천양지차가 날 만큼 그 수준이 들쭉날쭉하다는 사실이다. 초기에 녹음되었던 빛나는 음반들을 접해보지 않고 엘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한 일일수 있다.

 

 

Mischa Elman plays Camille Saint-Saens - Introduction and Rondo Capriccioso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서 출생한 엘만은 아마추어 바이올린 주자였던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그의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

 

페테르부르크의 거물 음악인이었던 레오폴드 아우어의 귀에도 이 천재소년의 이야기는 전해졌다.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조차도 엘만의 연주솜씨에 경탄한 나머지 아우어에게 추천장을 써 주었을 정도였다. 아우어는 이 소년을 가르치는 동안 자기 자신의 음악에도 변화가 오고 잇음을 감지하게 된다. 즉 천재적인 제자와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서로의 음악을 공유하면서 또한 서로 미묘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현상은 엘만의 개성이 퍽 일찍부터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주기도 한다.

 

1904년의 베를린 데뷔와 그 이듬해인 런던 데뷔로 엘만의 성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블로흐(Ernest Bloch)의 <셸로모, Schelomo> 같은 작품에서는 엘만의 낭만적이고 진지한 자세가 잘 들어맞았다. 그가 존경했던 선배 연주자 이자이(Eugene Ysaye)의 비브라토가 그러했듯이 엘만의 비브라토에는 섬세하고 약동적인 색감의 변화가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여느 연주자들보다 무대에 오래 섰던 엘만은 이 비브라토를 말년에 이르기까지 간직하였다.

 

미샤 엘만은 전성기 때에는 29주로 구성된 한 시즌에 107회의 연주회를 가진 적도 있다고 한다. 엘만의 연주 스타일은 당시의 청중들에게 잘 맞았으므로 오늘날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기를 얻었다. 그의 황금시대는 제 1 차 세계대전 후의 10년 간이었는데, 비교적 일찍 노쇠하였다.

 

그러나 한 시대를 획(劃)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엘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특히 소품에서는 프리츠 크라이슬러, 쟈크 티보와 더불어 최고의 것이라고 칭송받았다. 엘만은 1967년 4월 5일, 미국 뉴욕 맨하탄의 그의 아파트에서 사망하였다.

 

엘만의 주요 녹음은 RCA, Decca, Vangard 레이블에 남아 있다.

레코드는 낡은 것일수록 좋다고 말할 수 있는데, 거의 폐반되고 <크라이슬러 소품집>이 남아 있어 <엘만 톤>의 엣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엘만은 생전에 4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애용하였다.

- 1703년산 Antonio Stradivari(1644-1737) "ex Vidoudez"  

- 1717년산 Antonio Stradivari(1644-1737) "Madame Recamier"  

- 1735년산 Antonio Stradivari(1644-1737) "Samazeuilh" 

 

1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제작년도가 미상인 악기였으며, 4대의 악기 모두 이전 소장자가 누구였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703년산 악기는 엘만 이후에 제네바의 Pierre Vidoudez, 취리히의 한 음악가(1972), 아헨의 Bongartz, 네델란드의 Andre Rieu(1998), 아헨의 Bongartz(1998) 등으로 소장자가 바뀌었다.

 

(출처: 빈들)

 

 

 

Mischa Elman Plays Dvorak-Kreisler "Slavonic Fantasy", 1954

 

 

Mischa Elman plays Vivaldi's Concerto In G Minor, Op.12 No.1

 

 

Mischa Elman plays Schumann's Traumerei

 

 

Mischa Elman plays Schubert's Ave Maria

 

 

Mischa Elman plays Camille Saint-Saens - Introduction and Rondo Capriccioso

 

 

Mischa Elman plays Fritz Kreisler: "Praeludium and Allegro in the style of Pugnani"

 

 

Mischa Elman plays humoresque

 

 

Mischa Elman plays Tchaikovsky Melodie, Op. 42, No. 3

 

 

 

 

 

 

 

WITH 樂 :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

 

폐허를 감도는 바람 같은 

[중앙선데이] 2017.06.04

 

“하늘은 어찌하여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내었단 말인가?”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가 평생 넘지 못한 벽이었던 제갈량을 두고 뱉은 한탄이다. 20세기 초 군웅할거의 클래식계에서 바이올린 영웅들을 한숨짓게 한 인물이 있었다.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1901~1987)다. 차가운 표정,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초인적 기교, 얼음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 같은 음색. 가히 혁명적이었다.

 

1917년 하이페츠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을 본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후 수많은 연주자들은 하이페츠라는 산을 넘기 위해 손에 피멍이 들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대한 산 그림자에 가려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이페츠보다 10년쯤 선배인 미샤 엘만(Mischa Elman·1891~1967)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만과 하이페츠는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러시아계 유대인이었고 신동으로 각광을 받았다. 명교수 레오폴드 아우어의 촉망받는 제자들이었으며, 당대 바이올린의 신으로 추앙받던 크라이슬러의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스타일은 사뭇 달랐다. 미샤 엘만은 ‘엘만 톤’이라고 따로 불릴 만큼 귀족적이며 부드러운 음색을 갖고 있었다. 하이페츠의 이지적인 연주에 비해 템포나 비브라토에 있어서도 종종 흘러넘치는 감상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하이페츠가 20세기의 문을 여는 지성적 모더니스트였다면 엘만은 20세기에 남아있던 마지막 낭만주의자였던 셈이다. 그 때문인지 엘만과 하이페츠 사이에는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성공 가도를 달리다 굴러온 돌을 제대로 만난 엘만의 입장에서는 피해의식이 있을 법하고, 하이페츠의 경우도 같은 음반사 소속으로 자신과 다른 음악관을 가진 박힌 돌이 신경 쓰였을 것이다. 둘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음반 녹음과 관련한 루머를 만들어낸다. 엘만이 인기 있는 협주곡 녹음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하이페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음반사 RCA가 하이페츠와 계약하기 위해 녹음 곡목에 대한 독점권을 주었기 때문에 엘만에게 같은 곡을 녹음할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엘만 측에서는 RCA가 하이페츠의 홍보에 더 열을 올리는 것 역시 못마땅했다. 음반사 입장에서는 저물어 가는 엘만을 지원하는 것보다 최고의 주가를 구가하고 있는 하이페츠에게 멘델스존이나 차이콥스키 협주곡 같은 인기곡을 몰아주고 이를 홍보하는 것이 음반 판매에 유리했을 것이다. 실제로 음반사와 결별하는 편지에서 엘만은 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쏠림 현상에 불만을 토로했고, 그게 하이페츠를 겨냥한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최후의 낭만주의자 미샤 엘만은 이후 어찌 되었을까. 하이페츠라는 거대한 빛 속으로 순순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의 나이 60대 중반 무렵이다.  

 

그는 RCA를 떠나기 몇 년 전, 무명의 반주자를 추천 받는다. 조세프 사이거(Joseph Seiger·1942~2013)라는 피아니스트다. 이후 둘은 엘만이 죽을 때까지 많은 실내악 공연을 하고 음반을 남긴다. 아버지와 아들만큼 나이 차가 났기 때문에 주도권은 늘 엘만에게 있었다. 사이거는 엘만에게 실내악의 핵심인 ‘잘 듣는 능력’과 ‘음표 안에 없는 음악’에 대해 배웠다. 그는 이런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며 미샤 엘만을 보필했다. 둘의 화학적 결합은 성공적이었다. 엘만이 RCA과 결별하고 새로운 음반사에서 더 넓은 레퍼토리를 녹음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이거의 응원 덕분이었다.  

 

라이벌인 하이페츠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새로운 반주자가 필요하게 된 그는 엘만의 사람임을 알면서 사이거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당시 하이페츠의 파트너라는 위치는 수입과 경력 면에서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거는 엘만과의 의리를 지킨다.  

 

CD로 처음 공개된 1961년 BBC라디오 실황녹음에서도 두 사람의 신뢰와 조화가 잘 느껴진다. 70살이 된 미샤 엘만의 바이올린은 매끈한 벨벳 톤이 아니다. 군데군데 빛바래고 바느질도 고르지 못한 노쇠한 음색이다. 게다가 정규 녹음이 아닌지라 녹음의 결도, 밸런스도 약간은 아쉽다.  

 

하지만 느리게 시작하는 헨델의 소나타 D장조 첫 소절부터 지금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고풍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온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에서는, 비브라토를 길게 이어갈듯 한 부분에서는 한걸음에 빨리 넘어가고 또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더 깊이 내려간다. 고풍이지만 고답적이지 않고 자유롭다.  

 

반주자인 사이거는, 재즈 아티스트들이 눈빛과 호흡을 맞추며 즉흥연주를 따라가듯, 엘만의 소리 하나하나에 완전히 집중하며 반주한다. 비탈리의 샤콘느에서는 하이페츠의 비장미도, 그뤼미오풍의 세련된 애상도 없다. 대신 폐허가 된 오래된 사원을 감도는 바람이 느껴진다. 눌변의 바이올린이 주는 아련함 역시 음악의 아름다움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미샤 엘만, 최후의 낭만주의자는 이렇게 스스로 음악이 되어버렸다.  ●

 

글 엄상준 TV PD

 

 

 

 

 























 

 Russian-born Jewish violinist, Mischa Elman (1891 - 1967)

 

 

 

 

Album

Elman - Jubilee Record / Celebrating 50 years of Violinstic Triumph (LP)
Mischa Elman, Violin, Joseph Seiger, Piano

제목 그대로 50주년 기념앨범이다.
이 앨범의 재미있는 점은 초기 스테레오 녹음이 통상 그렇듯이 스테레오와 모노 2가지 버전으로 발매되었는데 스테레오 버전에 없는 1곡이 모노 버전에는 들어 있다.






Mischa Elman Plays Kreisler Favorites / Mischa Elman,  Joseph Seiger







Mischa Elman - Hebraic Melodies / Achron, Bloch, Lavry, Bruch, et.al (LP)
Mischa Elman, Violin, Joseph Seiger, Piano






The Art df Mischa Elman / An Album of his favorite Pieces (LP)
Mischa Elman, Violin, Joseph Seiger, Piano

죽기 얼마전인 1966년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녹음이다.
발매는 엘만 사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엘만이 좋아했던 소품집이다.




Mendelssohn - Concerto In E Minor Op. 64 
Mischa Elman, Chicago Symphony Orchestra, Désiré Defauw





Beethoven - Concerto In D Major For Violin And Orchestra Op. 61 
Mischa Elman,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Georg Solti




Korngold - Suite from Much Ado About Nothing Op. 11
Achrin - Hebrew Melody
Josten - Sonatina
Bloch - Nigun

Mischa Elman, Joseph Seiger





Max Bruch - Concerto No. 2 In D Minor 
Mischa Elman, London Symphony Orchestra, Anatole Fistoulari





Mendelssohn - Violin Concerto In E Minor; Lalo - Symphonie Espagnole 
Mischa Elman, Vienna State Opera Orchestra, Vladimir Golschmann





Grieg - Violin Sonatas Op. 8 And 45 
Mischa Elman,  Joseph Seiger





Brahms - Sonata No.2, Sonata No.3 
Mischa Elman,  Joseph Seiger





Beethoven - Kreutzer And Spring Sonatas
Mischa Elman,  Joseph Seiger





Mischa Elman Plays Tchaikovsky And Wieniawski
Mischa Elman,  Joseph Seiger





Tchaikovsky - Violin Concerto
Mischa Elman,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Sir Adrian Boult








 출처: 빈들